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페이잡설

臺北雜說

▣ 타이뻬이에 도착하여 김치찌개를 사 먹고, 도교사찰을 방문하다

년간 강우량이 6,557mm에 달하는 臺灣, 中正機場에 도착하였을 때 예상과는 달리 정오의 태양은 밝기만 했다. 공항은 지방의 국내선 비행장과 같이 초라하고 주변은 웃자란 잡초와 간간이 보이는 찌그러진 작은 공장들로 매미우는 여름날의 한가함마저 있었다.

‘中正’ 1中正이란 장개석의 號이기도 하다. 독재정권하에서 함부로 부르면 안되니까 蔣公 中正이라고들 하나보다 이란 易의 位와 爻의 배합에서 나온 말로 內卦의 2位와 外卦의 5位는 가운데 있어 ‘中’이며, 2位는 遇數로 陰位이며 5位는 奇數로 陽位이다. 이에 제자리에 陰爻와 陽爻가 놓였을 때 當位에 자리하였기에 ‘正’으로 中庸의 德을 얻었다고 하여 좋다고 한다.

좋다고 하여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제자리에 제것이 와서 앉았다. 그러니 안정되어 무슨 변화가 필요할 것인가? 어떻게 捲土重來의 그 날을 바랄 것인가? 특히나 부정과 부패로 본토에서 쫓겨난 국민당 정권이 자동소총으로 대만사람을 살육하면서 들어앉아 中正을 이야기하는 참에는 5位의 剛中을 얻었다고 할 것인바, 이미 내가 도착했을 때는 장개석, 장경국, 이등휘의 국민당 정권이 막을 내리고 臺灣人인 첸수이벤이 정권을 잡았으니 바야흐로 일변하여 국민당 정권은 上九 亢龍有悔에 해당할 것이다.

대만은 자리가 중국 福建省 閩江의 臺灣海峽 건너편에 위치하며 廈門(샤먼: 아모이)가 지척이다. 특히 廈門港에 바짝 붙어 있는 金門島가 1977년 中美間 핑퐁외교가 있기 직전, 中臺間 전투가 있었으나 대만이 승리하여 아직 臺灣領으로 온존하고 있다. 주민 대부분이 閩, 越의 이주민이고 일부 고산족이 있었으니 본래 사용하던 언어는 閩南語(복건성 남부의 방언)가 주였을 것이나 국부군이 진주하면서 만다린이 공식어가 되었으리라. 대만의 지하철을 타보면 방송하는 언어가 중국어 3종에 영어 네 가지가 방송되고 있으나 나로서는 변별이 잘 안 된다.

다시 한 번 지리적 위치를 보자면 중국과 지척이나 일본에서 이어지는 琉球列島의 종착점에 있다. 그 중간에 오키나와가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오키나와는 倭에 의한 강점이 삼백년 가깝고, 합병 2三民書局刊 李國祁編著 中國歷史 324쪽에 보면 1871년에 琉球人들이 대만에 표류해와 죽임을 당함에 일본이 琉球가 일본의 번에 속한 바, 淸 정부에 항의하였으나 답이 없자 1874년 대만을 침략한다. 이에 중일간에 협의하되 일군은 대만에서 자진철수, 청은 日金 50만냥 배상으로 종결됨. 이를 근거로 琉球를 속국으로 삼고 마침내 1879년에는 琉球를 日에 합병, 沖繩(오키나와)縣으로 함 이 된 것이 일백여년, 倭가 강점하던 시절, 무단통치가 극에 달하여 무기를 없애버려 자위의 한 수단으로 空手道가 탄생할 정도(가라테의 시발은 唐手이니 중국 쿵후의 영향도 있음직함)였다. 琉球列島의 종착 臺灣은 淸日戰爭 후 일본에 할양 3前揭書 324~5쪽 光緖20년(갑오년, 1894년) 조선에 동학난이 일어나 淸日 동시 파병하였으나, 난이 평정된 후 日이 철수거절함에 따라 양국의 긴장 고조되던 중 무력충돌 발생하여 중일갑오전쟁(청일전쟁)이 발발함. 단기간에 조선 전역 일군수중에 떨어지고 해군이 大東溝에서 대패, 일군이 東三省에 진입하여 대련과 여순을 점거하고 산해관까지 달하는 동시에 威海衛에 들어 北洋艦隊 전몰시킴은 물론 남양의 澎湖列島 또한 일본의 수중에 떨어진다. 이에 일본과 조약을 맺는 바, 군비배상 2억량, 遼東半島 및 臺灣 澎湖列島 할양, 소주 항주 사시 중경을 상업부두로 개항하고 이들 지역에 공장을 열고 할 수 있는 조건이었음 된다. 그 시절 일본은 臺灣人에 대하여 상당히 관대했던 모양으로 아직도 대만 본토인들이 일본인에 대하여 가지는 정서는 상당히 우호적이라는 평이다. 특히 타이뻬이 시내를 돌아다녀보면 곳곳에 일본어가 보이고 방송에도 일본말이 넘치는 등 倭色이 짙다.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간다. 조그만 중국의 자치구인 홍콩에 살고 있는 관계로 보는 모든 것에서 규모가 크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효율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되는 데, 크나 불편하다는 생각이 한국이나 여기서나 공통적이며 어딘지 모르게 관료적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시내에 들어가면서 보는 개울은 공해로 찌들어 있고 집들과 건물은 대만 특유의 습기에 젖어있으며, 거리는 더럽고 차에는 중국음식점 냄새가 깃들어 있다.

