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의 대화

부생육기를 읽은 후, 아내가 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책꽂이에 꽂아두기로 했다. 그것은 심복처럼 아내를 사랑하지 못했다는 미안한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책을 읽고 난 후 못난 남편에 대한 아내의 힐난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아내와의 대화란 힘들다. 그것은 애인에 대한 헌신이 사라지고, 신혼의 달콤함이 어느 날 아내의 치마자락에 묻은 김치국물과 함께 사라져 버리지만, 이와 같은 중대한 사건에 대하여 남자는 침묵 속에 비밀로 하고 생활이라는 간교한 틀 속에 아내를 가둬두고 봉급을 벌어다 식구들을 부양한다는 위대한 명분 위에 자신을 위치시킨 다음, 세상의 모든 피로감과 무뚝뚝함을 이끌고 집으로 퇴근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날이 지나면서 문득 어느 날, 마주 앉은 부부 사이에 말 할 거리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느끼게 되고, 남편은 TV나 신문을 바라보고 아내는 자식을 득달하며, 김치 맛이 짜거나 싱거워도 남편은 맛에 대하여 침묵하지만, 아내의 설거지 소리는 더욱 시끄러워질 뿐이다. 이것이 행복한 결혼 생활의 과정이자 세상의 남편과 아내가 맞이하는 불행한 사태이다.

아내와 차를 타고 설악산을 가면서 우리는 오래간만에 몇 시간 동안 차창 밖의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때가 지났음에도 길 가의 나무들은 더 이상 광합성을 하지 못해 떨쳐버려야 할 나뭇잎들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고, 햇살은 차창에 부서지면서 점차 졸리운 은빛과 금빛으로 변해갔다. 아내와 나는 때로는 침묵과도 같은 대화를 조금씩 풀어나갔다. 그 대화들은 오랜 세월 동안 퍼 올리고 또 퍼 올려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는 것들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실증 날 정도로 긴요한 것들이었다.

집과 자식들에 대한 집요하고도 투명한 애착은 아마도 세상의 남자들이 아내에게 지는 빚일지도 모른다. 아내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햇빛과 나무들이 섞였다 갈라졌다 하는 도로를 바라보며 산 너머에 있을 목적지를 향하여 이정표를 맞추어가며 아내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을 빛이 오후가 되면서 더욱 깊어졌고 아내의 목소리는 가슴 속이 편안한 듯 낮고 조용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피곤했기에 잠시 낮잠을 잤고, 깨어나 온천을 들른 뒤 대포항에서 식구 모두가 먹어도 될 만큼의 회를 떠다가 아내와 나 단 둘이서 소주와 함께 먹었다.

아내가 나보고 현명하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그 현명함 뒤에 도사리고 있을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우매함과 우둔함에 대하여 아내는 이해하지 못한다. 현명함은 밝은 것이 아니라 약간 어두우며 직접적이지 못하여 간접적이며 사물의 움직임을 조용히 기다리기 때문에 그 속성이 아둔한 것임을 아내는 모른다. 태우(泰愚 : 큰 어리석음)와 짝을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면, 큰 어리석음을 감내할 수 없는 나는 아내가 생각하는 만큼 현명하지도 못하다.

아내와 나는 십수년 간 같은 곳을 바라보아가며 살아가기에 너무나도 성격이 달랐다. 우리가 TV에서 같은 프로그램을 본 것이라곤 <모래시계>와 <대장금>, <내 이름은 김삼순> 정도 밖에 없다. 우리는 다른 프로그램을 방과 거실을 사이에 놓고 보았으며, 책꽂이에 꽂혀 있는 나의 책과 내가 듣는 음악을 아내는 원초적으로 혐오했다.

아내는 명료하며 또한 지배적이다. 아내가 보기에는 내가 아득한 혼돈 속에서 세상의 모든 쓸데없는 것들과 짝하며 말도 되지 않는 것들을 읽고 즐기며 아직도 몽상에 빠져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아내가 이기적이라고 나를 비난하는 것은 세상살이를 얼마든지 단순하고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음에도 내가 흐린 눈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 때문이리라.

