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시절 -04

넘덜은 오팔년 개띠라고 하는 데, 우덜은 개털이라고 한다.

누군가 “어디 임씨냐?”고 물으면, “쌍놈의 임가가 무슨 말라비틀어진 임씨냐!”며, “본관은 그냥이고, 성은 임가!, 그래서 그냥 임가!”라고 했다. 그 작자를 기리는 의미에서 우리는 오뉴월 염천에 혀 빼물고 있는 오팔년 개띠 또한 황공하여 개털이라고 부르고, 바람에 나부끼는 개털마냥 살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386세대가 있고, 486이니 뭐도 있다고 들었다. 한데 오칠년 닭띠도 없고, 오구년 돼지띠도 없이, 딱 잡아 <오팔년 개띠>만 있는지 잘 모르겠다.

오팔 개띠, 이 싸가지 없는 놈들은 “네 나이가 몇 살 쳐 먹었느냐?”고 물으면, “마흔 몇이요.”가 아니라, 무슨 감투라도 되는 냥, “나 오팔년 개띠요!”라며 ‘왜 어디 뜳은 것 있수?’라는 표정을 짖는다. 어떤 경우 뻔히 놈의 주민등록 앞 번호가 오칠이나 오구로 시작함을 알고 있는데, 만난 사람들에게 <오팔 개띠>라고 개같이 짖어대기도 한다.

이것이 사회병리학적인 비틀어짐이요, 이들 시대가 지닌 간빙기적 공허감의 반증이요 어쩌고 저쩌고 해도 나와는 상관없다. 다 그 눔들이 밥 벌어먹자고 씨부리는 전문가적인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이다.

오팔년 개띠가 우덜의 뇌리에 각인을 찍으며 등장한 때는 칠삼년이다(촌에서는 약간 다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오팔년개띠들은 고등학교 입시에서 뺑뺑이로 바뀌었다. 그 이전에 자기가 태어난 해는 골목에서 멱살잡이가 벌어졌을 때, “너 몇 학년이야?” 혹은 “민쯩 까봐!” 정도의 중요성 밖에 없었다.

유신 헌법이 발효되고 사회적으로 술렁임이 있음에도, 선생들은 “작년이라면 곡소리 났는 데…”라며 “곧 죽어도 공부는 해야 한다.”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애들은 그냥 좋았다. 말라비틀어진 유신에 대해서 몰랐을 뿐 아니라, 공부를 잘해도 못해도 뺑뺑이고 아무 학교나 가도 “우리 아이는 공부를 잘 했는데 그만 그 놈의 뺑뺑이 때문에…”라고 말할 수 있는 명분은 있었다. 그래서 그냥 놀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보니 중 3때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뺑뺑이가, 재수 출신들에겐 절망과 허탈의 깊이로 나타났다. 재수 중이었던 오륙년 잔나비와 오칠년 닭들이 더 이상 종로 등지의 학원통에서 개기지 못하고 주르륵 미끄러지면서 오팔년 개떼들의 세계로 텀벙 뛰어들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경기와 서울 못해도 경복은 갔어야 했는데…”하며, “그 놈의 뺑뺑이 때문에 똥통에 들어왔고 인생을 조졌다.”고 거품을 물었고, 순수한 개들의 세계에 혼란과 방종을 몰고 왔다.

오팔년 개띠에서 개털로 내가 변모된 불행의 단초는 단지 하나, 공부를 잘했다는 것 때문이다.

방년 십팔이 되어야 봄비에 대순 자라듯 크는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일학년 때부터 키순으로 일번을 중학교 일학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하다가, 중2가 되어서야 깡총 발로 두번째 줄을 겨우 확보하고 난 후, 고1이 되어서도 두번째 줄을 벗어나질 못했던 나는 한마디로 잔나비들과 닭들의 말을 빈다면 막내동생 뻘이던가 농이 심하면 자식 뻘에 해당되었다.

지금도 친구들이 나를 가리켜 어용학생이라 한다.

이유인즉 담임께서 입학 다음날, 무던히 내 이름을 부르더니 출석부와 학급일지를 내밀었다. 뺑뺑이로 들어간 중학교에서 뺑뺑이로 동계 진학을 했고, 중학교 때부터 학급일지를 들고 교무실을 사환 드나들듯 하다 보니 담임에게 찍혔던 것이다.

남들이 보면 능참봉도 벼슬이고 줄반장도 해보면 폼 난다고, 학급일지 들고 교무실을 무상으로 드나드는 것이 놈들이 보기에는 대단한 것이겠지만, 나는 몹시 싫었다. 또 놈들은 내가 교실에서 벌어진 일들을 담임에게 밀고라도 하지 않을까 했다. 선생이 없을 때 대신 출석을 체크하면, “꼬마 담임 오셨다”고 떠들어 댔다. 죽을 맛이었다.

친구들의 야유보다, 그 놈의 교무실이라는 곳이 싫었다. 선생의 권위라는 것은 찾아볼 수도 없고, 권위주의 밖에 없는 곳이 교무실이다. 말도 안 되는 힘의 논리로 선생이 연약한 학생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고, 학생이 듣기에는 좀 거시기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며, 우리에게 “썬데이 서울도 포르노”라고 외치면서도, 여교사 옆에서 핀엎 걸 사진을 활짝 펴 들고 들여다보는 야릇한 세계가 그 곳이었다.

몸은 어렸지만 교무실을 통하여 어른의 세계를 리얼하게 이해했다. 선생은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철 지난 관념과 그들도 할 수없이 속물이라는 이율배반이 교무실을 뒤덮고 있었다.