국민소득이 한국의 2배에 가깝고 외환보유 면에서 세계 3~4위에 달하며 기업의 재무건전도가 세계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이 곳의 생활은 습기 속으로 침몰하고 있는 듯 했다. 버스는 타이뻬이역 건너편에 섰다. 거기는 新光三越百貨店, 일본계이다. 나는 택시를 타지 않기로 한 바, 묵을 호텔을 찾아 걸었다. 한동안 찾아 헤맨 후 호텔에 도착, CHECK-IN을 해보니 호텔로비는 누추하기가 그지없고, 창이 없는 골방에 좁기는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피곤하였으나 龍山寺로 가본다. 가던 중 濟州火鍋飮食店(한국의 제주열탕음식점: 즉 김치찌게집)이 있어 들어가 영어로 주문을 하니 종업원이 어리둥절 어쩔 줄을 모른다. 잘못시켜 너무 매운 김치찌개를 먹고 속이 얼얼한 채 龍山寺까지 걸어가 절에 들어간다. 화려하기가 그지없는 건물이다. 중국에서 절이라면 불교의 寺刹인지 아니면 도교의 道觀인지를 항상 분간해야 한다. 통상 절은 寺를 쓰고 도관은 廟를 쓰나 이곳은 寺인데도 불구하고 道敎의 색채가 강할 뿐 아니라 스님은 보이질 않고 黑衣를 걸친 신도들이 천수경을 염불하고 있는데 음률이 한국과 틀린다. 돌아다녀 보니 도관과 같이 향불을 사르고 占竹을 뽑아 운세를 살피는 것이 어느 도교사원과 틀릴 것이 없다.

▣ 서점에서 책을 산 후

지하철을 타고 타이뻬이역으로 갔다. 차비는 20원(NTD4/HKD, KRW35/NTD)으로 상당히 비싼 편이다. 지하철역은 상당히 크고 설비도 깨끗한 편이나 효율 면이나 사용도 면에서 오히려 한국보다 뒤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지하철에서 나와 백화점을 둘러본 뒤 골목을 따라 아까 보아두었던 서점가를 가 본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것은 중국어로 간단한 인사말도 못하며 숫자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 중국 책을 사기 위하여 서점을 들르다니, 이와 같은 웃지 못할 일을 한국사람들은 천년 여를 계속 해오지 않았던가!

한 서점에서 `周易漫談’과 `中國人性論’을 산 후 臺灣商務印書館이 보여 들어가 `道敎史槪論’을 샀다.

그 후 호텔 근처의 西寧南路, 젊은이들이 모이는 한국의 대학가같은 곳에 있는 KFC에 들어가 치킨세트를 저녁으로 먹었다. 세계적인 체인점인 이 곳의 가격은 108원으로 홍콩보다 비싼 편이나 맛은 홍콩에 비하여 훨씬 뒤쳐졌다. 이 곳에 와서 대만음식을 먹지 못한 것에 한심함을 느끼면서 호텔로 돌아와 잠을 취했다.

實事求是! 좋은 말이다. 사실에 입각하여 진실을 구한다하는 말은 조선 실학의 방편이 되었으며 지금 대통령이신 김대중선생 또한 이를 표방하고 있다. 실은 淸代의 考證學的인 명제로 義理(의미와 이론)에 치중해 온 性理學的인 방식을 혁파하고 실제에서 구한다는 패러다임의 轉變으로 조선에서 실학자(후세의 구분으로 茶山도 실학이 뭔지 몰랐음)들이 율곡에서 우암으로 연결되는 노론의 理氣一元論에 입각한 정치체제에 딴지를 걸기 위한 남인들의 反動 左派的인 이론(그러나 절대군왕 중심 이론으로 정조도 이에 가세)으로 학문 그 자체보다 實事(현실)가 옳은 것을 구한다는 입장으로 실증, 실용적인 학문의 방법론으로 형이상학적인 理氣論보다는 정치, 경제, 경학, 사학, 지리, 농학 등의 실용적인 학문에 집중되었다.

왜 실사구시를 이야기하느냐면 대만이라는 이 곳 중국인의 物神的인 경향이 농후한 땅, 생활만이 일의적인 땅에서 만나는 것은 생활을 떠난 곳 사치와 몽상과 허례가 인간의 삶 속에서 어느 정도는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 곳은 삶의 기본인 衣食住 면에서 볼 때 남방계 중국인의 모습이 그다지 양호하지도 못한 데다 입음세마저 누추하여 보는 것마저 상그럽다. 고유의 음식은 이미 일본음식과 서양음식에 구축되어 대만음식은 노변의 음습하고도 불결해 보이는 곳으로 쫓겨나 외지인들이 감히 먹을 마음을 가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음식의 맛도 형편없다. 또한 집들을 볼 때 과연 그들은 어디에 사는가 묻고 싶을 정도이다. 빌딩 옆의 허름한 집이나 국부기념관 옆의 아파트? 아니면 타이뻬이를 둘러 싼 三重市, 永和市, 板橋市의 찌그러진 집들? 골목은 어둡고 습기가 가득하며 철공소와 낡은 가게가 즐비한 곳, 그 곳에서 그들은 산다, 빛도 들지 않는 곳에서. 길의 보도 바로 곁에는 건물들이 있고 보도 옆으로는 기둥이 세워져 그 위로 지붕이 얹어져 보도가 마치 회랑처럼 되어있다.이 보도 위로는 오토바이와 스쿠터들이 즐비하여 좁은 데 또 탁자며 허접쓰레기들이 놓여 있어 걸어다니기 조차 불편하다. 습기 찬 보도 위에 물마저 뿌려대니 미끄럽기까지 하다. 건널목에는 신호판이 고장나 고쳐지지 않고 차량의 좌우회전은 필수로 사람이 다니기에 불편하기가 그지없다.

홍콩을 생각해보면 성룡 영화의 한 장면에서 ‘I believe in god, but my god is money.’라고 씨부리는 物神敎의 땅이다. 그러나 더러운 곳에 돈이 꾀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비싸게 팔려면 포장을 잘해야 한다, 불편하면 손님이 안 온다, 하는 점이 은성한 상점과 서늘한 에어컨, 환상적인 광고예술이 등장하나 대만은 이와 상반된다. 이는 서구의 관리력과 돈과 정부의 간섭이 없는 야경소도시국가인 홍콩과 돈과 가족을 바탕으로 하는 華人들과 비능률적이고도 파렴치한 국민당 독재정권이 겹치면서 나타난 비정상적인 모습이 아닌가 하고도 생각한다. 아니면 상업과 관광업을 기본으로 하는 장사아치 홍콩인과 제조업 공돌이를 기본으로 하는 대만인의 차이일 수도……

▣ 고궁박물관에 가서 중국문물을 접하고서

둘째날, 어디 가서 아침을 사먹을 자신이 없어 아침으로 컵라면을 삶아먹고 길로 나선다. 국립고궁박물관을 가기 위하여 전철을 타고 北投線 士林驛에 내렸다. 버스를 타고 박물관에 내렸다. 아차 했으면 지나갔으리라.

