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날에

비가 온다. 장마에 홍수가 없다는 데, 올해는 장마 끝에 홍수가 들어 영동에 도로가 끊어지고 마을이 토사에 유실되고, 사람들이 급류에 떠내려갔다고 한다. 그러더니 오늘 또 비가 내린다. 비는 아침부터 줄기차게 내린다. 중랑천이 범람하고 강변도로가 끊긴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허물어진 영동에 내리는 이 호우는 또 어떻게 하나?

내리는 비를 보자, 지난 날들에 보았던 비가 생각난다.

1. 블랙 레인

홍콩에서 비가 많이 올 것 같으면, 경보를 내린다. 블랙 레인의 경보를 발하면 아이들은 학교를 가지 않는다. 블랙 레인이 발령된 어느 날 아침, 북회귀선의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았다. 하늘이 칠흑처럼 컴컴해지고, 도로 위로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물을 시멘트 바닥에 쏟아내는 듯한 소리를 내며 비가 내렸다.

좁은 땅에 산이 높은 이 도시에 내리는 폭우는 순식간에 산등성이를 타고 떨어져 내리며 도로를 강으로 만들거나 저지대를 침범하기도 한다.

밑에서부터 불어올라 차오르는 물도 무섭거니와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물도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살던 홍콩섬의 아스팔트 위에 쏟아져 내리는 비는 그다지 무섭지는 않았다.

세상의 어디에서나 변두리와 외진 곳, 그리고 살아가기가 녹록치 않은 곳에 내리는 비가 사람을 울리는 것이다.

2. 청송에서 대구가는 길

그 해 여름휴가 때, 울릉도에서 폭우로 고립이 되어 사귀게 된 옆 방 사람들과 함께 사흘 만에 배를 타고 울릉도를 벗어나 보경사 계곡을 들르고 청송의 주왕산에서 비를 다시 만났을 때, 육지에서 내리는 비가 우리의 귀경길을 막을 수 있을까 했다.
대구로 가는 버스가 달기약수를 벗어나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버스는 강가를 따라 달렸는데, 내리는 비로 강물이 쑥쑥 불어 오르고 있었다. 비가 하도 와서 달리는 버스 창틈으로 빗물이 새어 들어와 버스의 움직임에 따라 물이 물결을 쳤다. 버스 바닥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였다.

새어들어 오는 빗물로 모든 자리가 흥건하게 젖었고 신발이 젖어 나는 엔진룸 바로 옆 앞창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포장이 안 된 도로의 귀퉁이가 빗물을 머금고 강으로 허물어져 내리기도 했다. 버스 기사는 깜짝 놀라 핸들을 우측으로 꺾어 타이어가 빠지는 것을 간신히 모면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을을 만났고 운전수는 길이 끊길 것을 감수하고 대구까지 갈 것인가 아니면 그 마을에서 비를 피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듯 했다.

한번 가보지 하고 운전수는 길을 달렸다. 도로 곳곳의 낮은 곳을 지날 때 버스 옆의 차문으로부터 흙탕물이 울컥 울컥 새어들어 왔다.

그러다가 도로가 깊이 침수된 곳을 만났다. 그 길을 자주 다녔던 기사는 버스를 세우고 물가에 서서 여기만 벗어나면 그 다음은 괜찮을 텐데…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던 그가 다시 운전석으로 올라와 “좀 도와주실래요?”라며 엔진룸을 열었다. 그러더니 엔진룸 속에 있는 검은 홈통을 라지에터로 쪽에서 뜯어내 “이것을 좀 높이 들어줘요. 거기에 물 들어가면 대구는 못갑니다.”

나는 그것을 높이 들었고, 기사는 몇 번인가 엔진을 부르릉 부르릉 공회전시킨 후, 깊은 웅덩이로 버스를 쳐박았다. 그러자 라지에터 옆으로 개울물처럼 흙탕물이 밀려들어왔고 버스 옆으로는 물보라가 일다가 잠잠해지더니 물속에서 다시 버스가 맞은 편 도로 위로 불쑥 솟아올랐다.

버스 기사는 소리쳤다. “이자 우리 대구로 가는 깁니더.”

그 후로도 버스는 몇 번인가 웅덩이를 만났지만,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그리고 빗줄기가 점차 긋기 시작했다.

