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의 경계선

중세는 아름다움을 (비례 외에) 빛과 색깔과 동일시하였으며, 그 색깔은 언제나 기본적인 색깔들로, 명암이나 음영이 없는 빨강, 파랑, 금빛, 은빛, 하양, 녹색의 조화였다. 거기에서 화려함은 외부에서 들어와 사물들을 감싸는 빛이나, 형상의 한계 이상으로 색깔을 부각시키는 빛에 의하여 결정되기 보다는, 전체적인 조화에서 나온다. 중세의 세밀화들에서 빛은 바로 사물들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듯하다.

<p33, 천국편 읽기 중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강의>

이 글을 읽을 때, 잘 이해가 되지 않았고, 중세의 그림을 단 한 폭도 구경해보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집의 화보집을 펼쳐들면 분명히 보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겠지만, 나의 뇌리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림을 그릴 때, 도화지나 캔버스를 무엇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그림은 차이가 난다. 데생을 할 때, 도화지를 종이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빛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좋다. 종이로 인식할 경우 우리는 형상의 경계선을 중시하게 된다. 도화지를 빛으로 인식하면 우리는 그림자를 그려나가는 방식으로 도화지에 사물을 부조해 나가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보티첼리의 그림 만을 보아도 움베르토 에코의 <빛은 바로 사물들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듯하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며, 다빈치의 그림에 반하여 미켈란젤로의 그림의 밝다는 것도 그들이 중세적 인식체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중세에는 밝음과 어둠이라는 이원화된 실체(속성?)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가르는 것은 하나의 경계선이며, 밝음과 어둠은 각각의 사물에 배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 근대에 들어오면서 밝음과 어둠은 빛과 그림자라는 광학적 차원으로 들어서며 그림자와 어둠은 단지 빛의 부재로 이해되고, 색상이란 빛을 흡수하지 않은 특정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림은 램브란트적으로 변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인 인식이 중세의 인식에 비하여 뛰어나다고 볼 수 만은 없다. 사물의 명료성은 크게 증대되었을 지 몰라도 선과 악, 빛과 어둠에 대한 경건한 묵상은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동양화에는 빛과 그림자에 대한 인식 또한 흐릿하며, 단지 경계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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