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시절 -16

도시에 사는 58년 개털들의 고등학교 시절은 동네의 봉순이와 덕팔이가 코 찔찔 아랫도리를 내놓고 물놀이 하다가 어느 날 뽕밭이나 방아간에서 얼레리 꼴레리의 교제란 없었다. 지금은 흔한 남녀공학은 한번 다녀보는 것이 꿈이었고 여자 손을 꼭 잡으면 터지는 줄 알았다.

남녀학교가 엄연히 갈라져 있고,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일렬종대로 골목길을 가운데 두고 등교와 하교를 하며 친구들과 “제 엉덩이 봐라 탱탱하구먼.”하고 낑얼대는 것이 다였다.

그러니까 젊은 고삘이들이 연애질을 한다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었다.

변두리의 우리 학교 주변에는 형편없는 여학교가 하나 있어서 그 학교 학생과 사귈라치면 “쪽 팔리게 그 년들이랑 사귀냐?”며 꼴같지도 않은 놈들의 태클이 들어오곤 했다. 게다가 한번은 멍청한 녀석이 그 여학교 학생에게 한번 히야까시를 했다가 길거리에서 그 여학생에게 맞아 교복이 찢어지고 쌍코피를 흘리는 봉변을 당한 후, 잘 해봐야 본전도 못 건진다고 그 여학교 골목 근처에는 얼씬도 않았다. 차라리 그 학교 애들이랑 사귀느니 말죽거리 쪽의 어디 애들이랑 사귀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최소한 그애들은 가슴도 봉긋하고 다리는 쫙 빠져 여자같기는 하다는 것이 뒷줄 놈들의 평이었다.

까짓 여자 하나 사귀자면, 예나 지금이나 주일을 희생하고 교회를 나가면 된다. 나의 육촌은 명백한 음치인 데, 성가대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음험한 놈은 분명 당시 말로 ‘깔치’ 하나 사귀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놈이 너처럼 귀여운 여자친구를 하나 소개시켜줄 테니까, 모월 모시에 교회로 나오라고 했다.

피상적인 짜식이 나에게 귀엽다고 말한 것은 기분 나빴지만, 행님을 위하여 여자를 소개시켜준다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 그만 금쪽 같은 일요일 오후를 포기하고, 아주 어린 시절 다녔던 새문안 교회로 들어섰고, 교회 안마당을 서성이는 여고생들을 보면서, 그동안 열씨미 다녔다면 저 애들 손목 정도는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했다.

어깨를 움추리고 조용히 예배당에 들어섰다. 예배가 끝나 자리는 텅비어 있었기에, 자리에 앉아 버릇처럼 기도를 드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문득 내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알았다. 놈이 여자를 소개시켜준다면 예배당이 아니라, 예배당 옆 골목에 있는 빵집, <풍미당>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때에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까운을 입고 성가대에서 노래를 연습하고 있는 놈을 향하여 손을 흔들고, 예배당을 나와 버렸다.

한동안 교회 안 마당을 서성이다가, 갈 때도 마땅치 않아 사직공원 쪽에 있던 놈의 집으로 가서 책을 읽던지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교회 정문을 벗어날 즈음에 놈이 헐레벌떡 뛰어왔고, 나는

“이번 주가 전도 주간이냐? 짜식이 아쌀하게 한두번만 나와 달라고 하지 왠 사기냐?”
“아니야, 전도주일 아닌데.”
“그런데 뭣 때문에 빵집도 아니고 예배당으로 날 불렀냐?”
“여자 애가 얼굴이나 한번 보고 나서 사귀던지 말던지 하겠다고 해서…”

나는 얼굴을 팔기 위해 나왔다는 것에, 이런 비러머글 일이 또 있을까 하고 흥분을 했다.

“뭐 이 쌍~, 지 눈깔만 눈깔이고 내 눈깔은 알사탕이냐? 집어치워~, 아주 날 선을 보여라. 그런 식으로 여자애 사귈 맘 없다. 나 간다.”

보무도 당당하게 나는 교회를 떠났고, 놈은 더 이상 잡지도 않았다.

오늘은 엿 같은 주일날이다 하며, 날라간 두장의 회수권과 이미 팔릴대로 팔린 쪽이며 하고 방바닥을 뒹굴면서 저녁 밥을 기다리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야, 그애가 너하고 나하고 마당에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본 모양인 데, 니 이야기를 자꾸 묻고 하는 걸 보니까 마음에 든 모양이던데… 어떡할래?”
“미친 년놈들, 쌍으로들 지랄 육갑들 하고 있네. 아주 쌍으로 맞아 떨어지는 데, 니들 둘이서 지랄하면서 잘 놀아 보도록 해. 이 형님은 딴 교회 <청년부>나 나가서 예쁜 아가씨 골라 잘 사귀어 볼란다.”

그 말이 씨가 되었는 지 얼마 후 놈은 그 아가씨와 사귀게 되었고, 나는 위대하신 고삘이가 미쳤다고 금쪽 같은 일요일 날 교회를 나가냐 하며, 애인 하나 없이 고삼까지 수절했던 것이다.

