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생육기를 읽고서

서양의 책을 읽으면 건강이 상하고 동양의 책을 읽으면 오히려 몸이 가뿐해진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 동양의 책은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기에 하찮은 무협소설을 읽어도 눈조차 아픈 법이 없다. 서양 글은 동화책조차도 읽으면 머리가 아프고 눈도 피곤하다. 그만큼 머리를 써야 이해가 간다는 이야기이다.

지난 주 토요일 교보문고에 가서 부생육기(浮生六記)를 사서 오늘에야 읽기를 마쳤다. 책의 제목으로 보면 떠돌아다닌 인생의 여섯가지 이야기쯤 되겠다. 그러나 앞의 네 이야기만 심복이란 사람의 글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는 사기(四記)에 부록으로 이기(二記)가 달려 있는 셈이다. 읽어보니 앞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 사이는 확실히 틈이 벌어진다. 앞은 옛 시가 이야기의 흐름에 녹아든 반면, 뒤는 옛 시가 이야기에 녹지 않아 들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저자 심복(沈復)은 1763에 태어나 부생육기 중 사기를 쓴 1808년 이후 어느 때인가 죽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소주의 노천 책가게에서 1877년에 양인전이 발견한 책 또한 사기까지 뿐이었으나, 1936년에 왕균경이 발견했다는 책은 육기가 다 있는 책이라고 한다. 뒤의 이기가 비록 위작이라고 해도 <유구국 기행> 및 <양생과 소요>편 또한 가치가 있어 육기로 읽히고 있다.

책의 담백하기가 차 한 잔 한 듯하고 잠깐 대숲에 여름의 빗줄기가 지난 듯하기도 하여 어거지로 감상을 달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이 책의 감상이다. 일상의 잡담과 같은 심복의 글에 중국인들이 매료되는 점도 그와 같을 것이다.

아마 즐겁지만 질탕치 않고 슬프지만 상심치 않는다(樂而不淫 哀而不悲 : 論語 八佾)는 유가적 원칙에 도가적인 한유가 덧붙어 있기 때문일까?

예전에 홍콩에 있을 때 현지 직원들에게 김용의 무협소설이 재미있다고 했더니 “김용의 문장의 유려함을 한국인들이 어떻게 이해하겠느냐?”고 한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소동파의 적벽부의 한 구절을 보고 눈 앞에 그 정경이 떠오름에도 번역할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이해했다.

그 구절은 격공명혜소류광(擊空明兮소流光)이었고, 굳이 번역하자면 <빈 밝음을 두드림이여, 흐르는 빛을 거슬러오르노라>이다. 그러나 적벽의 아래 강물에 조그마한 배를 띄웠는 데, 밤은 깊어 불빛 한점 없는데, 달이 북두칠성 사이를 배회하고 엷은 안개가 강에 자욱할 때, 어디가 하늘이고 강인지 아득하고 강물에 달빛이 어른거릴 때를 생각하면, 그 풍경이 짜안 떠오르지만 번역할 말을 차마 찾지 못한다. 혹자는 <훤히 들이비치는 물을 쳐 흐르는 달빛을 거슬러 오르도다.>라고 번역한다.

번역은 어렵고 특히 한문(중국어는 아님)은 더욱 어렵다. 그러니 중국인의 감흥을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감상을 달만한 것이 없어 심복이 살던 때와 몇 가지 이야기를 하고 감상을 대신하고자 한다.

심복은 청나라 건륭제의 치세에 태어나 가경제 때 죽은 것 같다. 청나라하면 우리는 형편없는 나라로 생각하기 쉬운데, 건륭제의 치세는 한마디로 현재의 미국을 넘어서는 바가 있다. 누르하치가 청을 세운 후 4대가 강희제이며 5대가 옹정제, 6대가 건륭제이다. 강옹건 세사람은 중국의 10대 황제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난 황제들이며, 당시 청나라는 세계 제일의 국부와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였다. 건륭의 치세는 조선의 영정조 연간으로 양국 다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던 셈이다. 그의 할아버지인 강희제가 중국을 완전 통일하고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가 동진 남하하는 것을 억제한 것을 바탕으로 중국 역사상 최대의 판도로 넓혀 현재의 중국영토를 획정했다. 제위 60년 태상황제 3년을 더하면 중국역대 황제 중 재위기간이 제일 길다. 건륭제 치위 60년(1735~1795) 중 한 사료를 보면 50년 동안 1억4천3백만(1741년)에 달하던 인구가 3억4백만(1791년)으로 늘었다고 한다. 인구의 연평균 증가율이 1.4%로 20세기를 제외하고는 유사 이래 이러한 인구증가가 지속된 예는 없었다. 그만큼 중국이 평화로왔고 의료수준이 높았다는 반증이다.

