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시절 -17

통속적인 세상에 살고 있고, 그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했음에도 나에게 여자란 늘 신비로웠다.

자신의 형이 밤이면 구루마를 끌고 도시의 한 모퉁이로 나가, 카아바이트 등을 켜고, 빨간 책과 포르노 잡지를 팔았다는, 중학교 때의 친구가 있었다. 놈은 매일 나의 도시락 반찬을 빼앗아 먹고 수업시간에 모르는 것을 나에게 묻곤 했음에도 가난 때문에 나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어느 날 놈은 싫다는 나를, 형과 자신이 사는 단칸방으로 끌고 갔고, 먼지가 소복한 다락으로 나를 이끌어 형이 팔다 남겨두었던 포르노 잡지 한권을 꺼내 자랑스럽게 나에게 펴 보라고 했다.

“이건 말이야… 내가 형 몰래 쌔벼둔 것이거든. 전에는 몇권 더 있었는 데, 동네 형들 보여주었다가 빼앗겼어.”

한낮의 열기에 쥐똥냄새로 머리가 어지러운 다락의 어둠 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잡지를 펴서 통풍구의 격자 사이로 노란 줄무늬로 스미는 햇빛에 벌거벗은 여인의 나체 조각들을 맞추어 보았다. 그러다가 어디에선가 본적이 있는 것 같은 아련한 눈동자를 지닌 여인을 보았다. 그토록 아리따운 여자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가슴과 자신의 모든 치부를 드러내 보이며, 또렷한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사진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막연했기에, 풍만한 육체보다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말려들고 있었다.

“끝내주지? 이 양갈보들 봐. 가슴하고 거기 말이야… 증말 끝내주지?” 하고 소근대는 친구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 사진에서 끝내주는 것을 찾지 못했다. 끝내주는 사진이 많다는 친구의 말에 건성건성 잡지의 페이지를 넘기기는 했지만, 나의 시선은 다시 그 여인의 사진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친구 놈은 몇번이나 다시 돌아와 그 사진에 머무는 나를 의식하고, 사진이 찢어지지 않도록 스테이플러가 찍힌 자리를 조심스럽게 뜯어내 나에게 주면서 “이건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라고 한 후 그 잡지를 다시 어디엔가 숨겼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 잡지사진을 접어 책갈피 사이에 숨겨놓았다. 간혹 집에 아무도 없으면 접힌 자국이 하얗게 일어나는 그 사진을 꺼내 들여다 보곤 했다. 사진을 들여다 보면 아리따운 젊은 여인의 육체가 발산하는 아스스한 고혹 속으로 말려들면서도, 무망하고도 또렷한 그녀의 시선에 부딪히면 그녀가 애틋하여 다시 종이를 접어 책갈피에 갈무리하곤 했다.

무엇이 천사처럼 아름다운 여자로 하여금 옷을 벗고 수많은 남자들에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게 했을까? 그런데 이 아름다운 몸이 과연 수치스러운 것일까? 나는 그따위 생각을 하곤 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육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치부가 온 세상의 사람들에게 열려있고, 온갖 잡놈들이 침을 흘리며 그녀의 사진을 바라본다는 것이 억울했고, 그녀를 발가벗기고 사진을 찍는 못된 사람들과 사악한 세상이 저주스러웠던 것 같다.

그래서 중학교 시절 책갈피 속에 끼어져 있던 그 사진은 여자란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는 가르쳐 주었다기 보다 육신의 찬란함으로 하여 여자를 오히려 더 신비롭게 만들었을 뿐이다. 어린 중학생이 바라보기에 성숙된 여인의 까무러치게 완벽한 육신과 신비에 휩싸인 얼굴과 눈동자는 오히려 신성에 맞닿아 있다는 느낌마저도 들었다.

사랑이 정신적인 것이라고 아무리 씨부려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 정신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우선 얼굴과 육신에 매료되어야 하는 것이다. 꼴리지 않는데 무슨 연인이며 사랑이란 말인가?

선생들은 자신들의 연애질은 사랑이라고 했고, 우리의 사랑은 연애질이라고 했다.

