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정이라는 영화

나는 고향이 부산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급할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시작될 뿐이다. 나의 기억은 서울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 도시에 살면서 때로 황사와 기름가루들로 들뜬 봄바람을 맞으면, 유년의 기억으로 하염없이 내려갈 때가 있다.

어린 나의 동네에서 큰 길로 나가면, 플라터너스가 잎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는 경복궁의 서편 도로 였다. 큰 길이라고 하여도 늘 짚차가 도로 이쪽에서 저쪽까지 몇대 달리고, 한참을 기다려야 도라무깡을 두드려 만들었다는 시발 택시가 달콤한 개솔린 냄새를 뿜어내며 시발시발 소리를 내며 우리 앞에 서곤 했다. 건물은 낮아 봄이면 아지랭이가 도로 끝에 늘 보였고, 아지랭이를 가르며 전차가 댕댕거리며 우회전하여 그 길로 들어서곤 했다.

그 봄, 어머니가 정성껏 풀먹여 다려준 인조견 셔츠 속으로 스며들고, 반바지를 입어 허벅지를 간지르던 그 봄바람이 얼마나 부드럽고 깔끔했던가를 기억할 수 있다.

그때 서울의 인구는 삼백만이 채 안되었다.

나에게 <모정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이라는 영화는 과거로 회귀시키는 힘이 있는 영화다. 영화는 그 자체로 현실이며, 하나의 시간의 압축기제이기 때문이다. 조각난 사진들이 1/24초로 시간을 결합하여 새로운 현실과 추억과 몽환으로 이끈다. 챠르륵거리며 보여주는 이야기만 아니라, 현재와 추억의 교량 역할마저 한다. 모정(慕情)은 오랜 시간의 여울 속으로 되돌아간 느낌마저 들도록 해주는 그런 영화이기도 하다.

며칠 전 리뷰로그에 모정이라는 영화를 올리며 보고 싶다고 썼더니, 이웃분 달구님께서 어디에 가면 구할 수 있다고 하여 후닥닥 가서 다운을 받아 놓았다가 밤잠을 줄여가며 간신히 볼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이 영화에 나오는 제니퍼 존스를 좋아했다. 그녀의 모습이 동양적이며, <제니의 초상>에서 보여주던 아련한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고 했다. 나는 <무기여 잘 있거라>, <세계를 그대 품 안에> 등을 보면서 그녀가 예쁘다는 느낌을 갖지는 못했다. 반면 이 영화에서 기자로 나오는 윌리엄 홀든이 남자로서는 참으로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정이라는 영화에 대해서도 그다지 좋았던 기억은 없었다.

홍콩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던 내게 아버지는 모정에 나오던 리펄스 베이를 가 보라고 하셨다. 식구들이 오기 전 홀로 그곳의 백사장에 홀로 앉아 모정을 기억하려고 하여도 해변을 둘러싼 높다란 아파트며, 건물들로 도저히 예전에 보았던 조용한 해변을 떠올릴 수 없었다

서울로 귀임 발령이 나서 되돌아 오기 얼마 전, TV에서 8시에 모정을 한다고 하여 그 시간에 TV를 켰더니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 8시란 시간이 일본의 TV 프로그램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미 영화의 한 시간이 시차 때문에 날라가 버렸고 나는 단 두 컷의 홍콩의 풍광을 볼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본 모정에서는 홍콩의 중심가를 저공으로 활공하는 화면에서 부터 시작한다. 무대는 중국의 공산화와 함께 중국난민이 몰려드는 1949년이지만, 촬영한 시점은 1955년이다. 빅토리아 하버의 서편에서 상환을 지나 쎈트럴과 깜종을 지나는 화면에는 지금의 마천루는 없고 좁아터진 길과 이삼층의 야트막한 창고와 집들로 가득하다. 그리하여 홍콩의 풍광은 옷을 벗은 듯 자연스럽고, 현재의 빅토리아 하버보다 홍콩 구룡 사이가 넓어보였다. 그러니까 약 50년전의 모습인 셈이다.