“야, 어떻게 하다보니 너에게 소개시켜 준다던 애와 사귀게 되었는 데, 속으로 너한테 여간 미안한 게 아니야.”하고 어느 날 말했다.
“병신 넌 그것도 모르냐? 그애는 애당초 나한테는 관심이 없었고, 너하고 한번 사귀고 싶었는 데 말붙어 볼 건덕지가 없어서 너한테 남자 친구 하나 소개시켜 달라고 그런거야. 그러니까 날 고 얍상한 간나가 하나의 희생양으로 쓸 생각이었던 것이지.”
“넌 여자 한번 만나 본 적도 없는 녀석이 어떻게 그리 잘 아냐?”
“임마 척하면 삼천리라구. 학교에선 다들 날 보고 도사님 혹은 싸부라고 불러.”
“아쭈구리”
“아쭈라고? 내가 너한테 틀린 말했냐? 척하면 다 아는 법이야. 그리고 너같이 칠칠한 놈에겐 쫄쫄 따라다니는 애들이 딱이야. 피상적으로 얼굴 만 볼 것이 아니라, 여자의 맘을 보아야 하나니라.”
“그런데 말이야. 나도 이해가 잘 안가는게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 애가 무지 예쁘게 생겼다는 거지.”

지금도 이해가 안되는 것은 그 애는 하이틴 잡지의 표지모델로 나온 적이 있다. 광화문통을 지나는 고삘이들이 다 침을 질질 흘릴 아리따운 처자가, 느끼하게 생긴(구준표보다 더 느끼) 써글 놈이 얼마나 좋았으면, 그렇잖아도 외로움에 잠못드는 가련한 나를, 희생양으로 삶아먹을 생각을 했느냐이다.

후일 써글 놈은 네 놈 형수될 사람이라며 그녀를 소개시켜주었고, 풍미당에서 팥빙수 값을 그녀가 낸 관계로 둘이 평생의 반려자가 될 수 있도록 이모님을 설득하는 등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모님은 고년 탓에 자식이 공부도 안하고 잘못되었다며 길길이 날뛰었고, 둘은 몰래 몰래 십 년을 만났으나,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다리우스 09.05.19. 13:39
    아니 여학교가 어쨌길래 남학생이 한번 히야까시했다고 바로 쌍코피를,,,말죽거리 통치마 은광여고를 능가하는 학교였군요 ㅋㅋㅋ 저희도 무서워서 그쪽으론 잘 안다녔던 기억이,,, 흑~
    ┗ 旅인 09.05.19. 15:05
    척하니까 은광여고가 나오네요, 말죽거리의 은광여고 고적대는 당시에는 선망의 대상이었죠. 그런데 이쪽 변두리에 소리 소문없이 살벌한 여학교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한가인이 다니던 학교가 은광여고라는 소문이 있던데…^^
    ┗ 다리우스 09.05.19. 22:02
    네, 그리고 남자 주인공들이 다니던 학교 교련 선생이 꼭 말죽거리 상문고교 그 사람 같다는 소문도,,,ㅜㅜ참고로 상문 고교 교장이 사단장 출신이었음.ㅜ 교내 운동장 주변엔 철조망이 쳐있었고요.

    샤 론 09.05.19. 20:24
    여인님도 저렇게 거친 말 쓰셨어요?..우리 반 친구들도 많이 그랬는데 …전 그게 영 적응 안되서 힘들었어요…
    ┗ 旅인 09.05.20. 10:30
    물론 도덕적인 요구가 있겠으나, 그 사회, 그 시대가 요구하는 언어가 있고, 그 언어를 쓸 때 그들과 섞이며 한 세대를 형성한다는 측면에서 저도 엄밀히 그 세대입니다. 하지만 저 정도는 약과였고요. 전 참한 학생이었습니다.
    ┗ 샤 론 09.05.20. 12:28
    ㅎㅎㅎ..참한 학생이란 말이 믿기지 않아요..언어구사를 보면..ㅎㅎㅎ

    이슬 09.05.19. 21:36
    전 고등까지 미팅 글구 남자를 사귄다는 건 꿈도 꾸지 않고 살았는디.. 여인님은 참 성숙하셨네요.ㅎㅎㅎ(글 잼나게 읽었어요~^^)
    ┗ 旅인 09.05.20. 10:31
    게으른지 용기가 없는지 아니면 생각이 남달랐는지 저도 여자 하나 사귀지 못하고 수절했다니깐요! ^^
    ┗ 이슬 09.05.20. 15:46
    ㅎㅎㅎ

    산골아이 09.05.20. 00:16
    구준표보다 더 느끼하게 생긴 남자들을 좋아하는 여자들도 많아요, 여인님.
    ┗ 旅인 09.05.20. 10:34
    제가 알기로는 느끼하게 생긴 남자보다 아무래도 느끼한 남자를 더 좋아하는 것이 아닌지 모릅니다. 여자분들도 같은 여자분을 느끼하게 느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놈은 지금 <내조의 여왕>에 나오는 오지호 비스무리하게 생겼습니다.
    ┗ 산골아이 09.05.20. 11:16
    요즘 젊은남자들은 참 느끼하게 생긴 애들이 많더라구요. 약간 중성화되었나고나 할까! 동성의 입장에서도 느끼하게 느껴지는 여자들이 종종 있어요. 그런데 생긴 게 느끼한 것에 어울리면 그런대로 봐주겠는데 생긴 거와 영 딴판으로 여자가 느끼하게 굴면 정말 못 봐주겠더라구요.

    유리알 유희 09.05.25. 23:33
    마구 찔립니다. 어쩌면! 이렇게 같을 수가… 저도 새문안 교회를 두번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언제적인지 가물가물하네요. ㅎㅎ 하지만 저는 남자 사귀러 간 건 절대 아니랍니다. 다만 양평동 무슨 교회에 k 고생이 한명 있다고 주인집 현숙이가 교회 같이 가자고 해서 한번 따라간 기억이… 그런데 그날 그 남학생은 결석이더군요. 재미있슴다. 여인님!
    ┗ 旅인 09.05.26. 13:01
    저는 국민학교 때에 새문안 교회를 다니다가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로 옮겼죠. 그때만 해도 열심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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