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그에 대한 단상

며칠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아니 그것보다 오래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아내처럼 불면증은 아니다. 고3인 아들에게 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하라면서, 정작 우리는 좀더 자기 위하여 기를 쓴다.

아내는 불면의 밤을 두려워 하며, 내가 잠든 밤에 거실을 배회하고, 나는 베개에 머리를 눕히기 바쁘게 깨어나 새벽이 깨어나는 것을 바라본다.

아내는 뒤척이며 잠이 들지만 아침 늦게 일어나는 반면, 네다섯시간만 잔 나는 우울하고 불쾌한 하루를 맞이한다. 그리고 때때로 존다.

아내는 잠 못자는 자신을 내버려둔 채, 나 몰라라 잠든 내가 부러운 동시에 얄밉다고 한다. 나는 힙겹게 잠든 아내를 깨울 수 없어 아들을 깨우고, 아침을 굶고 출근한다.

전문가에게 불면증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을 때, 전문가는 “자면 된다.”고 했단다. 잘 수가 없어서, 물은 사람에게 그 대답은 희롱에 해당되지만, 불면증은 <자려고 하는> 의지와 <자야만 한다>는 강박에 기인하기 때문에, 자지 않으려고 하면 잠은 스스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잠을 자고 싶은데, 자지 않으려고 하는 욕구와 의지의 이율배반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남들은 잠이 모자라 껄떡대는 고2 때, 불면증에 걸렸다. 어머니는 수면제를 먹일 수는 없다며, 밤마다 매실주를 스텐 그릇에 꽉 채워 내게 주었다. 나는 한숨에 그것을 들이키고 오르는 취기에 잠이 들거나, 다시 한 그릇을 더 마시거나 했다. 그러나 술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피곤한 몸에 대한 의식의 반란인 불면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나는 의식을 피로하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 의식의 산보. 자리에 누워 나는 의식이 방을 나가 마당에 내려서고 골목을 지나 큰 거리로 가는 방식을 택했다. 나는 집 앞의 전봇대 그리고 길 위의 돌맹이, 밤 골목을 지나가는 쥐와 고양이, 심지어 비틀거리며 골목을 걸어오는 취객들, 그 모두를 상념 속에 그렸다. 좀더 뚜렷한 형상이 떠오르도록 돌의 질감과 취객의 얼굴에 집중했다. 때론 공중으로 날아올라 건물 옥상과 지붕들을 내려다 보기도 했다. 이러한 산보 과정은 의식을 피곤하게 했고, 쉽게 잠이 들곤 했다.

이러한 의식의 산보는 불면증이 사라진 후에도 계속되었고, 대학교 1학년 때 심심파적으로 펼쳐본 심령술 책에는 나의 <의식의 산보>가 <유체이탈>이라고 쓰여 있었다. 거기에는 <멘탈계>, <아스트랄계> 등의 단어가 쓰여 있었고, 각종 흑마술과 백마술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의식의 산보를 중단했는 지는 몰라도 그 이후 나에게 잠이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나의 잠의 질은 극도로 양호하여 죽은 듯 여섯시간만 자면 깔끔하게 깨어났다.

그러나 지금은 짧은 수면 시간 중에도 문득 깨어나 다시 자거나, 잠 속에서 조차 새벽이 나의 발치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때의 새벽은 회색이며, 혐오스럽다.

잠이란? 기억을 정리하기 위한 과정으로, 일상의 빠른 뇌파를 진정시켜 느리고 긴 파장으로 전환하여 뇌피질을 이완시키는 과정 등의 말들이 있지만, 나는 자아인 <나>를 상실하는 시간이라고 본다.

일상에서 전전긍긍 몸과 마음을 괴롭혀 왔던 <나>를 상실한다는 것은 잠이 주는 축복일 것이다.

<잠>을 갈망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잊고자 하는 욕구이며, 불면은 <나를 잊고 싶지 않다>는 <나>의 속삭임이며, 짧은 수면에서 문득 깨어남은 죽음(상실)을 무서워하는 <나>의 피로한 부활이다.

그래서 죽음이 가까워진 노인일수록 쉽게 잠들며, 문득 깨어나고 가물가물 조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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