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토요일의 식은 단상

이웃 블로그의 <호미>라는 아이디는 좀 갈증을 느끼게 하는 단어이다.

地山謙

天澤履

이 호미라는 단어는 주역을 읽었다는 사람들에게는 주역 마지막 괘인 <화수미제>에 나오는 어린 여우가 냇물을 거의 건너가려 할 때 그 꼬리를 적신다. 1小狐汔濟濡其尾 에서 나오는 여우꼬리로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천택리>에도 나온다. 범의 꼬리를 밟아도 사람을 물지 않는다 2履虎尾不咥人 라는 범의 꼬리이다. 이 리(履)괘는 사람이 신는 신을 의미하며 또 예의 근본을 가르킨다. 나는 덕의 자루라는 <지산겸>으로 넘어가본다. 지산겸은 천택리의 음화(陰畵)처럼 양효는 음효로 음효는 양효로 바뀌어 있는 대괘이다. 겸괘는 겸손을 가리키며 귀신은 찬 것을 해치고 겸손한 것을 복으로 삼는다. 사람이 사는 것은 차는 것을 미워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한다. 겸이란 높고도 빛나며 낮아도 넘을 수가 없다. 3鬼神害盈而福謙 人道惡盈而好謙 謙尊而光 卑而不可踰 고 겸손에 대하여 극찬하고 있다.

“사람은 모름지기 겸손하여야 하나니라”하고 어르신들이 말씀하시지만, 외면적 형식인 예절은 따를 수 있어도 내면의 심리적 상태인 겸손은 자신의 의지대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겉은 겸손하여도 안은 늘 교만으로 가득할 수 있다. 사람이 겸손 하려면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긴 하여도 거기에는 자애를 바탕으로 한 타인과 세상에 대한 경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자애가 없다면 질투와 시기가 가득할 것이며, 스스로 낮추는 것이 아니라 단지 비굴일 뿐이다. 이러할 때 비굴보다는 교만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내가 겸손한 척하는 것은 비굴의 한 양태일 뿐이며, 자애가 불모한 내면의 척박한 대지에는 그 뿌리를 찾을 수 없는 교만이 자라고 있다.

평탄한 대지(地)에 산악과 같은 뜻(山)을 감추고(謙) 하늘의 도리(天)를 비추는 호수(澤)같이 매사를 실행(履)해 나간다면 몹시 위태로운 경우(범의 꼬리를 밟다)를 만나도 온전할 것이라는 것이 고대인의 백과사전인 <주역>에 나타난 애매모호한 잠언이다.

신입사원 면접이 끝나고 난 후 내부 업무를 볼 여유도 없이 워크 샾을 일박이일로 또 갔다. 이제 나의 게으른 시절도 타의에 의하여 종쳐버렸다는 생각이 들 뿐이며, 삼사 일의 행사로 심신은 피곤해졌기에 집으로 돌아와 몸살끼로 낮잠을 자고 난 후 일어나 이름없는 명상록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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