고궁박물관은 일명 中山博物館이다. 손문의 탄생 백주년을 기려 만든 박물관이라 한다. 건물은 권위주의적이면서도 참으로 품격이 없었다. 생자필멸이라는 것이 가끔은 좋다고 생각된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사멸된다는 것은 그렇다 해도, 추악한 것이 사멸된다면 이는 세월이 주는 멋진 선물일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박물관 안은 전해 듣던 것보다 작았다. 중국문명의 총체가 있다는 고궁박물관에 들어서는 감회란 중원을 맞이하는 느낌이었다.

한국의 美를 線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중국의 미는 규모와 정교함에 있다고 할 것이다. 한국의 예술이 정감에서 출발한다면 중국은 힘(氣韻生動)과 功力에서 출발하며 상당한 테크닉이 필요하다는 느낌이다.

우선 청동기를 보면 한국의 박물관에 수장된 청동기는 발청으로 인하여 문양은 물론 무엇인지 구분조차 안될 정도이나 商代나 周代의 청동기가 아직도 명확한 선을 그대로 간직한 채 뚜렷한 雄姿를 보이고 있다. 청동기를 보면 殷末期에서 周初로 오면서 장식성이 후퇴를 하는 데 이는 주나라의 발원이 변경에서 시작한 반증일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 후 周 末期로 가면서 회복되는 과정을 보인다. 청동기가 출토된 지역을 보면 이미 은대의 청동기가 지금의 廣東省에서 출토된 것으로 나오는 바, 禹가 치수사업을 끝마친 후 중국을 九州로 나누었다는 것이 설화에 불과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나는 西周까지 중국의 활동무대는 汾,渭,洛 三水 에 걸친 반경 500Km의 지역에 불과하다고 늘 생각한다)반면 商務印書館刊 『尙書今註今譯』禹貢을 보면 첫머리에 梁州貢鐵이란 구절이 나오나 西周 이전에는 鐵器를 쓰지 않았던 것을 거론하며 東周(春秋時代)이후의 작품일 것을 거론하고 있음은 타당하다.

청동기에는 삼천여년전의 銘文이 각인되어 있다. 아아, 창힐이여! 문명은 예서 시작하노라. 그 명문은 과두문자라더니 과연 올챙이마냥 글씨들이 옴씰거린다.

청동기를 보고 난 후 候家莊의 1001號 殷商帝王大墓 출토품을 보았는 데 삼천년전의 문물이나 대리석의 가공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며 조각과 부조가 현대적인 감각과 일치하거나 혹은 마야문명의 부조와 같은 느낌이 든다. 또한 도기의 厚度와 紋樣 등이 찬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생생하며 양감이 좋다.

그 후 華夏文化와 世界文化의 關係 特別展을 보았는 데 한마디로 중국 놈들 잘났다 라는 이야기였다. 그 중 한국의 석굴암 등도 비교로 나온다.

碑帖展은 탁본으로 별 감흥이 없었다. 이 중에는 구양수, 안진경 등의 글도 나오나 흥미가 없었다. 안내문에 보니 비석에 글을 새기는 것은 東漢(후한)이후의 풍조로 이전에는 비석이 해시계 또는 목축들을 끌어들이는 곳 아니면 관을 끌어 묘혈에 집어넣는 용도로 쓰였으나(碑用來觀測日影, 繫絆牲畜以及引棺入穴) 언놈이 한 번 글을 새기기 시작하자 너나 할 것 없이 새겨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후 내가 제일 보고 싶어하던 동양화를 보았으나 실망이다. 중국의 그림은 이전에도 있었으나 주로 宋 元 明 三代에 집중된다. 그 중 원대의 그림이 담박하고 청아한 느낌으로 으뜸이다. 송대의 그림은 르네상스 그림처럼 구도나 색조면에서 어색하며. 명대의 그림은 웅장하고 정교하여 예술이라기 보다는 전문가가 그린 공예품에 가까운 느낌이다. 또한 청대에 들어오면서 서양화의 기법이 역류되어 채색화가 주가 되면서 동양화가 서양화로 뒤바뀌는 역겨움이 베인다. 아마 내 이야기에 「세한도」를 그린 秋史도 동의할 것이며 한국화의 경향 자체가 元代의 그림에 경도되어 있다고 보아도 그릇되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아무튼 볼 수 있는 그림이 明代 浙派의 祖 戴進의 작품과 明 中葉의 인물화 四家의 그림, 郵政局 발행 우표의 진본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으나 아! 하고 감탄이 나오는 그림은 없었다. 회화의 면에서는 한국이 앞서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인물화 중 하나가 이렇게 단순한 筆線으로 이렇게 고아한 여성을 표현하다니 하고 감탄할 순 있어도 대부분의 그림이 붓이 무겁고 답답한 느낌을 주어 오히려 浩然之氣를 부르짖고 ‘氣韻生動’ 4기운생동은 본시 명대의 화가인 董基昌이 말하여 화단에 회자되기 시작한 단어로 본시 예부상서에 까지 이른 독서인으로 그림에 있어 전문성은 부족하나 그림을 좋아한 그는 당대에 테크닉에 치중한 화단을 질타한 명언, 氣韻生動을 남긴다. 즉 그림이 죽어서는 안 되며 에너지와 운치가 꿈틀거려야 한다는 것이다.(본 주석이 틀림) [수정]5기운생동은 謝赫(AD500~535년경)의 저술 古畵品錄에 나타난 그림을 그리는 테크닉(六法) 중 첫째로 그림에는 리듬이 있어 생동감이 있어야 한다는 동서양화를 포괄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러나 후일 송대부터 문인화가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그림의 테크닉에서 동양화의 제일원리로 옮겨가며 개념이 보다 형이상학적으로 변모되고 아리송해졌다. 추가로 나머지 5법은 骨法用筆(정확한 의미는 해석이 안되나 기운생동과 병치되는 문장으로 붓을 다루는 테크닉이 능란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됨), 應物象形(사물의 모양에 충실하라), 隨類賦彩(응물상형과 병치되는 항목으로 사물의 고유의 색에 충실하라), 經營位置(구도를 잘 잡아라), 轉移模寫(잘 베껴 그려라)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문인화가 아직 자리를 잡지 않았고 그림이 귀족 중심의 채색화란 점을 감안할 때, 사혁의 육법 자체는 송대 이후 문인화가 등장하면서 생긴 고도의 사변적인 내용이 아닌 화공으로서의 기술적인 면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서양회화의 기법과 틀릴 것이 없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사혁의 육법 중 기운생동은 그 내용의 모호성으로 인하여 송, 원, 명대의 문인화가들에 의해서 회화의 제일원리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이 기운생동이라는 제일원리에 의하여 나머지 5법이 무시되는 형국이 전개된다(달마도와 청조의 팔대산인의 작품 등)5    [보록]6상기의 동기창의 이야기는 완전히 틀린다. 그는 남종화에 우위를 두는 발언을 하였다. 남종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송대의 궁정화가인 마원과 하규의 흐름인 마하파를 이야기해야 하는 바, 이들은 변각구도라는 근경에 중점을 두고 중경은 실루엣으로 처리, 원경인 무한공간을 그 다음에 처리함으로써 관람자가 그림에 몰입될 수 있도록 하는 테크닉을 개발하였다. 이러한 그림은 원대의 수묵산수화의 기초를 이루고 후에 명의 절파화풍에 이어진다. 한국화는 그 기초를 어디에 두었는가에는 많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중국 그림의 대종이 마하파에서 절파로 흐른다면 그 쪽 방향이라고 보여지나 나의 느낌은 절파의 고도의 테크닉보다는 원대의 소박한 그림과 많이 닮아있다는 느낌이다을 말하기에는 그림에 기교와 가식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 후 陶瓷器를 보았으나 宋代의 瓷器가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도자기라면 고려청자가 群瓷 중 월등이니 비교 불허라고들 하나 나로서는 이조백자가 담백함과 기품에 있어 청자를 능가한다고 늘 생각해왔다.