후한말의 최성대의 인구가 오천만이었는 데 일억사천만에 달하는 데 무려 16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단 50년만에 인구가 배증하다니…

一治一亂이라고 문제는 여기에 있으니 인구배증이라는 국력을 흡수할 경지면적의 증가는 동기간 중 15.8%에 그쳤다는 문제가 난국으로 접어드는 계기를 만들었다. 통상 우리는 서구의 과학문물과 강력한 무기체제 등에 아시아가 무력했노라고 말하고 있으나, 외압보다는 내재적인 문제가 더 큰 것이다.

심복은 그러니까 태평성대에 시골 아전출신을 아버지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아내를 먼저 보내고 자식이 일찍 죽어 대가 끊이기는 했어도 부생육기를 보면 찰떡 궁합의 아내와 오손도손 살았고, 때로는 궁핍하기는 했어도 명산대찰을 소요하며 어짜피 떠도는 삶을 즐기고 자신의 자서전을 남겨 심복이라는 자가 존재했었다는 희미한 자국을 남겼다.

이 책을 읽고 나자 다시 한번 홍루몽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심복이 살던 시대에 출판(1792년)된 홍루몽은 아마 심복이 읽어보지 못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홍루몽 또한 자전적 소설이며 도가적 풍미가 부생육기와 비슷한 점이 다시 한번 홍루몽을 읽고 싶게 한다.

중국에 사대기서라는 이름 외에 재자서(才子書)라는 말이 나오는 데 그것은 이소, 남화(장자), 사기, 두시, 수호, 서상이다. 이 중 이소, 남화, 사기(일부만 읽음), 수호는 읽었으되 두보는 체질에 맞지 않고, 서상기는 원본을 사 두었지만 한문실력 상 읽지를 못하고 있다.(특히 서상기가 잡극의 대본형태여서 더욱 그러하다)

이 부생육기는 이천년전 굴원의 이소와 다분히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다. 그는 양자강을 끼고 도는 초, 오, 월의 지역적 특성일까?


재자서란 명말 청초의 聖嘆 金仁瑞라는 사람이 말한 것으로 그는 소설(수호전)과 희극(서상기) 또한 사기나 장자 수준의 가치가 있다고 본 점에서 유가적 전통에 매여 있던 당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던져주었던 셈이다.

이소(離騷)는 초나라 굴원의 시이다. 근심을 만난다는 뜻이며 초 회왕과 충돌하여 물러나야 했던 실망과 우국의 정을 노래한 것이기는 하여도 자서전식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집 안의 고귀함과 재능의 우수함을 말하고, 이어 역사상의 인물 ·신화 ·전설 ·초목 ·조수 등을 비유로 들어 자신의 결백함을 노래하며, “세속은 틀리고, 내가 옳다”고 주장한다. 후반은 천계편력으로 도가적 색채가 짙은 미사여구가 이어지며 낭만적이며 열정적이다. 이와 같은 초사(楚辭: 초나라의 노래 글)는 초목방초가 우거진 남방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장황하여, 북방의 건조한 문화와는 판이(시경의 시적 색채 또한 그러하다)하며 위진 남북조를 거쳐 당나라 이후에 보이는 다채롭고 과장스런 중국문화의 프로토 타잎을 보여주고 있다. 이소를 보면 좀 무협소설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남화(南華)는 莊子를 말한다. 당 현종에 의하여 남화진인이라 불리어진 이후로 <莊子>는 도교에서는 <남화진경>이라고 불리어진다. 부생육기에서 심복은 아내 운에게 사상의 경쾌함과 표현의 풍부함이 뛰어나다고 한다. 장자 전편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도의 관점에서 본다면(以道觀之) 이다.

사기(史記)는 사마천의 그것이다. 심복은 한서를 지은 반고와 함께 박식에서 뛰어나다고 한다. 그러나 사기는 정말로 기념비적 저작물이다. 그는 전한 사람으로 종이를 발명한 후한의 채륜보다 이백년을 앞선 사람이다. 당시에는 저작물을 한곳에서 읽을 수 있는 여건이 안되어 어린 시절부터 천하를 주유하며 책을 열람했고 메모지가 없는 관계 상 읽은 것을 머리에 새겨넣어야만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천문학의 대가로 역법을 제정하기도 했으며 기원전 104년에 붓을 들어 14년이 지난 BC90년에 사기를 완성한다. 사기는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本紀) 12편, 제후왕을 중심으로 한 세가(世家) 30편, 역대 제도 문물의 연혁에 관한 서(書) 8편, 연표인 표(表) 10편, 시대를 상징하는 뛰어난 개인의 활동을 다룬 전기 열전(列傳) 70편, 총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기열전이나 번역되어 나오고 있는 수준이며, 열전 또한 전문이 실리지 않고 있다. 나는 사기 전권을 홍콩에서 사 놓고 이때나 저때나 하며 언제 한 번 통독해보고자 한다. 열전에서 압권은 태사공자서로, 사마천 자신의 역사와 인물에 대한 깊은 감회가 뼈저리게 느껴지는 명문들이다.

