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탁에 취하여

莊子를 읽다 보면 홍탁이 생각난다.

홍어에 탁주란 말이 아니라, 이것을 그리기 위하여 저것을 그리는 방법이다. 피차상대(彼此相待)라고 이것이 있어야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야 이것이 있다는 제해(齊諧)적인 사고야 말로 동양화에서 여백을 그리기 위하여 산을 그린 것인지, 산을 그리다 보니 여백이 있는 것인지 알송달송한 것이다.

홍탁이란 홍운탁월법(烘雲托月法)의 준말이다. 내(연기)를 그림으로써 달이 저절로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다.

홍탁은 브리하트 아라냐카 우파니사드의 Neti Neti(아니다 아니다)적인 방법은 아닐 것이다. 모든 분별력을 사라지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Neti Neti는 결국 Tat tvam asi(그것은 바로 너다), 즉 진아에 이르겠지만, 홍탁의 화해적인 상즉상입과는 다를 것이다.

혜자가 장자에게 대뜸한다는 말이,

“거기는 우째 씨잘떼기 없는 것만 그렇게 말하고 그요?”

장자가 말하길

“씨잘떼 없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씰데있는 것을 야그할 수 있는 것 아닌 감. 그랑께 말씨, 땅이란 것이 넓지 않다고 할 수 없고 무쟈게 크지 않은가배? 근디 사람한테 꼭 거시기 한 곳은 발 디딜 곳만 있음 되는 것 아니겠남. 그래서 말이야… 발 디딜 곳 만 냄겨 놓고 나머지는 황천까정 왕창 후벼 파내 뿔면 그려도 사람이 그 땅을 쓸만하것는가 이 말씸이여?”

혜자가

“그럼 어디 쓰간디…”

장자가 막음질 하길

“그랑께 씨잘떼기 없는 것의 쓸모란 것이 똑바라지게 뵈여뿔지?”

(장자의 잡편, 外物)

그러하니 이 비루한 삶도 삶을 그리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그리려는 것일지도 모르며, 죽음이 있으니 사는 것 있고 사는 것 있으니 다 죽음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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