영천 쯤 당도하자 아스팔트가 나왔고 날이 개었다. 그리고 늦은 하오의 하늘 위에서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기나긴 휴가도 끝났다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3. 남국에 내리던 밤비

열대 대류성 소나기인 스콜은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에 갑자기 내리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싸이판에서는 밤에만 비가 내렸다.

비행기가 랜딩한 11시, 공항청사를 벗어나자 남국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슬비가 그렇게 내리고 있어서 네온싸인도 젖어있었다. 우리는 비가 내리고 어두컴컴한 도로를 따라 하염없이 달려 어둔 밤을 밖에 세워둔 채 호텔방으로 들어가 습기를 지우기 위하여 에어컨을 열심히 틀고 잠에 들었다.

아침이 되자 간밤의 비는 언제 왔었냐고 창 밖에는 연록색의 바다가 푸른 하늘 밑에서 조용한 파도를 상아빛 모래사장에 하얀 포말을 펼치며 뿌리고 있었다.

그래 분명 남국의 해변이었다.

아침부터 습기에 휩싸여 있던 싸이판의 공기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후덥지근했다. 소금기까지 깃든 공기는 밤이 되어도 식을 줄 모르고 더 가속되더니 밤 10시가 넘자 밤하늘을 가득채운 별빛 밑으로 구름이 끼었다. 그리고 11시가 되자 비가 내렸다. 비는 하늘을 향하여 팔을 벌린 야자수 잎 위로 싸아하고 비가 내리는 소리를 냈지만, 빗줄기는 가늘고 안개 같았다.

비는 삼십분 쯤 내리고 그쳤고, 얼마지나지 않아 구름은 사라지고 다시 별이 하늘을 수놓았다. 그리고 공기는 한결 가볍고 선선해졌다.

그러한 밤비는 싸이판에 있을 동안 늘 그랬다.

4. 타이뻬이에서 조우한 그 비

대만의 연간 강우량은 5,600미리라고 한다. 그 정도의 강우량이라면 매일 비가 와야 했다. 그 해 여름 대만으로 갔을 때, 비는 오지 않았다, 단지 습기에 휩쌓여 이끼와 돌에 낀 철분이 까맣게 녹이 든 음습한 도시만 내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하루인가 이틀인가 지나고 서녕남로(西寧南路) 근처의 대만상무인서관(臺灣商務印書館)에서 책 몇권을 사서 나왔을 때, 그렇게 큰 비는 생애에 처음으로 만났다.

상무인서관의 낡은 문을 빠져 나왔을 때, 비가 조금 내렸고 나는 횡단보도를 지나 건너편 도로로 올라갔다. 나는 길을 건너서야 길에 차가 뜸하고 오토바이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주랑같이 만들어진 보도 위에서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 사이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 사이로 애써 흘러나오던 빛이 갑자기 사라지고 하늘 위로 새 한 마리도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이상한 정적이 어둠 아래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 정적은 너무도 강렬하여 주변의 사람들은 꼼짝도 않고 숨을 죽인 채 어둠이 깃들어 깜깜한 하늘을 올려다 보기만 했다.

무슨 소리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너무도 큰소리라서 그 소리를 정적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비가 내렸다. 그 비는 바가지로 퍼붓는다고 할 수 없었다. 하늘에서 폭포가 떨어지고 있었다. 빗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도로에 떨어져내린 빗물이 도보의 절반 쯤까지 차올랐다.

한십여분인가 비가 내리더니 하늘이 번쩍거렸다. 빗소리 때문인지 천둥소리조차 아득하게 들렸다. 몇 번인가 번개와 천둥이 지난 후 빗줄기가 잦아들고 그제서야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에서야 대만의 강우량이 5,600미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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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旅인

    목련
    제가 오늘,그러니까 어제 그렇더군요.
    친구가 점심먹으러 집으로 오라해서 친구집으로 향하는데 윈도우 브러쉬 를 아무리 빠른속도로 빗물을 쓸어내도 한치 앞이 안보이는 겁니다.
    앗차! 이러다 사고라도 불길한 예감이 까지…마음으로 비피해 입은분들이 힘을 낼수있기를…
    └ 여인
    비가 올 때는 앞이 보이질 않고, 백미러도 보이질 않아 운전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평소보다 갑절로 조심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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