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도서관 밖에서

언어의 저항, 드문 드문 아는 타국의 언어 속에서 소외의 고통을 겪었다. 두시간 반 동안의 침묵에 입은 텁텁했고, 정지된 입에 뭔가 사역할 꺼리를 주어야 했다. 지하철의 자판기에 천원 지폐를 넣고 오백원 동전을 받았는 데 결국 껌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오백원의 안타까움으로 자판기 앞에서 오분정도 이짓 저짓을 하다가 조금만 더 있으면 완전히 바보가 될 것이란 생각에 그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다.

아홉시 반, 지하철은 한산했고 오랫만에 책을 꺼내고 엠피쓰리의 이어폰을 꺼내 음악을 들었다. 아마 Isist님의 포스트에서 본 내용이 맞는다는 것은 질 뒬르즈의 글은 소주 한병이 감당할 수 없게 어려웠지만 음악은 바벨의 그늘을 벗어나 뚜렷한 떨림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술은 무의미한 차이에 대하여 관대했기에 음악의 제목이나 작곡가 등의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들을 무시한 채, 음악 그 자체로 다가가게 했고 아주 포근하게 그 소리에 취하게 했다.

잠시 졸았고, 깨어났을 때 <마녀님의 오두막>에 쓰여진 중세와 고전 음악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글로 전달하기가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절감하였다.

인간들이 명료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의 관념일 뿐이며, 관념이나 개념을 떠나서 꽃이나 바람, 이런 모든 것에 대하여 절대로 명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자신의 관념에 대해서 조차 타인에 대해서는 모호하다는 것, 그래서 오늘 내가 맞이한 언어의 저항은 늘 생활 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갈등으로 자리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야 말았다. 그 갈등의 수용방식에 따라 대화가 통하거나 아니거나 일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isists님의 글에서 본 마이클 커닝햄이 말한 음악의 우주적인 보편성에 대하여 공감이 가지만, 반면에 그 보편성은 감정의 보편성이지 결코 오성의 보편성이 아니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것은 질적인 면에서 차이는 있을 지라도 커피 한 잔이 가지는 맛의 보편성, 그 감정과 감각의 보편성의 범주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없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감정과 감각의 보편성에 비하여 오성과 이성의 보편성을 우선시하고 언어에 커다란 권위를 둠으로써 우리를 바벨의 그늘 아래에서 헐벗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주 한병을 먹고 이렇게 헷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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