지폐와 편지

leaf2/photos

허물어진 우체국 옆 느릅나무 가지 아래에서 파란 글씨로 엽서를 쓴다. 다만 세상은 갈색 우수를 느끼며 오후로 걸어가고 들에서 간혹 바람도 불었다.

한 여인이 나의 이름을 물었고 아련한 기억 속에서 간신히 찾은 녹슨 이름을 수줍은 마음으로 건네주었다. 주문처럼, 저녁같은 숨결로 나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머나먼 세월을 지나고 낡은 길모퉁이에서 나의 초라한 이름이 살아났다.

잊혀지고 사물이 된지 오래, 더 이상 인간의 감정으로, 사람으로 살지 못한지 오래. 한 장의 꼬깃한 지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날의 일용할 양식의 저주처럼.

그리하여 시외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또 십분쯤 걸어서 여기. 바람이 미친듯 불어 더욱 좋은 햇빛 아래, 대지의 향기는 서서히 가라앉고 온갖 색깔이 메말라가는 오후 네시에…

나는

사랑도 우정도 아무런 소식도 없는 하얀 종이 위에 마지막으로 너를 위하여 나의 오래된 이름을 쓴다.

2 thoughts on “지폐와 편지

  1. 무인선 08.11.11. 15:15
    시가 느낌이 차~암 좋습니다. 단풍잎도 단아한 정취가 나고요.

    유리알 유희 08.11.11. 15:21
    어머나! 이런 시도 쓰시는군요. 마치 열아홀살 큰애기가 쓴 연시 같아라. 즐감입니다. 여인님!

    다리우스 08.11.12. 05:34
    바람이 미친듯이 불어 더욱 좋은 햇빛 아래, 황홀 그 자체입니다. 간신히 나부끼는 내 이름 석자, 고이 접어 백지에 담다,,,,,,

    旅인 08.11.12. 09:45
    숙제 검사는 15일 이후라던데… 이런 시는 제 적성이 아니지만 한번 써 보았습니다. 언제인가 누가 제 이름을 물어보았지요. 그렇게 묻더니 한참 후에 그 사람이 제 이름을 불러주더군요. 그 이름이 저와 무관한 이름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고 또 오랫동안 잊어왔던 것을 찾은 듯 기쁨에 들뜨더군요. 젊은 시절의 향기를 찾은 듯 말입니다.

    샤론 08.11.13. 09:03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여인님….가을이 정취가 배어있고 여백의 미가 살아있는 시와 단풍의 구도가 참 아름답습니다..그런데 숙제 검사란 무슨 뜻인가요? 이 카페에는 숙제가있나요?
    ┗ 旅인 08.11.13. 09:24
    옙! 11월15일까지 숙제내야 합니다. 아직 안내셨어요? 안내시면 손바닥을 자로 맞을 지도 모릅니다.ㅋㅋㅋ 참고로 < 콜로세움(공지)>에 한번 가보셔요. 다리우스 대제의 칙령이 있을 겁니다.
    ┗ 샤론 08.11.13. 09:27
    한참을 웃습니다..제가 학생들이 숙제 안해오면 자로 손바닥을 때립니다..물론 처음세번정도는 봐줍니다..그 다음엔 …공지 보겠습니다..