연애질은 공부를 해야 하는 학생들의 머리 속에 쓸데없는 것들을 꽉 채워놀 뿐 아니라 거울이나 보게 하고, 구렛나루를 기르고 바지에 줄을 세우는 데 시간을 소모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연애질이 그렇게 쓸데 없다면, 차라리 우리는 신부가 되던지 아니면 중이 되는 것이 옳았다.

우리는 천상의 존재이거나 그에 복종하는 자들이 아니라, 아쉽게도 지상의 먼지 속에 뒹굴어야 하는 오팔년 개털들, 하찮은 고삘이들이었고, 때는 방초가 우거지고 작열하는 청춘의 태양 아래 고추가 여무는 계절이었다.

그러니까 나처럼 연애질 못하는 것이 등신이지, 연애질 하는 것은 아무런 잘못이 아니었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다리우스 09.05.20. 11:40
    온갖 잡놈들이 침을 흘리며 그녀의 사진을 바라본다는 것이 억울했고, 그녀를 발가벗기고 사진을 찍는 못된 사람들과 사악한 세상이 저주스러웠던 것 같다.ㅜㅜ 처절히 동감합니다. 명문장임.^^; 아, 착하고 순수한 그녀 어쩔수 없이 못된 남자들 때문에 세상에 치부를 드러냐만 했던 공양미 삼백석의 헉 이건 아니구나, 그 희생양인 청아한 베아뜨리체는 어디로 갔을까? 흑~과거 순수했던 소년의 눈에 비친 그 아름다운 이상적 여인에 우린 도달할 수 있을까…종말이 오기전에,,,이 부분을 문장화하려다 저도 실패했던 터라,,,전 그걸 여성 내면의 성자, 성프란시스코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심리적으론 고난받는 예수상과 겹쳐있음. 물론 섹
    ┗ 다리우스 09.05.20. 11:40
    슈얼리티가 다르지만요…

    다리우스 09.05.20. 11:45
    그러니까 말이 좀 그렇지만 정신분석학적으로 性적인 예수? 고대 신화 내부에는 어쩌면, 메저키스트와 사디스트적인 면들 조차 혼용되어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 旅인 09.05.20. 16:49
    최초의 인간, 아담 카드몬의 경우 양성구유의 존재였으며, 그 자신이 바로 생명의 나무, 아인소프 즉 이온 소피아였다고 하지요. 아마 종교에서 추구하는 엑스타시는 성적 합일의 오르가슴과 상통하며 이런 점에서 옴 마니 반메훔(연꼿 속의 보석: 성적 결합)과도 통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메저키스트(피학성 음란증) + 사디스트(가학성 음란증) = 자학성 음란증(영어는 모름)

    삭제된 댓글 입니다.
    ┗ 다리우스 09.05.20. 19:05
    톨스토이가 그래서 천재인건가요?
    ┗ 旅인 09.05.21. 13:48
    톨스토이의 책은 단 한권도 읽어보지 못했으니…

    산골아이 09.05.20. 17:13
    예나 지금이나 상업적인 목적으로 여자의 발가벗겨진 육체를 이용하는 건 여전하지요.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진정한 아름다움은 정신에 있건만….. 쩝….
    ┗ 旅인 09.05.21. 13:48
    남자들의 관음증도 여전합니다. 부끄~

    샤 론 09.05.21. 10:36
    역시 잘 읽었습니다.여인님..행복한 하루 되십시요…^^
    ┗ 旅인 09.05.21. 13:49
    계속 정진하겠습니다.

    유리알 유희 09.05.26. 23:17
    생명연습, 김승옥의 소설이 불현듯 스칩니다. 춘화의 존재를 저는 모르고 자랐으니 남과 여는 많이 다른가 합니다. 그 시절엔 연애하다가 들키면 바로 정학감이었지요. 허허. 남학생과 편지를 주고 받은 걸 숨겨야 하고, 더 나아가 죄의식을 느끼게 만들기까지 했던 시절. 다시 돌아간다면 멋진 연애를 하련만…….
    ┗ 旅인 09.05.26. 13:00
    남자들은 보는 것에 대하여 여성보다 더 센세티브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관음증에서 자유롭진 못한가 봅니다.**! 유희님의 학교에서도 그랬습니까? 저는 저희 학교만의 특수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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