다음은 공예품들 쪽으로 눈을 돌렸으니 세공의 치밀함이 놀랍다. 옥과 상아, 뼈, 대나무 등의 공예에 이르러 사람의 손으로 기가바이트의 메모리를 생산하는 21세기에 서서 이들 공예품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공예가의 손이 神手라 할 수 있을 만큼 정교함과 아울러 공예품에 넘쳐흐르는 예술적인 아취에 뭐라 할 말을 잃는다. 또한 법랑의 작품을 보면서 그 기술의 진보를 눈으로 확연히 보면서 무엇이 인간의 문명을 진보케 하는가를 물어본다. 이들 공예품이 자신들의 예술적 완성을 위하여 만들어졌는가 아니면 귀족들 혹은 황실의 돈을 긁어내기 위한 수단 혹은 그들의 매질을 피하기 위하여? 찬탄을 하기에 앞서 이들의 작품 앞에서 과연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이 진화해 왔는가 하고 묻고 싶다. 진화하지 않은 채 문명 만이 발전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는 질곡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정치, 법률 등의 문화가 발전한다 하여도 진화되지 못한 인간에게는 소외만이 남게 될 뿐.

西藏佛敎法器特別展이 있어 보니 듣기만 했던 金剛杵나 해골로 만든 手鼓와 해골로 만든 컵 등을 볼 수 있었다. 외양이 흉측하여 사교집단의 法器로 이해되나 西藏密敎의 근본취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풍습을 이해하면 또 다른 관점에서 이들의 종교적인 열망을 이해할 것이다.

박물관 개관을 보면 박물관의 수장문물은 청나라 궁중에서 보관하던 것이 대부분으로 역사는 宋初에 까지 소급하는 바 천년여의 역사가 있다고 한다. 그 후 수차의 난에 산일되고 다시 모으고 하는 과정이 거듭된 후 民國 14年(1925년)雙十節에 故宮博物院을 성립한다. 그 후 사변 등의 발생으로 박물관 南遷, 또는 분리수장 등을 거치다 다시 집합, 그 후 민국 37년 겨울 고궁박물관과 중앙박물관에 있는 문물정품을 엄선, 민국 38년(1949년) 대만으로 이송해 오기에 이른다. 민국 54년(1965년) 중산박물관을 낙성, 수장하기에 이르렀으니 3개의 故宮 즉 北平, 瀋陽, 熱河의 避暑山莊의 문물을 대표한다고 한다. 수장 문물은 24만여건으로 세계에 공인되어 있으나, 자신들이 다시 분류해보면 총 645,784건이며 器物類가 68,270건, 書畵類가 9,132건, 圖書文獻類가 568,382건이라 한다. 단 도서문헌류 중 當案(File)이 386,391건인 바, 이를 제외한다 해도 어느 정도의 분량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분량의 방대성으로 인하여 展示에 있어 2종의 방법을 쓰고 있는 바, 첫째는 일반성에 입각하여 매번 전시하는 것으로 각 종류의 것을 준비하여 멀리에서 오는 사람들이 중국문물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둘째는 경상적으로 전문 제목 하에 전람하여 연구하는 사람들이 한 계통의 문물이나 한사람의 작품을 만나 계통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박물관에는 일반전과 특별전이 함께 하고 있어 나와 같은 외국인이 중국문물의 전모를 보는데 50% 밖에는 할애가 안되는 셈이다. 따라서 고궁박물관의 전시품을 4시간에 보고 나니 허허롭기가 그지없다.

박물관 전체에 흡연을 위한 공간이 전혀 없고 콜라, 커피 등 자판기가 없이 구내 다과점 같은 것을 운영하고 있는 데 엄청나게 비싸게 받아 처먹고 있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그림같은 경우 진열대 안의 빛마저 약하여 잘 안 보인다. 전체적으로 박물관 운영은 많은 수장품에 불구하고도 그다지 많은 점수를 줄 수 없다.