    샤론 08.11.13. 09:34
    공지 보고 왔습니다..한숨만 나옵니다..기왕 여인님에게 묻던 것이니 계속 묻겠습니다..전 학생들이 숙제 안해오면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인데 이곳에선 좀 걱정입니다..제가 글을 써본적이 없어서요..아니 있긴합니다만 여기사람들이 쓴걸보면 난 완전 …..숙제 계속 안내면 쫓겨나나요? 전 그저 여러분의 글을 감상하고 싶기만 한데요..그리고 지식이 짧아서 글을 쓰지도 못합니다…고등학교 때 시 써본이후론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있거든요..
    ┗ 旅인 08.11.13. 10:09
    저도 전학 온 지 얼마 안되어 숙제는 두번 냈습니다. 아마 다리우스님께서 좀더 즐겁고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따스한 카페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숙제를 내시는 모양입니다. 저도 한 몇년전까지는 먹물하고 인연이 별로 였는데, 어느 카페에 글을 한번 내다보니 그것을 계기로 이제는 엄청난 양의 글이 쌓여버렸습니다. 그러니 한번 시도해보시지요.
    ┗ 집시바이올린 08.11.13. 17:35
    에그 샤론님! 손바닥을 때릴 정도면 이미 어느정도 기본은 갖추어져 있다고 여겨집니다. 누구나 함부로 넘의 귀한 손바닥을 때릴 수는 없기에 –;; (참고로 레테에서 가장 글을 못 쓰는 샴이 집시바이얼린이랍니다. 화이팅! ^^)
    ┗ 샤론 08.11.14. 08:56
    집시바이올린님 반갑습니다..저처럼 못쓴다고 자신있게 말씀하는 분을 뵈오니 약간 힘이납니다..그리고 쫓겨나지 않겠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고 있답니다..전 겸손이 아니라 진짜라니까요…
    ┗ 旅인 08.11.14. 08:25
    바이올린님의 시 한번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끈네줍니다. 아마도 글을 쓰면서도 모두들 자신의 글에 대하여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조금씩 주저하고 그런가 봅니다. 그러니 샤론님께서도 과감히 한번 질러보시지요.
    ┗ 샤론 08.11.14. 08:59
    그렇지 않아도 집시바이올린님 시 읽어보고 충격으로 앓아누워 있습니다..그 정도를 못쓴다고 하면 난….엄청엄청많이많이 못쓰는게 되는데 말입니다..저는 늘 사실을 말하는거지 겸손한 것이 아님을 밝혀둡니다..그러나 여러분께 배우면 될것이기에 희망을 갖고 여기서 견뎌보렵니다..
    ┗ 旅인 08.11.14. 14:55
    참 좋은 향기를 지닌 시였죠?

    집시바이올린 08.11.13. 23:06
    여인님은 시마져도…..! 어머 얄미워라 넘 미깔시렁 ㅜㅠ 휴우~ 한숨만… 너무 잘해도 따가운 눈총을 비껴 갈 순 없을 듯…. 열받아서 나도 못 쓰는 글이래도 아무거나 올리자!
    ┗ 旅인 08.11.13. 18:26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시를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쓰는 것을 부(賦)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노식과 정현(한대 경학의 최고 권위자) 밑에서 사사를 받았는데, 賦詩 하나 쓴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賦詩 앞에 (꼴란)이라는 말이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 주재에 무슨 시인가 꼴란 부라고 하자 하고…

  2. 목련
    가을 우체국,편지,한여인이 이름불러줄때가 좋았었지요.ㅎㅎ
    많이 사랑하셨어야지요.ㅎㅎㅎ
    아무튼 넘넘축하드립니다…참 멋지시구요..~~어제 가을비가 내린뒤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찹니다.건강에 유의 하세요.
    └여인
    많이 사랑했던 것 같은데, 사랑을 너무 모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직도 모르고요.
    련님도 많이 사랑하시기를….
    └여인
    목련님이라고 해야할 지 아니면 련님이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티스토리가 더 편한 것 같기도 합니다.
    └목련
    ㅎㅎ 에그..걍 고요님,편한데루 불러주세요.^^*새이름을 불러주셔두 되구요.
    그러고 보니..제이름쁜이 아니고 이름이 바뀌셨네요.
    ‘고요’라는 닉을 이전에 제가 참 써보고싶었답니다.

    애린
    어제 외출하기 전 이 글에 리플을 달려다 깊은 생각에 빠지는 바람에 결국 시간에 쫓겨 그냥 외출했어요. 낯선 누군가의 이름을 물어볼 때의 설레임, 전 거의 느껴보지 못하고 살았나 봅니다. 오늘은 누구든 붙들고 꼭 한 번 이름을 물어봐야지 다짐하면서 잠실구장엘 갔는데… 결국 야구만 보고 왔습니다.
    └여인
    지지난 주에 홍콩에 갔을 때, 결국 한국 가라오케를 가고야 말았습니다. 옆에 있던 아가씨가 묻지도 않았는 데, 자신의 이름을 말한 후 제 이름을 굳이 알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쭈빗거리며 제 이름을 말해준 후, 잊고 옆의 지인과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씨!”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더군요.
    저는 깜짝 놀라 그 아가씨를 보며, “나를 불렀어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요. 이름이 참 좋아요.”하며 웃는 그녀를 보면서 오랫동안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가끔 예비군 훈련이나 민방위 훈련 때나 꺼내쓰던 제 이름을, 한때는 그 누군가가 불러주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때때로 만나는 친구 외에 그 누구도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부장님이나, 여보, 애비, 아빠 등등의 것들로 하얗게 바래고 나란 사람은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내 이름을 불러주니 가슴이 설렌다고 하자, 그 아가씨는 제 눈에서 그런 눈빛을 보았다고 하면서 몇번이나 제 이름을 불러주더군요. 몇번이나 제 이름을 들어도 싫지가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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