홍콩은 오묘하여 화려한 마천루가 보이는 그 지점을 떠나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적하며, 때론 50년을 소급해 들어간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아마 그런 풍광들이 영화의 장면 속에 끼어들면서 시간의 여울목을 만들고 과거로 소급해 들어가도록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거친 개혁보다, 과거의 모나드를 함장한 부드러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은, 수십년 간 떠나 있었던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넓다란 아스팔트가 끝나는 지점 어디엔가에 오래된 당산나무나 그늘이 넓은 떡갈나무가 있음으로써, 그 밑에서 잣치기를 했거나 비석치기를 하며 놀았다는 것과 장에 가신 어머니를 나무그늘 밑에서 달빛이 교교할 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을 추억할 수 있음으로써, 고향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으며, 스무발자국을 가면 순심이네 집이며, 해소기침을 내뱉었던 봉구네 아빠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제니퍼 존스는 중국과 영국인 혼혈 여의사인 닥터 한수인으로 나온다. 그녀는 미망인이며, 영국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중국 국적을 가지고 영국의 식민지인 홍콩의 종합병원에서 외과의사로 활동하지만, 중국의 전통을 따르고 숙명에 대한 강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젊은 의학도이면서도 점을 치러 가거나, 미신을 믿는다.

그녀는 병원이사의 집에서 열린 만찬에서 특파원인 마크 엘리어트(윌리엄 홀든분)을 만나게 된다. 마크 엘리어트는 유부남이지만, 한수인은 그와 리펄스 베이로 수영을 가게 된다. 리펄스 베이에 있는 한수인의 친구의 집에서 보이는 홍콩 동편의 풍경은 바다와 섬들이 그려내는 남지나해의 고요함이 담겨져 있다.

그 고요한 정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전에 자신이 미망인이며, 혼혈아이기 때문에 자신을 좋아하면 안된다고 했던 한수인은, 친구의 집을 벗어나 해변에서 자신이 엘리어트를 사랑하며, 모든 것을 그의 뜻에 따르겠다고 한다.

이러한 복종이 굴종처럼 느껴질 지는 몰라도, 영화에 나오는 한수인의 모든 모습에는 깊이를 잴 수 없는 품위가 있다.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 우리가 헐값에 팔아버려 이제는 도저히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동양적 덕목과 자존심을 갈무리하고 있어서 인지도 모른다.

나는 제니퍼 존스의 눈 속에서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그 아름다움이 뭔가를 이제 간신히 찾아낸 것 같다. 그녀의 눈은 세상에 대한 신비가 가득한 채, 약간의 두려움도 있으며, 행복으로 범벅된 눈빛을 떠올릴 수 있는 여자였던 것이다.

그녀는 등을 똑바로 펴고 섬세한 손길로 사랑을 감지해 낼 수 있는, 아름다운 여성을 구현해내는 데 탁월한 배우였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지도 않으면서도 허리우드의 은막의 찬란함 속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배우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수인이 중경으로 올라가 집안의 어른으로 부터 엘리어트와의 혼인을 허락받았지만, 엘리어트는 본처와의 이혼에 실패한 채, 그만 한국동란에 종군기자로 떠난 후, 전장에서 죽고 만다.

병원 뒷산, 그들이 늘 만나고 헤어졌던 나무(아래 사진 참고)에 올라가 그녀는 엘리어트의 영혼이 날아온 듯한 나비를 보고 “우린 무엇 하나 놓지지 않았오. 진실로 아름다운 사랑을 누렸오”라는 그의 마지막 그의 편지를 기억할 때,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의 노래가 나온다.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
It’s the April rose
That only grows in the early Spring
Love is natures way of giving,
A reason to be living,
The golden crown that makes a man, a king
Once on a high and windy hill,
In the morning mist, two lovers kissed
And the world stood still
Then your fingers touched my silent heart
And taught it how to sing
Yes, true love’s a many splendored thing

4월의 장미처럼 초봄에 피어 난, 사랑은 아름다워라. 사랑은 삶에 의미를 주는 자연의 섭리, 범부를 왕으로 만드는 황금의 왕관. 바람부는 높은 언덕에서, 아침 안개 속에 연인이 입맞추네. 세상도 숨을 멈추네. 그대 손이 와닿아, 내 고요한 가슴 노래하네. 진실한 사랑은 아름다워라.

참고>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

This Post Has One Comment

  1. 쏘울

    1. 병원 뒷산, 그들이 늘 만나고 헤어졌던 나무(아래 사진 참고)에 올라가 <-- 사진 찾는다고 두리번 거리다가 눈비비고봐도 못찾았슴돠. 2. 리펄스 베이에 대한 여러가지 모습의 잔상이 남겨진 묘사가 한편의 잔잔한 수필을 보는듯 하고요. 3. 리펄스 베이를 가보라고 하신 아버님의 모습이 상상 불가 : 제 부친은 농부셨던지라 이런 문화적인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은 다 그런가 보다 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답니다 ㅠ.ㅠ 4. 여인님의 섬세한 필력이 부럽기만 합니다. 앗...그러고 보니 2005년에 쓰신 글이군요. 아무튼 리펄스 베이에 대한 멋진 내용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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