가장 아쉬운 점은 과학, 기술에 대한 문물이 전시되지 않고 있어 17~8세기까지 전세계 최강의 부와 과학문물을 부단히 자랑해왔던 중국에서 그와 같은 문물을 전시하지 않다니 아쉽기가 그지없고 황실과 귀족, 사림에서 민중을 착취하여 만든 문물의 展示에만 급급하다니 하는 생각이 든다.

기념품 판매처의 판매도서를 보니 중국말이나 영어로 쓰여진 안내서는 不備한 반면 일본사람이 쓴 日文案內書가 월등하여 일본의 박물관인 듯한 착각마저 일으킨다. 체계적인 안내서를 제시해 줄 수 있는 박물관 측의 연구가 아쉽다.

박물관을 나오니 천둥이 그르렁대더니 지나는 비가 온다. 가는 비를 맞으며 옆의 至善園으로 간다. 대만에는 역사가 없다. 지선원은 송명대의 건축풍격으로 지었다 하나 건물의 내부 상량 위에 합판이 보이고 이곳 저곳에 시멘트 자국이 있어 눈에 거슬린다. 質朴은 좋으나 粗雜은 항상 역겨운 법이다.

▣ 대만대학을 찾아가다가 길을 잃고서

배도 고프고 오랫동안 박물관을 둘러보아 피곤하기가 그지없었다. 사림역 부근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전철을 타고 대만대학으로 향한다.

언어의 장벽. 역에서 내려 아무리 걸어도 대만대학을 찾을 수가 없다. 지도 위에서 가로명을 아무리 찾아 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걷다가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 보니 永和市라고 쓰여 있다. 아뿔싸 걷다 보니 그 사이에 강을 건너 타이뻬이를 벗어났다는 것인가? 그러면 다시 제자리로 가자하고 길을 걸어간다. 공원이 나타난다. 中和公園이란다. 어럽쇼, 여기는 中和市란다. 완전히 길을 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을 건넌 적도 없는 데 엉뚱한 곳으로 오다니. 할 수 없이 택시를 타지 않겠다던 원칙을 포기하고 택시를 잡아탄다. 첫 번째 택시, 한자를 써서 보여주었으나 기사가 고개를 흔든다. 하차. 두 번째 택시 SHIAMEN STATION 한 후 한자로 쓴 것을 보여준다. 다행이도 알아들은 것 같다. 택시를 타고 가다 보니 역이 나왔다. 역은 애당초 가려던 台電大樓驛이 아닌 그 한 정거장 전인 古亭驛에서 분기선으로 접어들어 강을 건너 永和市로 전차가 들어선 것이었다.

중국어는 표의문자라서 발음이 유동적일 수 밖에 없다. 비록 說文 등의 字典類에 발음은 어느 자와 같다라고 표기되어 있고 이제는 주음부호와 알파벳으로 문자의 소리를 규정하고 있다고는 하나 오랫동안 음운의 유동성을 넘어서질 못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음운학이 중국에서 발달했는 지도 모른다. 반면 만다린의 소리를 들어보면 齒舌音 때문인지는 몰라도 청량하기가 그지없다. 마치 가을날 바람이 갈대 숲을 지나는 듯한 느낌. 하나 각 글자마다 소리의 음편들을 정확하게 분해하여 변별해내기가 힘들고 중복자음일 경우 어느 자에 무게를 두는가 등에 애로를 느낄 수 밖에 없다.

西門驛에 내려서 다시 호텔로 간다. 이미 둘째 날이 되자 호텔도 견딜 만 했다. 할 일이 없어 다시 서점으로 간다. 내가 사고 싶어했던 方東美 선생의 책이 없어 `王弼’과 한권짜리 `中國歷史’를 샀다. 그 후 黎明이라는 서점에 들어가 보니 方선생의 책이 있었다. 그래서 `中國人生哲學’을 조성호 선생에게 한권, 그리고 梁소저에게 한 권씩 선물하고 내가 한권 수장하기 위하여 3권을 사고 `方東美演講集’을 한권 샀다. 그랬더니 흐뭇하기가 그지없다.

책에는 방동미 선생의 약력 소개가 없으나 한국어 번역판을 보면 1899년에 태어나 1977년에 죽었다고 되어 있으며, 1921년에서 1924년까지 미국의 위스콘신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득하였으며 이 기간 중 서양철학사상의 훈련과 기초를 쌓았다고 되어있다. 1924년 國立武昌大學 부교수, 國立東南大學, 中央政治大學, 中央大學 교수를 거쳐 1948년에서 1973년까지 국립 대만 대학에서 강의, 퇴임 후 輔仁大學에서 강의하다 78세의 일기로 밥숟가락을 놓음이라고 되어 있다.

중일전쟁 발발 3개월 전인 1937년 4월, 南京放送局의 요청으로 여덟 번에 걸친 강의를 하였는 데 `中國人生哲學精義’라는 題下(출판명 `중국인생철학개요’) 였다. 이는 당시 중국인의 항전의식을 고취하기도 했다고 한다. 중일전쟁 때 그는 후일 인도의 부통령이 되기도 하고 印度哲學史(나도 한권 가지고 있었는 데 망실) 한 권으로 학계에 명성을 날린 라다 크리슈난을 만나 대담 중 상기의 책 인생철학개요를 증보, 개편하여 영문판 출간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 책이 Chinese View of Life이며 바로 내가 산 책 `중국인생철학’이 그 底本이다.

先日談. 이 책은 이미 20년전 갖고 있었으며 결혼 후 이사 등으로 전전하면서 잃어버렸다. 방동미 선생의 직전 제자임을 자랑하던 아무개 교수의 시간, 나는 그의 과목을 도강했다. 그 때의 교제가 바로 중국인생철학의 복사본이었다. 그 때 책은 있었으나 읽지를 못했다. 강의는 환상적이었다. 文 思 哲이 하나가 되는 강의, 단순한 지식에서 감정으로의 소요, 그런 것을 느끼면서 방 선생의 책에 대하여 어찌나 애착을 느꼈던가? 책을 잃어버린 후 영문판의 번역본을 읽으면서 느낀 무미건조함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책을 구하고자 했으나 구할 수 없었고 대만에서 조차 馮友蘭, 勞思光, 錢穆의 책은 있어도 방 선생의 책은 없었는 바, 중국철학사라는 譜學的인 관점에서의 책을 그가 집필치 않은 탓도 있으리라.

