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Sex)에 대한 잡글들

오늘 축구가 끝난 뒤라는 글을 쓰고 난 후, 제목과 글의 주제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성(性)에 대하여 떠들었으면서도 주제의 중대성에 비추어 어떠한 결론도 스스로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성에 대한 단편적인 글들을 올려볼까 한다.

프레이저의 흥미롭기는 하지만 다 믿을 수는 없는 <황금의 가지>를 읽다보면, <싸이프러스의 아도니스>라는 장을 펼치게 된다. 거기에는 옛날에 싸이프러스에서는 모든 여자들이 결혼에 앞서 여신의 성소에 가서 몸을 맡기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관습은 중근동의 많은 지방에 보급되어 있었고 필자의 의견에 의하면 전혀 음탕한 유흥이 아니라 종교적 경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마치 자신이 그때 그 곳에서 살았던 것처럼 지껄이고 있다. 바빌론에서는 여자는 누구나 부자건 가난하건 평생의 한번은 밀리타의 신전에서, 아스타르테(동양의 아프로디테)의 신전에서 외래인에게 몸을 맡기고 성스러운 매음에 의하여 얻은 보수를 여신에게 바쳤다. 성역은 고객을 기다리는 여자들로 꽉차 있었다고 전해진다. (불사조가 있다고 전해지는 태양의 도시) 헬리오폴리스의 아스타르테 신전에서는 모든 처녀가 그 몸을 외래인에게 맡기는 관습이 있었으며, 아내도 같은 방법으로 여신에 대한 신앙심을 보여 주어야 했다고 쓰여 있다. 이러한 종교적인 매음은 아모리테, 비블루스, 아르메니아, 파포스 등 모든 방역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프레이저는 왜 이와같은 일들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파포스의 왕이자 아도니스의 아버지인 키니라스는 딸 뮤라와 근친상간을 통하여 아도니스를 낳았으며, 키니라스는 그 자신의 미모로 인하여 아프로디테에게 구애를 받았고 키나레스의 사위인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의 조상을 만들고 사랑에 빠졌다고 하며, 아프로디테는 그의 아들 큐피드와 장난을 치다 화살에 맞았는 데, 그때 아도니스를 보게 되어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근친상간은 물론 아버지와 아들, 사위와 처남이 아프로디테와 불순한 사각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이에 불쑥 이 종교적 매음의 관습이, 키니라스 왕에 의해서 제도화되어 그의 딸들, 그러니까 아도니스의 누이로서 아프로디테를 성나게 하고, 외래사람들과 교접을 한, 그리고 이집트에서 그 생애를 마친 여자들에 의하여 창시되었다고 한다 라고 뜬금없이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프레이저의 글이 아니라도 이집트와 바빌론의 사원에서 여사제의 주요한 임무는 매음이었고, 그들에게 매음이란 신에 대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다는 것을 뜻하였다.

이러한 종교적인 매음은 아도니스와 오시리스의 재생제의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 같으며, 밭을 갈아야(외래인에게의 매음) 씨를 뿌릴 수 있다(정혼자의 아이의 잉태)는, 그래서 곡물 신의 부활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 다산제의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인도에 가면 힌두 사원 까주라호(Kajuraho)가 있다. 신성한 사원의 바깥에는 온갖 자세로 성교를 벌이고 있는 미투나상들이 벽면을 부조로 가득 채우고 있다. 일대일의 성교는 물론, 난교를 벌이는 모양과 심지어는 수간에 이르기까지 온갖 자세의 성행위가 정교한 석공의 솜씨로 부조되어 있다.힌두 종교는 그 다양성으로 하나의 종교로 통합할 수는 없지만, 프로토 타입을 링가(남근)와 요니(여성의 성기)의 결합에 두고 있다. 불교의 대육자진언인 옴 마니 반메 훔(Om Mani Padme Hum의 Mani는 보석으로 남근, Padme는 연꽃으로 여성의 성기, Hum은 不二로 결합을 의미하며 모든 이원론적인 선과 악, 빛과 어둠이 결합하여 하나로 융통화해하는 단계를 말한다) 또한 링가와 요니라는 프로토 타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탄트라에서는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기본욕구임에도, 성욕에 대한 금제를 통하여 거대한 권력체계를 이루었고 사회가 발전했지만, 대신 인간은 자유를 잃었다고 한다. 따라서 성에 대한 해방이야말로 해탈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탄트라적 요소는 티벳 밀교에는 여성 호법신인 타키니를 탄생시킨다. 타키니는 남자 수행자와 육체적인 접촉을 통하여 수행자의 에너지를 일깨우고 우주와 합일하게 조력한다는 것이다.

