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시절 -12

그 후 없는 신을 찾아냈다는 것 자체 만으로도 놈들은 나를 대단하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맞았다고 확신을 못했고 세상의 신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가 기독교인에서 이교도로 변모되기 시작한 단초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피타고라스의 정리 등에서 피타고라스를 한 사람이라고 이해하고 있을 당시, 그것은 오르페우스 종파의 한 지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르페우스는 농경문화 속에서 찢기어 죽고 다시 재생하는 부활의 신화는 책력(달력)이 없는 고대의 민간인이 농사를 위해서는 필수적이며, 이러한 고대의 신화 체계는 이집트의 오시리스의 신화 속에 또한 나타나 나일의 범람주기를 예고하는 것을 알았다. 결국 유목민의 신 야훼를 맞이한 유태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농경시대로 접어들었을 때, 야훼의 신화는 농사에 맞지 않았다. 구약에 기록된 여호와에 대한 끊임없는 배신은 결국 농경신인 바알을 믿어야 그 신화체계 속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의 반증이며, 구약에 기록된 무수한 흉작 또한 그들이 여호와를 저버린 것 때문이 아닌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어울리지 않는 신을 믿음으로써 발생된 역사적인 사실일 수 밖에 없음을 알았다.

어느 골목에서 읽은 책에서는 여호와의 진짜 이름은 <샘 함페보라쉬 Shem Hamephorash>라고 한다. 그 뜻은 <지존한 이름>이라는 히브리어로 고위직의 사제들만이 부를 수 있는 그러한 것이었다. 모세가 호렙에 이르러 불에 타지 않은 떨기나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묻되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까?” 하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얼버무린다. 그러니까 모세도 하나님의 이름을 모른다. 단지 어디에서 나타났는 지 모르나 테트라그라마톤(네 글자)인 <JHVH/YHWH>가 주어졌으며, 거기에 모음을 붙여 유대인들은 야훼(Jahveh/Yahweh) 또는 여호와(Jehovah/Yehowah)라고 불렀을 뿐이다. 이 <네 글자>로 부터 신의 무수한 명칭들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어느 이름도 신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주1)

신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신을 알게 됨으로부터 나오는 엄청난 공포와 불행 또는 저주로 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임을, 불교에서 조차 진리를 안 자는 결국 죽음(자아의 사멸: 주2)을 당한다는 사실에서 나는 알 수 있었다.

하여튼 아프락사스는 없었고, 나는 그 건으로 해서 놈들의 문학 토론장의 중추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리고 놈들이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형편없는 것이었다. 어떤 소설을 읽으면 줄거리 만 이야기하면 문학이 끝나는 그런 것이었다. 나도 그렇지만 우리의 골통 수준에서 정신적 교감이나 영혼 어쩌고 저쩌고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골이 텅비어 있었다. 그래서 아무런 비판이나 분석없이 모든 것을 머리 속에 집어넣었고 머리 속에 들어간 것들은 오묘한 화학반응을 통하여 뭔가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막연함 만을 간직할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비밀처럼 까뮈를 읽고 있었고 그의 ‘적지와 왕국’은 나를 머나먼 곳으로 흘려 보내고 있었다. 읽으면서도 나는 그가 무엇을 썼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 행이 지나가면 곧 한 행을 잊어버리고 다음 행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매료되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문학이라는 것에 매혹을 느끼기 시작했다. 문학은 재미있는 이야기나 수사학적인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열고 그 살 냄새를 맡고, 절망의 끝으로 가서, 인간의 실체를 만나는 것임을 알았다. 그럼으로써 인간과 해후를 하고 자신의 정직한 실존으로 향하여 항해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성스러운 행위이고, 그 행위의 끝에 인간이라는 동물이 무의미하고 더럽고 치사하고 음울하고 지상에 존재해서는 안될 그 무엇이라도, 그 비밀을 알고 그것에 솔직할 수 만 있다면, 생-자체가 위대할 수 있다는 시지프스의 신화가 인간인 것이다.

나는 터질듯한 가슴을 안고 학교의 옥상으로 올라가거나 절두산의 언덕으로 올라가 강물을 보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고 세상의 모든 진리와 아름다움은 거기에 명백하게 있음에도 나의 인식 상의 능력이 모자라 흡수할 수가 없기에 찬란한 노을 빛의 위안을 받거나 산보를 하면서 가슴을 식히곤 했다.