그런데 왜 여명이라는 책방에서는 그의 책을 구할 수 있었는가하고 자문해보니 여명이라는 곳이 국방관련 서적을 발간하는 출판사이며 방동미 선생이 어떤 관점에서 보면 보수우익 사상가일 수도 있다는 점, 그가 중국문화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보다는 주관에 입각한 국수주의적인 왜곡마저 서슴지 않을 수 있었다는 시대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그에 대한 느낌이 대만 거리처럼 퇴락해버리는 것이었다.

서점에서 책을 구한 후 다시 호텔 근처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길거리로 가 저녁을 먹었다. 양식점에 들어가 메뉴를 보니 470원 그렇게 한다. 대만치고는 비싼 음식점이라 시켜 먹어보니 맛이 형편없다. 길거리로는 和食(일식), 西餐(양식) 식당이 즐비한 데, 자신들의 음식점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왕필을 잠시 읽어본다.

나의 책 읽는 법, 특히 한자로 써진 책.

누가 “당신은 왜 책을 읽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폼 잡을라고”하고 답하는 것이 나에 한해서는 정답이라고 말하고 싶다. 테오리아와 프락시스 둘 중 무엇을 추구하느냐고 묻는다면 理論知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항상 테오리아와 프락시스 사이에 명확한 금은 없다. 내가 독서를 시작한 근본 원인은 남들보다 글을 늦게 읽기 시작했고 남들 보다 좀 모자랐다는 점에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남들보다 조금 앞서 갈 수 있었는 데 그것은 타인의 지식이 나의 모자란 점을 보충해 주었다는 점, 그래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남들 수준의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는 점은 독서의 이점이었다. 정작 理論知를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인 바램은 인류의 책들 중 그 어딘가에 날아다닐 수 있는 비법이 있으며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나는 봉잡는다는 엄연한 實踐知를 얻기 위한 어린 시절의 독서는 결국 나를 사람이 날아다닐 수 있는 비법이 쓰여있는 책에 다다를 수 있도록 했다. 그 책과 지식은 나에게 날아다닐 수 있다는 전망을 보이면서도 아무리 인간이 날아다니고 초능력을 갖추고 金剛不壞의 육신을 얻는다 하여도 인간은 불행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행복과 열락의 세계가 있다는 것, 그 비젼을 제시함으로써 자라나던 날개를 내 스스로가 잘라내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지식은 어떻게 얻는다? 이른바 무상정편지(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不立文字인 고로 지식을 구할 책이 없다. 또한 길이 없고 (大道無門) 가르칠 방도가 없으니(言語道斷) 어찌 스승이 있을 수 있느냐 그냥 웃을 수 밖에. 따라서 지금의 나의 독서는 이력서에 써 넣는 취미 `독서’에 해당한다. 단지 틀리다면 취미 독서는 무협지, 애정소설, 썬데이서울, 아니면 책은 읽지도 않으면서 취미에 공란을 남길 수 없어 독서라고 쓰는 것 등이 되겠으나 나의 경우 무지하게 어려운 책을 읽는다. 그러니 정작 취미는 어려운 책 읽고 나서 폼잡기에 해당한다. 아니면 완곡하게 표현한다면 취미 `공부’라고 하면 되나?

이러다 보니 마누라가 말하는 대로 “읽기는 주책없이 많이 읽는데 아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라는 엄정한 이론지에 근거한 독서를 한다.

중국어 모르면서 한문책을 읽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대충 글자의 뜻은 안다. 그러니 읽는다. 문법같은 것은 개의치 않는다. 사람이름, 숫자, 지명, 아는 단어 등을 그냥 인식한다. 그리고 재빨리 머리(CPU)를 돌려 내가 아는 상식을 발췌 대입해본다. 넘겨짚는다. 앞뒤의 내용을 연결해본다. 그러면 문의가 대충은 떠오른다. 따라서 한문소설이나 한시 등 엄정한 문법이 필요하거나 생활어법에 구애받는 것은 읽지 못한다. 이와 같이 일어도 못하면서 일본신문도 본다. 나의 지식이 엄정하지 못하듯 읽는 것도 엄정하지 못하다. 즉 散逸雜駁.

24살에 요절한 중국의 대 天才 왕필(중국의 현학의 개조격)을 보니 이 친구는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으며 投壺 등 잡기도 잘했다고 하는 데, 삼국지에 나오는 형주자사 유표의 외손뻘이다를 읽다가 잠을 잔다.

▣ 기륭으로 가서 도교사원을 보고 실망하다.

다음날, 타이뻬이지점을 향해 나선다. 건물을 찾는데 번지수가 갑자기 사라진다. 지도 상의 도로가 없어지고 그 위에 건물이 있다. 지도 상 世界貿易中心은 있어도 國際貿易大樓는 없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무역중심은 지역이고 국제무역대루는 바로 그곳에 있는 빌딩임을 알았다. 타이뻬이에서는 일류 건물인 셈인데 8층에 있는 사무실에 들어가니 토요일이나 나라에서 정한 빨간 날(휴일)이라 한다. 다행이 교포 현채인 윤씨가 잔무 중이라 지점장에게 메모만 남기고 떠났다.

다시 역을 향해 가다보니 國父記念館이 있다. 이 또한 시멘트로 엄청나게 크게 만든 관료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건물이다. 들어가 보니 볼 것이 없다. 孫文, 대만과 본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측에서 국부로 모시는 인간, 그러나 그를 잘 모르겠다. 반면 한국에는 국부가 없다. 국부가 있다는 자체가 좋은 일인냥 생각된다.

기념관을 나서자 천둥이 치더니 비가 내린다. 전철로 타이뻬이 역에 내리자 비가 억수로 내리기 시작했다.