두시(杜詩)는 아마 두보의 시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한시 가운데 두보의 시를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 심복의 아내인 진운(陳芸)이 말하길 “시의 체제가 근엄하고 사상이 성숙된 것은 실로 두보의 독보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백의 시는 마치 고야산에 있는 선인(仙人)같이 낙화유수의 멋이 있어 참으로 사랑스런 것이어요.(…) 단지 저의 사심이 두보를 높이는 마음이 엷고 이백을 사랑하는 마음이 두터울 뿐이어요.”라 한다. 내 마음과 같으나 참으로 이백이 좋은 점 또한 나는 잘 모른다.

수호(水滸)는 나관중의 그것을 말할 것이다. 사대기서에도 드는 수호지는 어렸을 때 한번 읽어보았으나 그 맛을 잘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김성탄이 기개가 호방하며 벼슬에 관심이 없고 불의를 견디지 못하여 데모를 벌이다 죽었다는 점에서 탐관오리들에 대항하는 민중 중심의 수호전에 관심이 갈 것임에는 틀림없다.

서상(西廂)은 원대의 왕실보가 12세기말에 완성된 <서상기제궁조>를 토대로 5부 21절의 잡극으로 각색했다고 하는 데 서상이란 서쪽 행랑채이며 거기에서 벌어진 일들이겠다. 이 서상기는 부생육기 뿐 아니라 홍루몽에 많이 인용되고 있으나 나는 아직 읽어보진 못하고 책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은 수호지와 함께 청대에 금서포령(禁書布令)에 종종 올라갔다고도 한다.

이 재자서는 고문, 백가서, 역사서, 시, 소설, 연극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나타낸 작가를 재자(才子)라고 칭하며, 그의 대표작을 취한 것 같다. 사실 명 청대의 과거제도가 팔고문이라는 획일화된 고문이나 주정자의 성리학의 문장을 중심으로 형식화된 논술 전개기법에 맞추어야 하는 답답함에 빠져 있었다면 이 재자서는 분명 자유분방 쾌도난담 그것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사대기서에 대하여 말하자면 너무나 잘 알겠으나 판본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금병매를 읽어본 때는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것도 국립도서관에서 빌려보았는 데 어떻게 중학교 2학년에게 빌려줄 수 있었는 지 지금 생각해보아도 이해가 잘 안된다. 그러나 빌려본 금병매는 정말로 기서라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그러다 성인이 된 후 책방에서 금병매를 사려고 책을 펼쳤더니 그만 순포르노성의 책으로 변모되어 있는 것이다.

아마 내가 읽었던 것은 에로틱한 장면을 삭제한 <진본금병매(眞本金甁梅)>였던 모양으로 그 내용은 서문경가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추리소설의 성격이 짙고, 당시 교정에 질탕했던 음담패설이 거의 이 책에서 나오고 있었으며, 각종 정력제 제조방법과 남자의 거세방법 등 각종 신기한 이야기 꺼리가 실려있어 기서(奇書)라는 명칭에 손색이 없는 책이었다.

아마 요즘 나오는 금병매는 판본이 <원본금병매>이거나 역자가 돈벌이를 위하여 지멋대로 에로틱한 장면들을 가감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대기서를 읽어본 느낌은 삼국지는 더 이상 말 할 것이 없는 것 같고, 서유기는 전반부가 압권으로 후반부는 쓰레기통에 들어가도 아쉬울 것이 없을 것 같으며, 수호지는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대기서라는 말이 언제 통용되었는 지 모르지만 최근에 기서라는 말이 생겼다면 <홍루몽>은 반드시 들어갔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구름 밖의 구름이요 꿈 속의 꿈(雲外雲 夢中夢)과 같은 분위기의 소설이 아니던가?

이러한 중국문학 전반에 걸쳐 도가적 영향은 막대한 것이어서 도교적인 지식이 부족할 경우 그 재미가 상당히 반감되리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으며, 붉은 누각에서 꾼 꿈이라는 홍루몽의 제목에서만 보아도 그러하다.

<첨부>

부생육기 그 자체보다 이 을유문화사의 책은 참으로 마음이 든다. 정성껏 만든 책이란 느낌이 들어 좋다. 그러나 간혹 오자가 나오고, 지금은 잘 안쓰는 낱말이 나온다. 문고판으로 초판이 69년 8월이란다.

잘 팔리지 않았을 것 같은 이 책을 오랫동안 갈무리를 해 온 을유 측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심복과 같은 다감한 마음이 아니라면 돈 잘벌리는 책은 만들어도 좋은 책 만들기란 힘들다.

이 책은 참으로 평심한 마음으로 좋은 이웃집을 들여다 보듯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약간의 부러움과 안되었다는 생각과 없는 살림에도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잘나가지는 못해도 소박한 마음과 정성으로 이 세상을 떠돌다 저 세상으로 갈 수 있음을 이렇게 편하게 가르쳐주는 책도 없다.

별넷 중 별한쪽은 을유문화사 몫이다.

참고> 부생육기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