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국수 이야기

홍콩에 출장을 왔다. 홍콩의 호텔은 아침식사가 제공되지 않아 지점으로 가는 길의 찬청(餐廳)에서 아침을 먹는다. 오늘 아침에는 魚蛋粉(Fish Ball Noodle)을 사 먹었다. HKD22이니 3천원 쯤 하는 셈이다. 월남국수의 일종인 이 쌀국수를 서울에서 사먹으려면 8천원에서 만원쯤 한다.

이 국수를 먹다보면, 간혹 서러워질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 집 식구들은 이 싸구려 음식을 좋아했다. 미끌하고도 넙적한 쌀국수와 생선살로 만든 하얀 경단을 서너알 정도 약간은 지린내가 감도는 국물에 띄운 이 국수에 고추기름인지를 얹어 먹으면 얼큰하면서도 짭잘한 맛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근무를 하러 홍콩에 차음 발을 디딘 97년 8월은 환율이 달러당 아마 960~980원 정도였을 것이다. 두달인가 있다가 식구들이 홍콩에 왔을 때는 IMF다 뭐다 하며 한국경제가 좌초된다는 소식이 세계경제 기사의 일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나는 회사 일 때문이라며 낯선 외국 땅에 발을 디딘 가족들을 돌보지도 못했다. 아들은 4학년이었고, 딸은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다.

홍콩에 와서 몇달이 되었는 데도 가본 곳이 없던 가족들이 한번 해양공원을 가자고 했다.

식구들을 데리고 해양공원을 가면서도 내 머리 속에는 여러가지 생각에 꽉차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홍콩사람들이 한국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일본보다 잘 살지만, 인구만 적은 나라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들이자, 불현듯 한국이 형편없고 가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들이 속아왔다는 느낌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인가 홍콩에서 제일 학비가 비싼 홍콩인터네셔널스쿨에서 한 홍콩학생이 한국아이를 향해서 “너는 왜 한국으로 가지 않니? 너희 나라가 거지가 되었다는데 무슨 돈이 있어서 이 학교를 다닌다는 거냐?”하고 말했고, 그 말에 열을 받은 한국학생이 그만 폭력을 사용했던 것이다.

학교 내에서 학생 간의 폭력에 대해서는 퇴학이라는 처분을 내리던 그 학교에서는 만약 <퇴학>이라는 처분을 내릴 경우 한국교민들의 여론이 붉어져 나와 자칫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감안, 엄중한 경고를 내리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그리고 오후에 배달되는 한국조간을 읽으며 한국사람들은 퇴근을 하곤 했는데, 홍콩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었는지 더 이상 신문을 보며 퇴근하는 한국사람들은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자금을 담당하던 나에게는 그런 일들은 몹시 지엽적이었다.

대출금의 상환 독촉을 받던 나에게 상환해야 할 금액은 엄청난 숫자로 불어나는 데, 갚을 수 있는 자금은 줄어들고 자금의 회전 또한 꽉 막혀버린 것이다. 아무리 계산을 해도 생존의 모델을 구할 수가 없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생존기간을 가능한 늘려잡는 일 그것 하나였다. 그러면 한국의 경제의 회생의 조짐이 보이고, 본사 또한 생존체제로 돌아선다면 그에 편승하여 지점도 살아날 수 있다는 그런 계산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나날의 길이는 지루할 정도로 길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자금담당을 하는 현지직원 하나와 지점장을 빼놓고는 다른 직원들은 그런 상황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런 상황을 말할 수도 없던 나는 외롭기도 했다.

해양공원에서 돌고래 쇼를 보고, 각종 놀이시설을 타고 난 후, 해양공원의 명물인 케이블카를 타고 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 배가 고팠는지 딸 아이가 “아빠, 저거 먹고 싶어!”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나도 그것이 뭔지 잘 몰랐는데 그것이 Fish Ball Noodle이었다. 리어커에 놓아 팔던 그것의 가격은 홍콩달러15불 이었다. 그것을 사주었더니 맛있게 식구들은 먹었다.