다시 책방을 들렀다. 점심으로 햄이 든 빵을 사먹는데 햄이 아니라 육포냄새가 났다. 억지로 먹고 基隆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 사오십분 걸리는 기륭까지의 철로 변은 빗물과 꺼멓게 탄 벽들, 삭아내리는 공장 건물, 흑색조의 지저분함의 범벅이었다. 드디어 기륭 도착. 항구도시인 기륭의 몰골은 타이뻬이보다 더 처참했다. 정말로 이런 곳에 사람들이 왜 사느냐 싶었다. 역 건너편 산 위를 보니 멋진 도교사원이 보여 그리로 가기 위하여 길을 걷는다. 마침 무슨 날인지 도로에는 꽃 치장을 하고 무슨 종친회니 하고 쓴 차들이 폭죽을 터트리며 줄을 잇고 있다.

신도인 듯한 노인네들을 따라 언덕길을 오르니 `慈安宮’이라는 천박한 건물이 있다. 그 천박한 색조가 멀리에서는 깔끔해 보였던 모양이다. 건물의 천박성은 마치 「中等學校 以上 學歷 入敎不可」라고 써놓은 듯하다. 도교의 일종인 듯한 데 사이비 종교단체임을 즉각 느낄 수 있다. 도교 자체가 한국의 무당연합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실상 이 곳이나 홍콩 등지에는 사이비라고 할만한 종교단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세계종교와 사이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을까냐 마는 나의 사이비 규정은 종교라는 미명 하에 교주가 네다바이 쳐서 신도들의 돈을 갈취하는 것을 뜻한다. 나의 경우 오히려 세계종교를 싫어한다. 세계종교란 그 역사적 존립 근거가 체제 옹호적이고 호국적인 경향을 갖고 있어 이념 상으로는 비록 천상과 진리를 지향하면서도 현실 속에 권력의 뿌리를 드리우며 권력과 영합하는 속성을 지녀 진정으로 인간을 지향하지 않는다. 또한 진리에 눈을 감고 허위 속에 가부좌를 틀고 묵상하는 성격을 지니며 종단의 장로의 보수성향과 기득권의 붕괴를 두려워하는 추기경의 쑥덕공론에 의하여 신의 의지와 진리의 실체가 변질되는 성격이 있으며 언제나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무엇에 각구목과 철봉 극단적으로는 핵무기마저 휘두를 수 있는 사악하고 냉혹한 성격을 지님으로써 역사적 실체로 존재해 올 수 있었다는 것에 세계종교에는 진리도 신도 자비와 박애마저도 없노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자안궁을 지나 산 위에 오르니 거기에는 더욱 처참한 몰골의 건물이 서 있다. 아마 집회시설물인 듯, 하나 산 위에서는 기륭항과 시내가 다 내려다보인다.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산봉우리는 中正公園인 데 관음상과 절이 있어 간다. 가는 길에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화룬궁(法輪功) 소개 유인물을 주어 그를 받아들고 관음상이 있는 절에 간다.

아아! 이러한 끔찍함. 절이 아니라 시장이다. 寺商複合의 절, 시멘공구리의 관음상, 돈을 갈취하기 위하여 천수관음의 손으로 물레를 만들어 거기에 동전이 걸치면 재수있고 안 걸치면 할 수 없고의 우물. 이 정도의 수준이면 사이비의 구분도 없고 돈만 있다. 하나 전망은 좋다.

▣ 화룬궁(법륜공)의 유인물을 보며

타이뻬이에서 부터 걷고 땀 흘리고 한 것이 무리였는 지 다리가 후들거려 할 수 없이 기륭역까지 택시를 탔다. 역에 도착하자 미터기에는 60원이 나왔는 데 100원을 주니 20원만 준다. 다시 기차를 타고 타이베이로…

잠시 요즘 중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화룬궁(法輪功)의 유인물을 살펴보자.

法輪修煉 7수련이라는 단어가 통상 쓰는 修練과는 달리 修煉으로 되어 있다. 이는 도가의 煉丹에서 쓰는 용어로 단약의 제조에 쓰이는 煉功이나 內丹田의 煉功과 같다. 이 煉자는 달인다라는 뜻으로 약한 불로 오랫동안 가열하면 眞火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만약 격하게 끓일 경우 열은 있어도 眞火는 없다. 그래서 탕약은 물(坎)속에 가운데 眞陽을 발동시키기 위하여 숯불로 서서히 가열하는 것이다 의 큰 法은 佛敎와 틀리다. 이는 法輪佛法大師이신 李洪志선생이 새로이 만들어 낸 佛家 上乘修煉 大法이다. “이는 우주의 최고 특성인『眞,善,忍』과 하나가 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그의 지도를 받음과 동시에 우주의 흘러 변화하는 과정을 두루 살펴보면서 수련하니 우리들이 大法大道라 하는 까닭이다.”하고 시작한다.

그 내용을 보면 오랜 煉功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을 수련해야 한다고 하고 있으며 그 핵심은 忍,悟,捨에 두고 있는 듯하다. 자신들이 일부 신체적 공력을 키우는 것도 하고는 있으나 그는 보조수단이라고 보고 있다. 자신들은 법륜을 수련하는데, 법륜이란 靈性的이면서도 旋回하는 高能量物質體라고 한다. 李洪志가 수련자의 복부에 法輪을 주며 법륜은 하루종일 끊임없이 돌면서 연공을 돕는다는 것이다. 법륜대법의 특징은 一. 법륜을 수련하지 丹을 닦는 것이 아니다 二. 사람이 연공을 하지 않아도 법륜이 한다 三. 의식의 수련을 주로 하여 스스로 공을 얻는다 四. 性을 닦았으면 命을 닦는다 五. 五套功法(다섯가지 방법의 수련?)으로 간단하고 배우기 쉽다 六. 意念 등에 머물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며 오랜 공력을 빨리 쌓는다 七. 연공에 있어 장소, 시간, 방위, 공력을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八. 바깥의 나쁜 기운의 침입(주화입마)을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되어 있다.