어른들, 특히 선생들이 싸가지가 한개도 없고, 형편없다는 것도 거기에서 알았다. 교무실에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한 시간여를 지낸 후, 선생이 인격적으로 존경할 만하다는 것에 대하여 동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선생 자신들 뿐일 것이다.

그들은 누구 때문에 밥 빌어먹고 사는 지에 대해서는 몹시 둔감하지만, 제자들을 위하여 희생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손톱 사이에 낀 가시처럼 아프게 이해하는 사람들이었다.

교무실을 드나들면, 훌륭한 선생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설명은 힘들어도 감각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담임은 좀 불량했으나, 그런대로 훌륭한 선생이었다.

불량이라 함은 담임이 애들의 인생을 책임져야 하기에, 몽둥이를 부여잡고 공부 못하는 놈들을 조져대야 함에도, 애들의 머리 속에 자유나 의리, 인간성이라는 몹쓸 것들을 집어넣었을 뿐 아니라, 공부보다 중요한 것은 젊은 날의 꿈과 이상이라는 말들을 씨부렸다는 것은 내가 학교 당국자라면 당장 사표를 받아야 마땅한 것이었다.

우리 애들은 담임을 선생님이라고 한번도 불러본 적이 없다. 성씨는 거두절사하고 쌩뚱 맞게 이름만 불렀다, “남주!”라고. 멍청한 놈이 풀(Full)로 담임의 함자를 들먹이고, 뒤에 싸가지 없게 선생님까지 붙이면 몰매를 맞았다. 그것은 우리 담임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는 담임을 그렇게 사랑했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다리우스 09.05.13. 12:56
    흥미로운 세계 하나를 여인님의 이야기체로 엿봅니다.^^ 재밌네요~ㅎㅎ
    ┗ 旅인 09.05.13. 13:51
    이 글도 오래전에 써넣았던 글인데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를 알 수가 없이 계속되어서… 이번 참에 마무리를 해야겠습니다.
    ┗ 다리우스 09.05.13. 17:07
    멈출 생각 마시고 계속 쓸 생각만 해보시면 결국멈추게 되실겁니다, 자연적으로, 신이 여인님께 점지해 주실겁니다, ‘이제 멈춰라! ‘ 이렇게요 ㅎㅎ 하지만 역으로 ‘어디서 멈춰야 하지?’라고 하시다보면, 녹슨 시절 5를 넘어 아마 계속 쓰시게 될 겁니다, 타인을 의식 마시고 계속 써내시길 강권하는 바입니다, 여인님 건필요!
    ┗ 旅인 09.05.13. 19:07
    현재 20까지는 완료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지요.

    라비에벨 09.05.13. 17:50
    패를 보니 계속 고 패입니다…^^3번글 찡했는데 많이 웃습니다.^^참 묘한 불량학생이었군요^^
    ┗ 旅인 09.05.13. 19:08
    저는 이중인격의 학생이었습니다. 선생님들에게는 모범생, 친구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불량한 그런 어정쩡한 학생이었습니다.

    샤 론 09.05.13. 22:06
    남자고등학교라 확실히 더 센것 같군요…제가 예전에 서울의 어느 지역 남고에 발령 받아 나갔다가 저 스스로 저들을 다스릴 힘이 없음을 알고 물러 났지요..ㅎㅎ…지금 생각해도 잘 한 것 같아요…강한 남자를 다스릴 힘이 제겐 없었으니까요..ㅋㅋ..그런데 너무들 하신다..그래도 선생님이신데…전 한번도 선생님을 업수히 여겨 부른 적이 없거든요…ㅎㅎ
    ┗ 旅인 09.05.14. 10:45
    제가 담임 선생 이름을 정중히 불렀다가 담임을 모독했다고 애들한테 마자 주글 뻔 했습니다. 저희는 담임을 무지하게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담임을 친구처럼 부르기로 했죠.

    유리알 유희 09.05.14. 11:33
    58년 개띠의 세상, 도 제게는 낯설기만 합니다. 그래서인지 더욱더 흥미진진하다고요. 건필하십시오 여인이여! ㅜㅜ 근데 어디 임씨여? ㅋㅋ
    ┗ 旅인 09.05.14. 13:51
    저는 임씨는 아니구요… 저도 본관을 그냥으로 할까하고… 그 놈의 양반이랍네 하던 사람이 나라와 백성에 도움이 된게 하나도 없으니 비까번쩍한 족보는 오히려 가문의 수치라고도 할 수 있죠.

    산골아이 09.05.14. 11:55
    남학생의 세계를 훤히 들여다볼 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 旅인 09.05.14. 13:52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truth 09.05.20. 02:28
    이번글은 레테남학생들이 공감대가 클듯합니다. 근데..386 무슨 의미인가요..?꼬마담임선생님..어린날의 여인님이 보여집니다. 머슥하고 불편해하는 모습도요..^^ 그 깊고 큰눈동자로는 가려질것이 없었을듯 합니다. 제몫을 정리좀해두고 잠시 이글을 통해 그 당시를 어렴풋이나마 상상해보고,, 이제 잠시 누워야겠어요 .잘 읽겠습니다 다음편두요..^^
    ┗ 旅인 09.05.20. 10:27
    비교적 낡은 단어가 되었는데,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으로 윈도우 386에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이들 세대가 629선언을 이끌어낸 학생운동의 주역입니다. 예전에는 꼬마어쩌고 저쩌고 했는데 요즘은 어용학생이라고 부릅니다.
    ┗ truth 09.05.20. 16:09
    아 그런의미의 숫자이군요, 설명에 감사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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