두 그릇을 사서 네명이 나누어 먹었더니 양이 모자랐는지 딸 아이는 “아빠, 한 그릇 더 사 먹자?”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나는 단호하게 “안돼!”라고 말해버렸다.

아마 그것은 내가 처음 홍콩에 올 때, 그 국수가 똑같은 홍콩달러 15불임에도 환율 때문에 이천원 밖에 안하던 것이 어느새 삼천오백원이 되어버렸다는 것과. 내일 회사가 갚아야 할 돈이 준비가 안되었다는 것과, 한국사람들은 형편없이 가난하다는 것 등이 내 머리 속에 마구 섞여 있었던 것 같다.

나의 대답이 단호했는지, 밝고 천진하던 여섯살짜리 딸내미는 더 이상 사달라고 보채지도 않았고, 갑자기 식구들의 표정도 시무룩해져 버렸다.

식구들이 터덜터덜 공원을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릴 때, 갑자기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무엇이 15불, 그것도 삼천오백원 밖에 안되는 한 그릇의 국수도 사주지 못하게 했을까? 배가 고프다면 팔다리를 잘라서도 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무엇이 그토록 처절한 빈곤을 느끼게 했을까?

그 날의 헛헛함 때문이었을까? 식구들은 홍콩에 있으면서 그 놈의 국수를 심심할때면 사먹곤 했다. 그 국수는 홍콩 이곳 저곳에 늘 있었기 때문에…

다시 출장을 와서 먹는 魚蛋粉에는 이제 예전의 서글픔이 많이 사라지긴 했어도, 간혹 여섯살 난 딸 아이의 시무룩한 모습과 아무 말 없던 아들 놈, 그리고 멍하게 나를 쳐다보던 아내의 모습이 기억난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목련
    국수 한그릇에 지난날의 회한이~~~ㅎㅎ
    제게도 노력하지 않고 안주하고 태만했던 지난날의 회한이 있습니다만,
    우리 여인님은 서러움 같은것도 초월하셨을것 같은데요.
    아! 저도 홍콩에 너무 가고싶오요!..별들이 소근되는 홍콩의 밤거리 나는야 꿈을꾸는 꽃파는 아가씨…라는 옛노래도 있던데요. 아직 홍콩에 계신듯 합니다.건강하게 잘지내시다 오세요.
    └ 여인
    금요일 늦게 돌아왔습니다. 아마 금요일 밤에 쓰다가 하도 피곤해서 자다보니 글이 꼭 홍콩에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네요.

    애린
    첫 부분을 읽을 땐 화양연화란 영화에서 양조위와 장만옥이 깡통그룻에 국수를 사먹는 장면이 떠올라서 잠시 로맨틱한 느낌에 사로잡혔는데 글을 읽어나가다 보니 착찹해집니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셨는데 형편이 어렵다가 풀렸다가 했거든요.
    맛있는 점심을 기대하고 아버지의 사무실을 찾았다가 라면을 사주시는 바람에 서운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땐 너무 어려서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질 못했어요.
    └ 여인
    저에겐 가족이나 제 삶의 애환이라든가 하는 것이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인식의 문제인지 아니면 지나온 세월이 정말 그랬는지 몰라도, 한번도 가난하다거나 어렵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형과 누나, 심지어는 동생은 우리가 몹시 가난하고 어려웠다고 생각하는 데, 저는 한번도 굶어본 적도, 월사금을 못낸 적도 없고, 단지 대학 등록금을 걱정하긴 했어도 그것은 교사인 아버지의 능력으로는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을 뿐 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조그만 가난과 어려움을 만났을 뿐, 남들과 같은 어려움과 부딪혀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때론 홍콩에서 그 어려웠던 시절이 때론 남들에게 대한 죄스런 마음의 보상이라고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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