이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까주라호의 미투나상의 의미는 “이 미투나상을 보고 더 이상 음욕이 일어나지 않는 자들이여, 이제 너의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신의 지성소에 들어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까주라호의 미투나상 앞에 서서 음욕이 일어나지 않는 자라면, 더 이상 신전 안에 들어갈 이유란 없다.

즉 꼴려야만 사람이지 아니라면 부처이거나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선민이라고 자랑하는 유태인의 종교가 다신교(엘로힘의 시대)에서 기원했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첫 번째 계명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에서 알 수 있다. 이 계명은 모세 이전에 무수한 신들이 가나안의 땅 위를 배회했다는 실마리를 역으로 제시하고 있는 중대한 구절이다. 이와 같이 성적으로 문란했다는 것이 일곱 번째 계명, “간음하지 마라”에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현재의 가치관의 기준으로 보면, 전역사적 단계에 늘 음란했다는 것이다.

타인과 성적 접촉을 갖는 것, 즉 간음에 대한 준엄한 계명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의 어머니인 사라가 비록 아브라함이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 하더라도 파라오와 동침을 하는 장면을 성경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야만의 상태에 있는 남미의 원주민들에게 고차 수학적인 결혼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혼인의 관계의 연구를 통하여 친족체계의 질서를 알게 되었다. 친족체계는 엄밀하게 성과 먹을 것의 결합관계에 기초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까 혼인은 자손번식의 성욕과 생존을 위한 식욕(부족간의 먹을 것의 교환)의 절묘한 결합이며, 이 질서가 깨어질 경우 종족의 멸절이라는 위기가 온다는 것을 현명한 열대의 주민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족의 멸망은 부족간의 교환이 없는 부족내 혼인에 의하며, 이 족내혼을 금지하기 위하여 근친상간을 살인보다 더 큰 죄로 인간들은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레비스트로스의 연구성과를 역으로 뒤집어보면, 현대에서 성욕이란 더 이상 자손번식을 위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하지 않으며, 식욕이란 더 이상 생존의 수단이 아니다. 단지 쾌락으로 독립한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혼인과 가족관계, 친족의 결합은 느슨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언어가 없는 인간이 세계와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은 어떤 것일까? 모든 감각은 섬광처럼 선명하고 일회적이며 감각의 순간이 끝나면 감각은 상상의 세계 속으로 가라앉고 더 이상 기억으로 퍼올려질 것이 없다. 거기에는 타자로서의 <내>가 없고 단지 이드의 집요한 갈망만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졌기에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라캉(J.Lacan)은 말한다.

팔루스란 남근, 라캉의 언어를 따른다면 갓난아이들은 자신을 남근이 부재한 어머니의 남근이라고 인식한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 혹은 거대한 타자가 나타나 더 이상 아이에게 너는 어머니의 남근이 아니라고 소리친다. 네가 계속 어머니의 남근이라고 생각하겠다면 거세를 해버리겠다는 위협 속에서 결국 어머니의 남근이기를 포기하고 사회 속에 편입하면서 타자에 대한 나를 서서히 인식하며 언어의 세계 속으로 진입한다는 것이다.

성적인 존재로써 팔루스는 사회적인 율법 아래서 인간으로 현현하는 것이다.

그 이후 상상계에 머물던 팔루스는 고통스러운 상징계에 들어서게 되고 언어를 통하여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라캉에 따르면 언어란 금지된 성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렇다면 성이 완벽하게 자유롭게 되었을 때,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글들은 성에 대하여 어떠한 결론도 주지 못한다. 단지 성이 인간에게 어떤 무게로 자리잡고 있는 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다. 고대의 신전에서 여성이 자신의 성을 신에게 바치는 행위는 지금은 음란해 보일지 몰라도 당시에는 몹시 종교적인 경건성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며, 성서의 음란성은 단지 성서의 기자의 계명에 입각한 비평이 있기에 음란할 뿐이지 그 시대에는 그에 타당한 논리가 있었던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성이란 성 그 자체 뿐 아니라 먹을 것마저도 담보하는 수단으로 생존의 수단이다. 또한 라캉의 분석에 따르면 비록 그 분석이 프로이트적이긴 하여도 성에 대한 억압이 인간을 인간으로 자리잡게 했다는 점, 성에 대한 금제를 통하여 사회질서에 편입되면서 인간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들은 성이 얼마나 무겁고 심대한 것인가를 적시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시대에 과잉된 성을 어떤 방식으로 수렴하고 그 물길을 돌려야 인류와 우리 세대가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지를, 어렴풋이 이 글들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