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와 왕국(까뮈)

이 책을 읽으면서 사막의 밤을 알았고, 거친 골목에서 들뜬 열기로 살아갈 수 밖에 없으며, 진실한 저주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알베르가 내 젊음에 준 것은 인생의 의미가 아니라, 삶의 열기가 무의미한 인생의 사막을 어떻게 건너가게 하느냐였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 읽어버란 책.

‘간부’, ‘배교자’, ‘말 없는 사람들’, ‘손님’, ‘요나’, ‘자라나는 돌’ 등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인간들의 부조에 비치는 빛과 그림자.

2005/07/14 13:05

접어논 적지와 왕국

그러니까 매일 지나가던 길의 어느 담장에 균열이 간 것을 무심코 보다가 균열이 번져나간 맨 끝, 거기에 참으로 우연히 장미가 한송이 시들어 고달프게 매달려 있음을 보게 될 때, 자신이 한번도 그 동네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문득 고개를 돌려 자신이 스쳐지나온 골목을 본다. 그러다가 그 사나이는 아침 햇빛에 사로잡혀 그 날 회사를 출근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늘 저녁 일곱시에 퇴근하려던 직원들을 잡아붙들고 소주 두병 이상 시키는 놈은 손가락을 자르기로 하자고 한 후, 술집으로 갔다. 물론 다섯명이 먹기에 소주 두병은 두사람의 넋두리도 받아줄 양은 못되었고 아무도 손가락을 자르지 못한 채 각자 딱 한병씩 먹고 나왔다. 내일이 추석연휴 전날이라 한잔 더하자는 직원은 없다. 시간은 아홉시. 직원 한명과 지하철에 올랐다. 나이가 많아지면 왜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지, 아무런 연관없는 이야기를 주절거리다 보니 직원이 내린다. 나는 왜 술을 먹자고 했을까? 잘 모르겠다.

늘 부족한 수면과 소주 한병 탓에 가물거리는 눈으로 <적지와 왕국>을 펼쳐들었다. 이미 <간부>, <배교자>는 읽었고 내려야 할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는 <말없는 사람들>을 마치고 잠시 <익사와 수영>이라는 해설을 펼치게 되었다.

거기에 <전락>이 <적지와 왕국>의 단편으로 처음에는 구상되었다가 전락의 주인공 클레망소의 말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장편소설이 되어버렸고, <적지와 왕국>의 마지막 편을 장식하려던 <전락>이 <적지와 왕국>보다 일년 먼저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까 내가 제일 좋아했던 두권의 책은 결국 까뮈의 탯속에서는 한 몸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하찮은 사실이 불현듯 나를 기쁘게 했다.

그리고 물론 나는 내가 내려야 할 정거장에 내렸다. 그리고 돌뿌리에 걸리거나 그러지 않고 오늘따라 기다리는 일없이 버스가 딱 내 앞에 섰다. 그리고 소주 한 병은 불행인지 행운인지 몰라도 아가씨들이 좀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다. 오! 베이베~

그렇다고 내가 그녀들에게 말을 걸었다기 보다는 가령 계단을 올라가는 아가씨의 치맛자락이 흔들리거나 또각거리며 절도있게 울리는 구두소리를 들으면 간절하게 아가씨의 얼굴이 보고 싶다거나, 아니면 예쁜 아가씨의 얼굴을 술 한잔을 빌어 정직한 표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덮었을 때, 책은 늘 더 잘 읽히는 법이다. 나는 흔들리는 버스의 손잡이에 매달려, 지금의 나이의 절반도 채 안되었던 그 때, 이 책에 왜 그토록 매료되었던 것일까를 생각했다. 아마 그때 여자친구가 왜 좋았냐고 물었다면 나는 아마 “그냥.”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뚜렷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영웅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약간은 술에 취한 걸음걸이로 어둔 골목을 걸어오르면서 나도 언젠가는 <비록 짧기는 하지만, 가장 초라하면서도 세상의 모든 권좌에 있는 그 어떤 자들보다 가장 위대한 순간을 맞이하기를>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휴님과 잎싹님의 덧글이 달린 이후에…>>>>