주1) 히브리 구약성서에 기록된 이 네 개 자음의 낱말 YHWH의 정확한 발음은 알려져 있지 않다. BC 3세기 이후 유대인들은 이 낱말 YHWH를 발음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 이름이 거룩한 지존자의 칭호이므로 함부로 발언할 수 없도록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신(神)의 보편적 주권을 강조하는 속성 명사 ‘엘로힘(Elohim)’이 사용되었다.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Septua Ginta)은 이를 ‘퀴리오스(Kyrios: 주)’로 옮겼다. 유대인들은 이 낱말을 예배용어인 ‘아도나이(Adonai: 나의 주)’로 읽었는데 그 모음 a-o-ai를 YHWH라는 자음에 그대로 연결해 읽을 경우 Yehowah(여호와/예호바)등으로 엉뚱하게 발음될 수 있다.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여호와’라는 발음보다 야훼가 훨씬 더 원 발음에 가까울 것이라고 추론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이름을 그들의 신론(神論)의 기초로 삼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재케 하는 자’가 이 이름의 가장 정확한 의미라고 학자들은 믿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짤라왔음)

주2) 어제 라캉(J.Lacan)을 다시 정리하면서 기표와 기의 사이의 막힘이 풀려버렸을 때, 그래서 기호(언어)가 사라져 버린 사태가 도래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생각했다. 타인의 입벌림으로 형성된 <나>가 붕괴되어버리고, 순간순간의 사태가 명멸하는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무의식이 현현하는 광란의 축제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그 광란의 주체는 수 많은 <이드>들일 것이다. 이것이 지옥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광인의 눈과 동물의 눈이 동일한 형태의 빛을 띄고 있는 것은 언어를 억압하는 상징계의 질서가 무너져 있다는 것이 아닌지? 그렇다면 자아의 사멸이라는 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이드>마저 사라져 버린 것인가?

This Post Has 3 Comments

  1. lamp; 은

    히브리어에 모음이 없기 때문에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고 봐야할까요? 한때 모음이 없이 어떻게 소리가 날까? 했었는데 잊어버렸던 궁금증 재발. ㅋ

    섣불리 말하기 힘들지만 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이드의 사라짐이 아니라 지극히 온전한 이드이지 싶어요.
    드러냄은 불균형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드러냄이 타인의 시선을 자극하고 그 자극은 그 타인의 입벌림 혹은 시선이 다시 나를 정의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타인이 보는 것은 전부가 아니라 단지 불균형일 뿐이죠. 그리고 학습 혹은 습관을 통해 자신을 알 수 있는 방법이란 오직 타인의 시선과 입놀림으로 인지하는 것뿐이니 결국 이는 악순환의 연속이 되어버리는 반면, 절대적 균형의 상태에 이르면 드러나지 않기때문에 이러한 되돌이표를 반복하지 않고도 스스로를 알고 깨닫게 되고, 이러한 깨달음의 수행이 쌓이면 고도의 안정된 상태가 될것 같아요. 이를 온전한 이드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요?

    1. 旅인

      모음은 통상 셈어계가 그렇듯 a e i 정도가 있는 것 같으며, 고대에는 자음의 위치에 따라, 자음의 성격에 따라 모음이 배속되거나 유추해서 발음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태인들이 세계 각처로 흩어지게 된 디아스포라 이후, 히브리어를 쓰지 않게 되자(사실 예수 당시에도 히브리어를 쓰는 사람은 제한적이었고 아람어를 쓰거나 헬라어를 썼음) 마조라 학자들에 의하여 모음기호가 개발되었고, 자음에 방점 형태로 붙여썼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즘도 공식적인 문서에는 모음기호는 표기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YHWH의 모음에 대한 음가는 유추해낼 수 없나 봅니다.

      추가적인 내용은 http://yeeryu.com/246 에…

      불교의 깨달음과 id의 관계는 좀더 생각해보아야 겠네요.

      하지만 제 <무너진 도서관>이란 포스트에 제가 꿈에 본 16자의 글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 그 글자가 은님의 질문에 꿈같은 대답이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사이코 심리학자의 학술에 대해선 꿈이 잘 어울릴 것 같으니, http://yeeryu.com/245

