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홍콩

감옥에 아무리 작다고 하여도 창이 없다면, 죄수는 더 이상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잊을 지도 모른다. 면벽을 통하여 인간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는다는 것은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 내가 홍콩지점을 들러 회의실의 창을 통하여 구룡공원의 수풀과 그 너머 폭 2쎈티로 보이는 바다와 홍콩섬을 바라 보았을 때, IMF의 한파가 휩쓰는 가운데 우기가 끝나고 여름이 오던 그 해가 생각났다.

에어컨의 냉기가 차곡차곡 쌓이던 사무실은 해고된 직원들의 빈자리들이 덩그라니 남아 있었고, 골방인 나의 사무실에서 서류를 들고 나와, 산이 바라다 보이는 창 가의 빈 자리에서, 더 이상 앞 날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자금수지표를 만들고, 무엇으로 돈을 만들어 이 많은 은행 빚을 갚을 것인가를 생각했다.

어느 날 답답하여 동전으로 점을 쳤다. 점괘는 천지비(天地否)였다. 괘사는 “비는 사람이 아니다”(否之匪人) 였다. 정말로 살아간다는 것의 무게는 버겁고 육중해서 살아있는 것인지 조차 모를 때, 간혹 창 밖을 보았다. 북회귀선 아래로 폭양이 작열하고 있었고, 그런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는 나를 만나곤 했으며, 아무리 곤고한 세월을 지낼 지라도 내가 어쩔 수 없이 인간이라는 것을 간신히 간신히 기억해 내곤 했다.

한번은 본사에서 임원이 와서 자신의 출장비를 아껴 나에게 점심을 사며, “이부장! 고통총량 불변의 법칙을 알아?”하고 물었다. 모르겠다고 했다. “지금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이부장이 인생에서 겪을 고통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지. 그러니까 지금 힘들다면 나중에는 좀 편해질 거라는 이야기지. 그렇게 위로하면서 살아가야지 어떡하겠어.”

위로하겠다는 임원의 이야기는 어쩌면 나를 더 괴롭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겪어야 할 고통의 총량은 얼마냐는 문제와 왜 개개인에게 부여되는 고통의 총량은 이렇게도 다른 것이냐 하는 쓸데없는 질문을 회사가 정상화될 때까지 끈질기게 곱씹어야만 했다.

버릇처럼 창 밖을 보았다. 때론 어둠이 쌓인 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형광등 불빛에 하얗게 떠오르는 낯익은 얼굴, 나였다. 그 얼굴에서는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얼굴에는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공허한 인생이 각인되어 있었고, 죽음보다 무의미한 삶의 조각들이 유리창에 부딪혔다가 반짝이며 내려앉곤 했다.

그 얼굴의 뒤로 텅빈 백색의 음영을 보며 퇴근시간이 훌쩍 지난 것을 불현듯 깨닫고, 직원들이 사라진 사무실의 등불을 하나씩 또깍 또깍 끈 후, 열쇠로 문을 걸어 잠그고, 텅빈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람들과 어둠이 살을 섞는 지상으로 내려갔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났다. 새로 이사온 지점은 커졌고 활기가 감돌았다. 나는 회의실로 들어가 창 밖을 내다본다. 밤이 다가오고 나의 얼굴이 하얗게 유리창에 떠오르지만, 홍콩의 건물들의 빛과 네온싸인이 다시 내 얼굴을 희미하게 지웠기에 나는 나를 직면할 수 없었다.

새로운 사무실에서 맞이하는 홍콩의 풍경은 눈에는 익었지만, 더 이상 나와 아무런 혈연을 갖지 못했고, 나는 아무런 애착을 느끼지 못한다.

이제 나는 머나먼 타국 땅에 단순히 비즈니스를 하러 온 사람일 뿐이며, 이 좁다란 포구 도시는 이문과 손실을 주판알로 타닥타닥 튀겨대는 동방명주일 뿐,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아안녕, 안녕, 홍콩

출장을 다녀온 후로 정신적 고통 못지 않게 육체적 고통총량법칙이라도 있는 듯 목이 뻣뻣해졌고 통증 때문에 오른손을 제대로 들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침을 맞고 약간이나마 목과 팔을 운신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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