아침에 깨어났을 때, 이미 시간은 늦어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늦으면 다급해지기 보다 늘 딴 생각을 하게 된다. 일단 아들을 깨워 학교를 가라고 한 후, 놈이 들어간 화장실을 보며 다음에 이사를 간다면 꼭 화장실이 두개 달린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들놈의 등교 시간은 늘 내가 출근해야 할 시간을 한 이십분 쯤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이른 아침에 스스로 깨어날 수 있는 인간은 우리 집에는 나 하나 뿐으로 때론 아들을 깨우기 위하여 이십분 쯤 이른 시간에 깨어나거나 내가 가장 바쁜 시간에 놈에게 화장실을 내준 채, 아침 뉴스를 들어야 한다.

녀석이 다녀올께요 하며 웅얼거리며 학교로 달아난 후, 화장실에 들어가면 세면대 안에는 녀석이 머리에 왁스를 칠하는 동안 떨어져 내린 머리카락이 여서일곱가닥 쯤 있다. 수도꼭지를 열어 물로 머리카락에 물칠을 한 후 손가락 끝으로 세면대 바깥으로 끄집어 낸 후 다시 물을 뿌려 화장실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그러면 아침 뉴스의 세상이 망할 것 같다는 다급한 소리에 머리카락을 제거하기 위한 허무하면서도 좀스런 나의 행동이 겹쳐지면서 약간의 울분이 새어나오는 것이다. 빌어먹을!

아마 어제의 유쾌함(?)은 결국 오늘이라는 내일이 있고 태양이 또 다시 떠오르리라는 굳건한 믿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이 없다면 분명 어제는 좀 심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일이 오늘로 변화하는 형식은 찬란하다고 쳐주자.

그러나 아침이 다가오는 법은 늘 뻔뻔하다. 생애의 몇번쯤은 열광으로 맞이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아침은 아무런 기대감이나 의미를 던져주는 법없이 늘 침대의 한쪽 귀퉁이에서 고달프게 밤을 스쳐지나온 나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은 희뿌연 얼굴로 그늘 속에서 아주 길다란 키로 우뚝 서 있다. 놈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나는 발치에서 부터 한참 머리 위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때론 잠을 자면서도 아침이 침대 모서리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렇지만 잠이 모자르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애써 무시하기도 한다.

아침과의 모멸스러운 조우는 결국 낮의 노동으로 이어지고, 밤이면 모욕당한 사람들이 야음을 틈타 하나둘씩 술집에 모여 아이 씨팔! 세상이 왜 이따위냔 말이다 하고 술주정을 하던지, 아니면 텔레비젼과 얼굴을 마주한 채, 순간순간 다가오는 내일의 존재를 잊기도 한다. 그래서 밤에는 가냘픈 도덕을 지키기 위하여 집에서 머물거나 아니면 쾌락이 우르르 밀려나간 곳까지 가보다가 그 끝에서 굴러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타락과 패륜 기타 등등의 것들에 대한 책임을 단순히 그들에게 물을 수 만은 없는 것이다. 그들도 재미없는 인생에 테러를 당했거나, 아니면 볼모로 사로잡혀 있는 것일 뿐이다.

아침 중국어 수업을 빼먹기로 결심했고 몇사람 없는 전철 안에서 <적지와 왕국>의 <손님>을 읽었다.

결국 어제 말한 영웅이란 선택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불현듯 사막처럼 바싹하게 말라 균열 간 벽 위에 시들은 한송이의 장미꽃을 발견했을 때 우연찮게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 순간이라서 그 이후 행복하게 잘살았다는 동화의 결말을 절대로 보장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참고> 적지와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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