  2. 旅인

    샤 론 09.05.17. 21:29
    고교시절에 이런 생각들을 하신 겁니까 정말 ?…에구 난 갓난아기같아요..여인님의 비하면 …
    ┗ 旅인 09.05.17. 21:59
    아닙니다. 후일에 알게 된 것과 당시에 알고 있던 것이 이 글에는 섞여 있습니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오르페우스 종파라는 것과 농경신화는 대학교 때, 샘 함페보라쉬나 테트라그라마톤과 같은 것은 몇년전에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간신히 아프락사스나 알고 카뮈의 책이나 읽었죠.
    ┗ 샤 론 09.05.17. 22:10
    진즉 말씀하시지…놀랬잖아요..그래도 엄청 놀라운것은 사실이예요..여인님은 집안일은 안하셨나봐요?책 읽을 시간이 그리 많았던것을 보면…전 그 때 ..동물 키우느라 여념이.ㅎㅎ
    ┗ 旅인 09.05.18. 00:28
    서울에서 살았고 아버지가 선생이셨기에 일같은 것을 할 기회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서나 학교에서 배우는 學은 있어도 몸으로 익히고 체득하는 習은 약합니다. 이것이 도시에서 자란 사람의 문제입니다.
    ┗ 샤 론 09.05.19. 08:59
    머리가 무거우셨을 듯 합니다..ㅎㅎ너무 많이 저장하셔서..ㅋㅋ..전 주로 불을 때면서 책을 읽었고 겨울이면 시골 사람들 놀이감인 화투치면서 책을 읽었고 …ㅎㅎ ..불 때며 책읽다가 월남치마 앞자락을 태워먹고 놀랬던 일이 생각납니다..불 때면서 책읽는 게 좋았거든요..자주 그렇게…ㅎㅎ
    ┗ 샤 론 09.05.19. 08:52
    저는 좀 궁금했읍니다..카페 계신 분들이 음악도 미술도 글에도 모두 조예가 깊은 것에 대해..그런데 생각해보니 계속 자연스럽게 접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전 음악 들을 기회도 없었거든요..그러니까 좋아하지 않는 줄 알고 컸지요….글 속에 드러난 여러분들의 이야기가 참 흥미롭고 그렇습니다..
    ┗ 旅인 09.05.19. 09:49
    전 머리에 저장하는 것보다 연결을 하는 식으로 외웁니다. 지식을 연결해놓으면 잘 잊어바리지 못합니다. 반면에 전화번호, 숫자 그런 것은 죽어도 못외웁니다. 우리 집 전화번호도 외우지 못합니다.(딸랑 제 핸폰 번호만 욉니다) 학교 다닐 때는 음악의 제목 외우고 그랬는데 요즘은 듣기 좋은 것만 듣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음악이란 대부분 고전주의 음악(베토벤, 모짜르트 …등)인데 크면서 왜 그따위로 재미없는 음악을 가르쳐 주었을까 이해가 안됩니다. 19세기 후반의 음악이나 오페라같은 것을 들려주었다면 학생들이 음악시간을 몹시 좋아했을텐데 말입니다.

    산골아이 09.05.19. 23:16
    헉, 고교시절에 까뮈를…. 쥐구멍 뚫는 소리….. 개구멍 뚫는 소리…. 가 들리지요.
    ┗ 旅인 09.05.20. 10:20
    까뮈의 적지와 왕국은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했습니다. 하지만 늘 뭘 읽었지? 하는 의문만… 최근에는 결혼, 여름이라는 아주 젊은 까뮈가 쓴 수필집을 구했는데, 저는 젊은 성경이라고 부릅니다.

    라비에벨 09.05.20. 08:24
    이방인 페스트 등을 읽었던것 같은데 …정말 줄거리만…ㅜㅜ
    ┗ 旅인 09.05.20. 10:22
    저도 간신히 줄거리만 기억합니다. 늘 뭘 읽었는지 모르게 가슴만 차오르는 책들이니까요.
    ┗ 다리우스 09.05.22. 13:12
    저 아직 페스트 못읽었어요 너무 길어서,,,ㅜ 이방인만 겨우~
    ┗ 旅인 09.05.22. 13:43
    제가 아주 이상한 습성이 있습니다. 작가를 하나 잡으면 처음에서 끝까지 조집니다. 단편 쪼가리까지 다 긁어 읽고, 또 뭐 없을까 껄떡대는데, 꼭 한편 정도는 남겨두거든요. 카뮈의 작품 중 딱 하나 남겨두었던 것이 페스트입니다. 이 페스트를 한 이년전에 읽었는 데, 이 작품은 꼭 남의 작품처럼 느껴지더군요,

    유리알 유희 09.05.22. 10:10
    헉! 저는 지금도 피타고라스가 사람이름인 줄 알았답니다. 저도 쥐구멍 찾고 있는 중. 현학의 미,가 느껴지는 글, 즐감입니다. 여인님!
    ┗ 旅인 09.05.22. 10:27
    그 종파는 수비학을 신봉했는데, 종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 피타고라스였을 겁니다.

    엘프 09.06.09. 16:24
    결혼, 여름. 젊은 성경이라고까지 부르시니 다시 읽고 싶습니다.^^ 가지고 있는데에만 만족해서 제가 제대로 읽은 적이있던가 의심스러워졌거든요. 덕분에 간부, 배덕자, 벙어리들, 손님을 읽었는데 여인님글이 좋은 자극이었어요. 아래 불교강의는 이해가 가기전까지 읽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 건너뛰고 다음편으로 넘어갑니다^^
    ┗ 旅인 09.06.09. 16:42
    가장 젊었던 카뮈가 쓴 글이라 싱싱함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 그리고 풋풋한 사유들이 색깔과 향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다가오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 유리알 유희 09.06.10. 12:57
    적지와 왕국 말씀이신지요? 지금 책을 찾고 있슴다. 저를 매혹시킬 멋진 책을요.
    ┗ 旅인 09.06.10. 14:19
    결혼, 여름 입니다. 적지와 왕국에는 엘프님이 쓰신 간부, 배덕자 등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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