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시여 vs 살로메

고3을 둔 집이라 거실의 TV를 남의 집에 보내놓고, 안방에서 아내가 보는 TV를 간혹 엿본다. 잠자리에 들려 하니 <하늘이시여>를 케이블 TV에서 재방하고 있다. 프로가 끝나자 다음 회의 예고편이 나온다. 거기에서 딸(슬아)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친다.

“그럼 나는 언니를 올케라고 해야 해? 언니라고 해야 해? 오빠를 형부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오빠라고 불러야 해? 또 조카는 나를 이모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아님, 고모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이것은 비극이라기보다 차라리 혼돈인 것이다. 변별적인 기의를 갖고 있던 언어들이 의미를 상실하며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언어질서 속에 서 있던 자신, 타인과의 명칭을 통하여 일정한 관계 속에서만 위치되어져 있던 <내>가, 혼잡한 혼인관계에 따라 타인들의 명칭이 균열되면서, 더 이상 올케, 언니, 오빠, 형부, 이모, 고모라는 일정한 행렬질서를 이룰 수 없는 <내>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경>이 출생의 비밀과 자신이 난혼이라는 쥐덫에 걸린 것을 알고 실어증에 빠진 것은 단순한 정신적인 외상보다, 언어들의 이러한 뒤얽힘 탓에, 언어의 공시적인 질서가 깨져 더 이상 사유와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이 드라마가 몹시 사악하다고 한다. 그런데 무엇이 사악하냐고 묻는다면 뚜렷히 말할 것은 없다. 이렇게 사악하다고 극단적인 언어로 말하는 것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행렬의 규칙을 이러한 혼인관계가 깨트려 버릴 것이란 불안감이 무의식 중에 시청자들의 뇌리 속에서 떠올랐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오이디푸스적인 비극을 <자경>의 엄마가 기획했다는 것에서 미증유의 결말을 기다리며, 우리는 조마조마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와의 근친혼에 대하여 비극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눈을 찔러버리던지 아니면 실어증으로 대답하는 비극의 주인공들은 차라리 건강한 것이다. 용서받지 못할 자는 자경의 엄마인 것이다.

그녀는 무지의 죄인 오이디푸스적인 것과 알고서도 죄를 저지른 살로메적인 것 중에서 살로메적인 것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살로메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 잠깐 나온다. 그리고 대부분의 살로메에 대한 이야기는 요세푸스의 사서나 전승과 날조된 이야기에 근거한다. 그 이야기는 사악한 만큼 흥미롭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흥미롭다는 점은 그녀가 팜므파탈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가공할 정도의 요부라는 점이며,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우리를 방황하게 만드는 것은 이천년 전의 일로써 실존성 자체부터가 아리송한 상태에서 그녀를 둘러싼 신약성서 속의 이야기와 전승들의 내용이 전율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가증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살로메라는 이름은 없고 그 어미인 헤로디아의 딸로 기록되어 있다.

살로메는 헤롯대왕의 손녀이자, 분봉왕 헤롯 안티바의 형(혹은 동생이라고도 함)인 빌립의 딸이다. 그녀의 어미는 헤로디아이다. 그 어미는 어찌된 일인지 남편인 빌립과 헤어져 살로메를 데리고 아주버니인 안티바와 함께 살게 된다. 그때 세례 요한이 이 일을 가지고 헤롯에게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하자, 수치심에 들뜬 헤로디아가 요한을 결박하여 옥에 가두고 요한을 죽일 것을 헤롯에게 요구한다. 헤롯 안티바는 유대의 민중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믿고 따르는 것을 알고 죽이기를 주저한다. 그 즈음에 헤롯이 생일을 맞이한다. 의붓딸 살로메는 잔칫상 앞에서 뇌쇄적인 춤을 춘다. 그때 살로메의 나이는 열다섯쯤 되었다. 헤롯은 침을 흘리며 그 춤을 본 후, 원하는 것이라면 왕국의 절반이라도 내어 줄 것이라고 한다. 그때 살로메는 어미의 지시에 따라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헤롯은 간악한 의붓딸의 요구에 놀라 부들부들 떨면서도 요한의 목을 살로메에게 주고, 살로메는 이를 헤로디아에게 건낸다.

그러나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에서는 옥에서도 의연한 세례 요한을 보자, 매료되어 살로메는 요한을 유혹한다. 그러나 요한은 음욕을 버리고 사람의 아들(예수)를 따르라고 한다. 그러나 요한의 육체에 사로잡힌 그녀는 요한에게 키스를 하려 한다. 요한이 끝내 그녀의 요구를 거절하자, 편집증적인 그녀는 의붓 아비의 연회석으로 올라가 일곱 베일의 춤을 춘다. 일곱 베일의 춤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차례차례 벗어 결국 완전히 나체가 되는 춤이다. 의붓딸의 관능적이고도 도발적인 춤에 정신을 잃은 헤롯의 품에 벌거벗은 몸으로 뛰어들면서 살로메는 나즈막한 소리로 “요한의 목을 제게 주세요”라고 속삭인다.

헤롯은 어린 의붓딸의 몸에서 풍겨오는 달큰한 체취에 얼떨떨해 하며 세례 요한의 머리를 살로메에게 가져다 준다. 살로메는 광기에 들뜬 입으로 피가 가득한 소반 위에 놓여진 세례 요한의 입술에 키스를 한다.

이 리하르트의 오페라는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동터오는 1905년에 초연이 되었고, 실질적으로 가수가 일곱 베일의 춤의 끝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육체를 드러내고, 목이 잘려져 피가 흐르는 세례 요한의 입에 키스를 하는 등 엽기적인 장면들로 관객들을 놀라게 하여 공연이 중단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엽기적이고도 파탈적인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보자.

성경에 나온 헤로디아의 딸이 살로메라는 것은 유대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한다. 요세푸스는 이 살로메가 후일 삼촌과 살을 섞고, 다시 의붓아비였던 헤롯 안티바의 부인이 된다고 한다. 이런 경우 헤로디아와 살로메의 관계는 어머니에서 동서로, 동서에서 다시 큰댁과 작은댁이 된다. 또 헤롯 안티바와의 관계는 삼촌에서 의붓아비, 그리고 시아주버니가 되더니 남편이 된다. 헤로디아와 헤롯 안티바의 관계는 시숙에서 남편이 되었다가 사위가 되는, 서로 난잡하여 무엇이 어떻게 되는 지를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 사악한 요녀가 오이디푸스처럼 절망의 끝에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었다는 그런 사실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도덕과 윤리를, 선이라고 불리우는 어떤 본체로부터 정언적 명법으로 다가오는 것이라고 늘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선과 윤리의 배후를 밝히는 학문, 메타윤리학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명료한 선과 악의 실체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선과 악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관계와 구조에 어떠한 작용을 하느냐에 달린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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