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강의(움베르토 에코)

문학이라는 것이 이 흐린 세상을 건너는 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며, 문학이라고 통칭되는 것들을 돌아볼 기회를 잊은 지 이십년 쯤 되었기에 <문학강의>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문학이란 어떤 정보나 이야기를 수사학적으로 포장하는 기능으로 폄하해 왔었기에 문학작품을 대할 때, 문장에 매료되면서도 늘 문학이라는 지평 너머에 있을 작가의 사유의 세계를 늘 생각하곤 했다.

그러니까 나는 문학을 學으로 생각하기 보다 글하는 기술(文術)로 생각했다. 이러한 협애한 생각을 국문과 혹은 어문계열의 학생이나 교수가 볼 때, 비난받아 마땅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직도 문학을 學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우습게도 나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을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법>을 사려고 서점에 들렀다가 결국 그 책을 찾지 못하고 꿩 대신 닭,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강의>라는 이 책을 샀던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라는 학자의 위치란 참으로 애매하다. 그는 기호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한다. 그런데 기호학이라 하면 나는 도상학을 늘 떠올린다. 그러나 소쉬르는 기호학을 ‘사회 내에서 기호들의 삶을 연구하는 과학’이라고 했으며, 모든 사회적 삶은 언어에 의해 매개되고, 언어는 기호(sign)와 표상(representation)의 체계로서 코드(code)로 배열되고 다양한 담론을 통해 드러난다고 현대의 기호학에서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기호학은 기호 그 자체와, 기호가 조직화되는 코드와 체계, 그리고 이들 코드와 기호가 작용하는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기호학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은 텍스트에 있다. 그 텍스트들을 바라보는 자가 바로 움베르토 에코이다. 그러니까 그는 문헌학자인 동시에 문화비평가적인 위치에서 소설을 쓰면서 문학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문학강의>가 아니다 는 <문학 상 의 움베르토 에코>라고 할까? 연설문과 단상, 수필적인 요소들이 뭉뚱그려진 이 책에서, 학자란 독서인이라는 점, 그리고 범인을 넘어선 무수한 재기를 간직한 채 광범위한 사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통감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이른바 천재들의 특성을 가지고 있겠으나, 그것을 능가할 정도로 광범위한 독서를 통하여 사유를 집적해 나갔다는 것을 이 책은 시사하고 있다. 이 책이 진리를 던져주지 못할 지라도 무궁한 상식의 끝자락은 보여주고 있다. 그는 사만권의 장서를, 읽었던 읽지 않았던 간에, 소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독서 카드를 작성하면서 스스로 훌륭한 유산을 축적해 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불과 수백권의 한정된 책을 읽고 문학에 대하여 씨부리는 자들에 비하여 그는 수천권을 읽었을 것이고, 세월을 지니고 켜켜로 삶의 단층에 문학이라는 것이 압착되어 가라앉아 있기 때문에 그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는 함부로 무시할 것은 못 된다.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모순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독서와 사색의 기회를 철저하게 박탈하는 데 있으며, 교과서와 참고서 그리고 외국어 등과 함께 한 내신 등의 하찮은 것으로 발랄한 청년의 사색을 가둬버린다는 비극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천재성은 뭐 할 수 없다고 치자. 그러나 그만큼의 독서량을 지닌 학자의 존재에 대하여 우리의 교육 현실과 학자들의 지식의 축적도는 뭐라고 이야기할 것인가?

