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에서 주절거리다

요즘 블로그를 하다보면 때론 직원들이 들여다 볼까봐 글쓰기가 주저스러운 때가 종종 있다. 간혹 자리를 스쳐지나다 보면 할 일 없는 직원이 나의 블로그를 열어놓고 들여다 보거나, 함께 담배를 피우며 “부장님의 블로그는 너무 어려워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재밌다거나 감동 먹었다는 소리는 절대 안한다. 때로 “아는 것이 없어서 잘 이해를 못하겠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는 것이 없어서 이해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디 글 쓰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글도 느지막히 배워서 그런 것이다. 요놈들아!”하고 말하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누가 글을 어렵게 쓰고 싶겠느냐만, 쉽게 쓰면 내 글과 생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가 그대로 들통이 날 것 같다는 강박과 국어 문법에 대한 나의 몰상식, 타인에 대한 배려의 부족 등이 뒤섞여 나의 글은 근사하게 어려워지는 것이다. 알았느냐! 이 친구들아! 이제 내 블로그 그만 들여다 보고 일해라. 일 쫌 해!

오늘 기쁜 일과 서글픈 일이 있었다.

친구가 대졸자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어하는 회사의 부사장이 되었다. 기쁜 것은 놈이 친구란 것과 앞으로 우리의 술값 부담이 약간 줄어들 수도 있다는 것이고, 서글픈 것은 마누라가 기 죽는 것이다. 그리고 회사의 친한 후배 부장이 바르셀로나지점으로 간다며 전화를 했다. 나는 에스파냐의 태양이 투우장의 붉으스레한 먼지 위에 드리우며, 캐스타너츠의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맞춰 굽높은 신발로 탁자를 두드려대는 플라멩고를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회사에 바르셀로나 지점이 있었어?” “물론 있지요.” 이것 또한 집에 가선 말 못한다. 그런 좋은 자리있으면 왜 못가느냐고 하기 때문이다. 난들 가기 싫어서 안가는 것은 아니잖아? 내가 내 멋대로 가고 싶은 부서나 지점으로 인사발령 내는 것도 아니구 말이야.

그리고 오후에는 은행으로 가서 대출연장 신청을 했다.

은행에서 돌아와 나의 사는 것을 돌아보았다. 나의 삶은 사분의 사박자도 사분의 삼박자도 아니라 지멋대로이다. 주제도 없고, 구심점도 없는 삶.

어제는 길 건너편에 있는 선배와 식사를 했다.

만나자 마자 나의 배를 보고 “요즘은 살찌면 사람들이 누추해 보이더라”고 했다.
나는 “게다가 담배까지 못 끊으면 막사는 사람 취급받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막사는 놈이지요.”

선배는 그 말에 한동안 헛웃음을 웃더니, 맞아 맞아 하고 점심을 사주었는 데, 막가는 놈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양이 적었다. 그래서 오후 내내 배가 고팠다.

한동안 사람이 살아가며 다기한 행동을 하고 순간 순간 다양한 결실을 거두며 살아가는 데, 결국 그 삶을 하나로 포괄하는 중심점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그러니까 한 인간의 삶의 진정한 중심 말이다.

결국 나의 삶의 중심을 휘감아 흐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늦은 퇴근 무렵, 썰렁한 사무실을 바라본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 철거덕거리는 지하철에 올랐을 때, 요즘 나를 사로잡고 있는 종교나 영혼에 대한 사념들이, 생의 중심에 대한 나의 의문에 또 겹쳐지기 시작했다.

나의 전반은 기독교적인 열정 속에 빠져 있었고, 비록 간교하긴 했을 지 몰라도, 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듯 편안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主를 향하고 있었고 나는 그의 자녀였기에 고난도 당신이 당신의 피조물을 연단하기 위한 시련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독교는 거룩하다. 세상의 만물이 주이신 하나님 쪽으로 가지런하고 만사와 만물의 중심에 <신>이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어떠한 철학보다 견고할 뿐 아니라 이해가 용이하다. 또한 그 믿음과 율법을 만사에 두루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삶의 지침이 되고 심령에 안위함을 줄 수 있다.

초기의 교부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220)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했으며, 또 “이해가 되어 잘 알 수 있다면 믿을 것이 없지마는 이해가 되지 아니하여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믿는다”고 했다. 이러한 강팍한 믿음(피스티스)에 대하여 나의 속성은 값싸고 천박하기는 하여도 그노시스적인 것이었다.

세상과 신과의 열정적인 관계맺음 속에서 터툴리아누스의 아그노시스(불가지)적인 것에 대한 불만으로 부터 나는 우파니사드적인 범아일여에 매혹되었다. 아트만과 브라흐마의 혼효함, 삼마디를 통한 존재(Sat)- 의식(Chit)- 열락(Ananda)을 체득하고 유일 절대로 흘러들어가 하나가 되는 것, 眞我(Atman)을 발견할 때, 삼라만상에 깃든 梵天(Brahma)과 합일한다는 이 오의서는 몹시도 매력적이었다.

이러한 범아일여의 사상은 아리안의 극도로 사변적인 인명론을 바탕으로 한 종교의 사변적 진화이지만 그 사색의 깊이만큼 종교적 열정은 적정 속으로 깃들고 만다.

종교적 진화의 궁극의 단계는 바로 불교. 아트만이고 자시고 간에 내가 사라지면 범천도 사라지고 만다는 범신론의 초극, 온갖 세계의 중심은 텅빔(空 Sunya)으로 가득 차 버리고, 결국 깨달음 밖에 현현하는 것이 없다는 절대적인 그노시스. 그래서 생이 깃들 중심이 없어 윤회를 끝내거나 육도를 전전하는 그러한 것이 지하철의 바퀴처럼 내 머리 속을 털털거렸던 것이다.

아아! 나의 생의 중심이여…

이 도표는 논리적인 차원에서 도식화한 종교의 진화단계인 바, 특정 종교가 지닌 신 그리고 진실과 진리의 차원과는 상관관계가 없음

This Post Has 4 Comments

  1. 흰돌고래

    으아.. 잘 읽어 보았는데에에..
    저는 무신교였다가 유일신교였다가 범신교로…(?)
    다시 무신교가 될 것도 같고…=.= 더 많이 배워야 겠어요. ㅎㅎㅎ

    1. 旅인

      정신적으로 진화하시는 건가요? 아닌 종교적 취향이 바뀌시는 건가요?^^

    2. 흰돌고래

      아 어려운 질문인걸요!
      취향이 바뀌는 것 같지는 않고..
      다만 조금씩 알아가면서 생각이 왔다리 갔다리 하는 것 같아요^^;;

    3. 旅인

      저는 종교에 대한 관심은 많은 반면, 아무 것도 믿지 않지만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좋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흰돌고래님처럼 숙고하는 자세도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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