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한 장 남지 않은 가을

책버러지…

책 읽기에 제격인 선선한 날씨, 이번 가을에는 어떤 책을 읽으셨어요?
마음에 와 닿았던 책 속의 가장 인상깊은 구절을 이야기해주세요~

나…

사실 어떤 책보다…
실은…

아주 오랜된 편지를 한 장이라도 읽고 싶다.

그러나 남아있는 편지는 한장도 없다.
그래서 나의 오래된 이야기들은 단지 옛날 동화나 소설처럼 아무런 실존적인 인과관계를 지니지 못한 채, 나의 기억 속에서 썩거나 아니면 발효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죽을 때 그 젊었을 때 이야기가 어떠한 결말을 가질 지는 나도 모른다.

헤어진 애인과 친구한테서 온 편지, 아니면 머나먼 고향에서 부모님으로부터 날아온 편지 한 장 남겨진 것이 없는 나의 이 가을에,

사연이 없는 데, 남의 이야기에 감동을 먹을 이유란 차마 없다.

나도 다락과 지하실로 내려가 소복하게 쌓인 상자의 먼지를 떨고, 뚜껑을 열어 색바랜 사진 옆에 우체국 소인이 찍혀진 봉투를 열어 아주 바싹 마르고 볼펜의 잉크가 세월 속으로 스며들어가 종이 속 깊숙히 번진 그런 편지를 이 가을, 뜨악한 한낮의 햇빛 아래에 한잔의 커피를 마시며 매콤한 담배연기에 쏘여 주체치 못하며 쏟아져 내리는 눈물 속에서,

아주 오래된 편지를 읽고 싶다.
비록 그것이 그녀로부터 날아온 헤어지자는 편지일 망정.

아니면 어디인가 멀리 밤을 새워 편지를 쓸 그리운 이라도 있다면
또 다른 날을 새우며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채집하고 또 날려보내련만.

이 버러지 같은 놈…

너 왜 날 슬프게 하는거냐?
씨이~
너 주글래?

그런데 가을이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말해봐라. 9월13일인지 아니면 10월 3일이었는 지. 아직도 은행잎은 지지 않고 있단 말이다. 그래서 이 가을에 무슨 책을 읽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여름에는 태백산맥을 읽은 것 같기는 하다. 이 가을에 무슨 책을 읽었는지도 모르는 데, 마음에 와 닿는 감동적인 글이 있겠는가?

하나 있다. (빌어먹을 오 자히르 중에서) 열차 선로의 폭이 143.5센티미터 라는 것이 몹시 감동적이었다. 그 폭은 성인이 선로에 가로로 떨어졌고, 기차가 지나간다면 죽기에 충분한 폭이며, 아이가 떨어졌을 때는 살아날 수도 있는 기적적인 숫자라는 것. 그리고 (김훈의 개에서) 강아지가 차지하고 싶어하는 어미개의 젓꼭지는 뒷다리 사이에 있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생존할 수 없는 자식을 어미개가 그만 잡아먹었다는 비극의 포만감. 그리고 개에겐 아기의 똥이 못견디게 매혹적인 냄새와 부드러운 맛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등이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이 가을 내내 가방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책들은 무엇이었지? 몇 권의 경영학 서적과 <부생육기>와 <전락>과 <적지와 왕국>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무지하게 어려운 책을 읽었었고 지금은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강의를 읽고 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무엇을 읽고 있는지 조차 모를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집에 4만권의 책이 있다고 한다. 부럽다. 에코의 소장본이었다면 값을 좀더 쳐줄지도 모른다. 권당 만원이라면 4억원이다. 4억원어치의 책이 놓여 있는 서재를 갖춘 집의 값은 얼마나 할까? 사만권의 책이라면 폭 1m의 6단짜리 책꽂이가 160개가 필요하다. 이 책꽂이들을 효율적으로 배치를 한다고 하여도 50평 이상의 면적이 필요하다.

이 또한 날씨가 쌀쌀해지고 기름값이 오르자 몹시 감동적인 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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