이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강의>를 읽으면서 이 책은 어떻소 라는 식으로 서평을 쓰고 싶진 않다. 열권의 책을 읽고도 이보다 훌륭한 책을 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운칠기삼이라고 했던가? 70%의 재수와 30%의 실력이 고스톱의 판세를 결정한다면, 움베르토 에코는 독칠사삼(讀七思三), 어디에서 읽은 것 70%, 자신의 생각 30%를 섞어 이 책을 썼다. 이러한 저작방식은 인간의 기억력과 출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엄청난 공력을 필요로 하며, 다양한 지식을 통합하여야 하는 만큼 몹시 힘들다. 그리고 한 인간의 제한된 사고보다 다채로우며 다양한 지식을 제공한다. 반면 방대한 지식의 더미를 소화하지 못하여 혼미하게 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문학에 대한 뚜렷한 정의나 문학하는 방법에 대하여 배울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산일 것이다. 오히려 더욱 더 문학이라는 것에 대하여 혼미하게 하고 문학이란 것이 몹시 방대한 것이라고 느끼게 되거나 읽다 보면 아예 무엇을 읽고 있는 지 놓치기에 아주 적절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고자 하는 독자의 요구와 무관하게 아무런 결론 없이 교활하게 빠져 나간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아주 오래된 도서관에서 맞이하는 낡은 책 더미와 냄새, 귀퉁이에 낙서가 적혀있는 마호가니 책상 위로 떨어져 내리는 가을 햇빛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도서관을 빠져 나와 낙엽이 지는 뜰을 맞이했을 때 불현듯 다가오는 내용 없는 지적 충만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강의가 얼마나 맹물 같은 혼미의 광채를 발하는 가를 각 장의 말미에서 보기로 하자.

나는 <운명>과 죽음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문학의 주요기능들 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아마 다른 기능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내 머릿 속에 떠오르지 않는군요.【 문학의 몇 가지 기능에 대해 】

만약 원한다면 「천국 편」을 그렇게 읽을 수도 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절대 나쁘지 않을 것이며, 현란한 황홀경의 디스코텍보다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황홀경에 관해서는 단테의 세 번째 노래 편이 그 약속을 지키기 때문이다.【「천국 편」읽기 】

마르크스의 훌륭한 고전적 교양으로 보건대, 그는 바로 그런 텍스트들을 기억했으리라는 것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공산당 선언』의 문체에 대해 】

와일드는 단 하나의 아포리즘에 대해서는 맹세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거기에다 삶을 걸고 도박을 하였다. <모든 예술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다.>【 와일드: 아포리즘과 역설 】

여기에서 그 도서관은 무한한가 아니면 불확정적인 규모인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책들의 숫자는 유한한가 아니면 무한하고 순환적인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입니다. 바벨의 도서관의 진짜 영웅은 도서관 자체가 아니라, 그곳의 독자, 새로운 돈키호테입니다. 그러니까 유동적이고, 모험적이고, 지칠 줄 모르고 창조적이며, 연금술처럼 조합적이고, 풍차를 지배하여 무한하게 돌아가도록 만들 줄 아는 독자이지요.【 라만차와 바벨탑 사이에서 】

상징의 방식은 마침내 우리가 어떻게 하더라도 해독하려는 의지마저 상실하게 될 곳에 존재합니다.【 상징에 대해 】

그러므로 문체의 개념, 진정한 비평의 개념, 텍스트 전략의 분석 개념에 대해 그 기원부터 확고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훌륭한 문체 기호학이 하고 있는 것은 우리 대가들이 이미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임무는 어떠한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진지하고 지속적인 작업을 통해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문체에 대해 】

그렇지만 분명히 텍스트에 고뇌가 있는 만큼, 독자는 우리의 고뇌보다 앞서는 상호텍스트성의 속삭임에도 염두를 두어야 하며, 또한 작가와 독자는 세속적 <글쓰기들>의 신비 속에서 하나로 결합될 줄 아는 것도 필요합니다.【 상호 텍스트적 아이러니와 읽기의 층위들 】

결국 교양 있는 인간의 첫 번째 의무는 매일 백과사전을 다시 쓰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 입니다.【 거짓의 힘 】

글이란 오로지 어떤 <독자>를 위해 쓰는 것이다.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쓴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는 놀라울 정도의 무신론자이다. 엄격하게 세속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그렇다.불행하고도 절망적인 사람, 미래의 <독자>에게 말을 건넬 줄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 】

그러니까 움베르토 에코는 유쾌하면서도 엄격한 자라는 것을 이런 색깔의 글들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 마디 더 한다면 또 어렵고.

참고> 문학강의

This Post Has 2 Comments

  1. 서정적자아

    아… 저 이책 구하려고 무지 헤맸는데…
    저는 못 읽었어요. 이미 절판이 되었더라고요. ㅜ.ㅜ

  2. 여인

    읽으라고 권해줄만큼, 또 에코 나름의 문학에 대한 탁월한 견해가 드러난 것도 아닌 책입니다. 안 읽어도 될 책이니까 너무 섭섭해 마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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