흐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에 아내에게 세상살이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진흙탕 길을 저벅저벅 걸어가게 한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자식의 교육에 대한 집요한 열정, 집을 장만하기 위하여 허름한 옷을 감히 벗어던지지 못하면서도 남편의 옷을 신경써야 하는 것들, 무심 속에 퍼질러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남편에게 내일이 어머니 생일이라는 것 알아 라고 묻게 만드는 나와 아내는 과연 한 곳을 바라볼 수 있는 가 하는 면에서 그간 십수년 간 같은 곳을 바라보았을 지는 몰라도 서로의 시야는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가을이 충만한 설악산에서 상경하는 길에 아내는 막국수, 나는 청국장을 먹고, 다시 차에 시동을 걸며 어느덧 차창 너머 바라보이는 가을 색은 같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손을 마주 잡은 채 아득한 세상을 건너고 있을 뿐이었다.

맛있었어?
괜찮은 데, 그냥 당신이 끓여주는 것이 나은 것 같아.
아까 길 가에서 산 배추로 김치를 담으면 맛있겠더라.
맞아! 그런데 저번 김치는 너무 했어.
김치 담고 그런 것들이 요즘에는 왜 그리 귀찮은 지…

1 thought on “아내와의 대화

  1. 유리알 유희 08.11.04. 23:12
    여행길의 대화, 싸움으로 치닫지 않앗으니 그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그러나 막국수와 청국장은 너무 했군요. 그거이 양보 좀 하지 그러셨어요? 무수한 끼니 중 한끼이거늘. 당신이 해 준 것보다 맛있더라.의 위안이 저번 김치로 인해 와르르 무너지니 부부라는 이름은 위안과 상처를 골고루 주는 존재인가 봅니다. 후후. 반낭만적이지만 집안대소사와 아이들을 잘 챙기는 아내, 좋지 않으신지요? 부담스러우세요?
    ┗ 이류 08.11.05. 11:09
    저희는 잘 안싸웁니다^^. 저희 아버지 어머니는 저보다 집 사람을 더 좋아합니다. 집 사람의 흠잡을 데가 별로 없는 것이 문제인데, 성격적으로 좀 이질적이죠. 음식점하면, 저는 맛있는 집, 집사람은 그럴 듯한 집. 여행하면, 아내는 호텔 아님 콘도, 저는 경치좋은 곳 가까운 곳의 민박 여인숙 다 오케이. 길을 가도 아내는 고속도로 최단시간, 저는 조금 늦어도 들이 보이는 국도길, 이렇습니다. 그래서 함께 여행가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제가 물좋고 산좋은 곳은 환한데 말입니다.
    ┗ 유리알 유희 08.11.05. 10:16
    실리와 낭만성의 충돌이군요. 근대 이류님은 팔불출? ㅎㅎㅎ 억울하다고요. 아내자랑 했잖수? 그럼에도 멋져 보이십니다. ㅜㅜ
    ┗ 이류 08.11.05. 14:27
    쪼매 그렇습니다. 엄처시하에서 살다보니 생존법칙인 것이지요^^!
    ┗ 유리알 유희 08.11.05. 12:09
    쪼매? 그 표현이 귀엽습네다. ㅎㅎㅎ. *얼능 뛰자~~
    ┗ 이류 08.11.05. 14:28
    본래 제가 그렇습니다.

    엘프 08.11.05. 15:06
    두분이 이질적이지만 그래서 상보적인지도 모르겠네요.^^ 실용적인 성향의 사모님덕분에 이류님이 맘껏 꿈을 꾸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또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더욱 꿈속으로 파들어가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좋은 글들을 남기시는 이류님은 그 빚을 아내에게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 나도 얼릉 뛰자~~~ㅎㅎㅎ 아 참~ 부생육기 읽어보고 싶었는데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기억해둬야징~^^*
    ┗ 이류 08.11.05. 16:20
    사신다면 을유문화사의 부생육기를 사십시요. 69년 초판이 나왔는데, 참 갈무리를 잘해놓아서 책에 약간 낡은 문체가 있기는 하지만, 아담한 책이었습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