이 유인물에 의한다면 일반 氣功이 방송, 토납, 의념을 기본으로 下丹田(上丹田이나 中丹田에서 시작하는 氣功은 찾기 힘듬. 太乙金華宗旨는 상단전을 중심으로 함)에 호흡을 끌어들여(토납) 氣를 小周天(運氣行功)시켜 大周天의 우주와 합일한다는 목표를 취하기에 연공과정에서 필수적으로 호흡과 단전이 중심이 되고 마음을 어떤 대상에 걸어두는 의념 등이 필요하며 많은 시간이 걸리고 개인이 상당한 의지를 가지고 수련해야 하는 등의 난점이 있는 동시에 방송(릴랙스)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수련에 무리할 경우 호흡과 소주천 과정에서 走火入魔를 당한 실증적인 예가 많이 있다. 그래서 기공에 있어 호흡을 중심으로 하는 靜功만 할 경우 위험이 많아 動功을 병행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화룬궁의 대법이란 것은 일거에 이와 같은 문제점을 뛰어넘고 있다. 이들 말대로 라면 혁신적인 기공에 해당한다.

불교에 비교한다면 頓悟 후 漸修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그런데 李가가 준다고 하는 법륜이란 것이 무엇인가? 이 법륜이란 것이 지금 문제를 만들고 있는 핵심이 아닌가 생각한다.왜 이들이 광신적인 종교집단과 같은 양태로 변화하였는가? 李가가 준 법륜의 실체는 催眠일 수도 있다. 자발적으로 하기 힘든 기공을 자동적으로 하도록 하는 최면의 과정에서 집어넣은 대뇌피질에 `알 라뷔 화룬공’ 바이러스를 집어넣은 것은 아닌지? 법륜이란 유인물에 따른다면 거의 丹藥에 가까운 효과를 지니고 있는 바 믿을 수가 없다. 일단 한번 와보라고 했는데 가보지 않고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다.

타이뻬이역에 도착하여 다시 젊은이의 광장으로, 그리고 길에서 파는 쌀국수를 사먹었다. 맛이 좋았다. 그러나 양이 적다는 느낌이다. 빙수를 사들고 호텔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하루종일 세숫대야만큼 땀을 흘린 듯하다가 샤워를 하니 개운하다.

자려고 하다가 夜市를 보려고 밖으로 나선다. 비온 후 토요일 저녁, 夜市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결국 아무 것도 사지 못하고 조개볶음과 딤썸을 사들고 호텔에 들어온다. 내일 출발한다하니 더럽고 만사가 여의치 못한 타이뻬이에 정이 들었는 지, 익숙해진 탓인지, 아쉽다는 느낌이 든다. 잠을 잔다.

▣ 홍콩으로 돌아가 결국 사마천의 사기 전질을 사다

마지막 아침. 할 일이 없어 뒤척이다 밖으로 나가 어제 보아두었던 짜장면을 파는 집에 가보니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초밥을 사다가 호텔에 돌아가 먹는다. TV에서는 내가 홍콩에 와서 처음 보았던 일본만화 `또도로’를 한다.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꿈을 그린 만화이다. 나는 이 만화를 보고 일본의 문화를 함부로 貶下해왔다는 자괴감을 맛보았다고도 할 수 있다. 과연 한국의 정신은 무엇인가 또 문화는? 머털도사와 아기공룡 둘리?

아침을 먹고 나서 급히 서점으로 달려가 또 책을 골라본다. `尙書今註今譯’과 `史記讀本’을 사들고 호텔로 돌아와 짐을 싼 후 CHECK OUT을 한다. 방에 아무 것도 없었으니 첵크할 것도 없어 그냥 拜拜.

타이뻬이 역앞, 전에 공항버스에서 내렸던 장소로 간다. 그러나 제대로 버스가 올 지 의문이고 시내를 한바퀴 돌면 공항에 늦지 않을까 하는 데 버스는 안 온다. 그래서 휘휘 둘러보니 驛 바로 옆에 中正機場가는 버스 터미날이 보인다. 공항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말없이 니들 알아서 잘해 봐라하고 홀로 그곳으로 가 버스를 탄다.

가는 버스에서 尙書를 펼쳐든다. 책에 보면 상서는 대부분 공문이며 秦이전에는 ‘書’라 했으나 漢初부터 ‘尙書’라는 말이 등장했는 바 그 뜻은 古代의 公文이다. 후세에 群經 중 하나라 하여 ‘書經’이라 칭했다 한다. 그런데 여태까지 나는 商書로 알고 있었다. 즉 商代의 문서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보면서 尙書라는 직책이 공문서 및 군명 등의 출납을 맡은 관직임을 확연히 알게 되었다. 禮部尙書 등은 예부의 공문서를 담당하는 직책이 되겠으나 命을 다룬다는 위치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현재로 치면 문공부 장관이 된다.

전하기로는 상서는 무릇 삼천여편에 달하였으나 공자에 이르러 제자를 가르치기 위하여 다이제스트版 백편으로 책정되었으나 여차저차하여 현재에는 이십구편만 남았다고 한다.

周書 牧誓編을 보자 ‘때는 갑자일 해가 떠오르지 아니한 미명에 주의 무왕 姬發이 일찍이 殷 도읍의 교외, 소치는 들녘에 이르러 맹서하노니…’ 8時甲子昧爽, 王朝至于商郊牧野, 乃誓 이 구절은 중국역사의 시작을 의미한다. 물론 그 이전도 역사는 있었으나 단편에 불과했다. 통상 한국사람들은 통상 牧野라는 지명의 固有名詞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나 한문으로 볼 때 소치는 들녘이라는 일반명사가 된다.

천명을 받아 역성혁명을 시작하는 위의 구절과는 역설로 대만의 국민당 정권이란 중일전쟁시 항일전쟁보다는 내전이나 일삼고 부패로 도배하여 민심이 이반하니 天命이 모택동에게 돌아가 결국 좁디좁은 臺灣으로 물러났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란.

드디어 비행기 출발, 홍콩으로 간다. 홍콩에 도착하니 모든 것이 깨끗하고 질서 정연하며 통관도 쉽고 시내로 들어가기도 수월하다. 아마 내가 살고 습관 들었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 이 글을 쓴다.

글을 쓰다가 결국 홍콩의 콘힐에 있는 商務印書館에 가서 史記 全冊을 샀다.

대만여행은 2000.08.10일~13일. 2000.08.16일 작성, 2006.06.13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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