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일요일부터 지금까지 고달프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아니 그것보다도 삶이라는 것이 짜증스럽게 느껴진다. 절망적이지는 않지만, 살만한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고달프다는 이유는 이 놈의 세상과 내 삶의 틀이 덜거덕거렸고, 그러자 피곤하고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치 않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살아야 할 이유를 열거하자면 너무 많아서 다 헤아리기 조차 숨가쁠 것이다. 그래서 자살하기 바로 직전에 마지막으로 커피 한 잔이 먹고 싶어 물을 끓이다가 문득 삶에 대한 욕망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여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천상병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 지상에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별반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살았고, 살만큼 산 후에 술병인지 지병인지 간경변으로 죽었다.

명동의 뒷골목을 지나가던 싸가지 없는 문인들에게 술값을 구걸하면서도 선술집에는 꼬박꼬박 돈을 내고 술을 사 마셨다고 한다. 그것이 자존심이라고 술값을 구걸하는 수치를 감내했다. 그래서 자존심과 수치심을 버무리면 쌤 쌤이라는 허무가 명동바닥에 질펀했고, 더 이상 살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허무를 지우기 위하여 밤이면 밤마다 골목에서 돈을 구걸하고 술을 마심으로써 허무를 잊었다. 그가 허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저 놈들은 세상과 영합하여 지저분하게 돈을 벌고 있고 나는 고결한 시인이기 때문에 저 놈들에게서 정당하게 돈을 빼앗을 수 있고, 나에게 돈을 조금 주거나 주지 않는 놈들은 단지 치사한 놈일 뿐이다’라는 타당하고 명확한 논리였다. 그리고 낮이면 묽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새가 되지 못하고 인간으로 태어난 자신에 대하여 슬퍼했다.

아마 까비르가 시장바닥에서 부른 신에의 송가가 아름다운 것은 그의 영혼이 고아했기 때문이 아니라 누추하고 피곤한 이 땅에서 삶을 넘어가기 위한 하나의 징검다리일지도 모르며, 구두방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그것마저 없다면 삶에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거미줄과 같은 미미한 이유와 목표가 언제나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며, ‘나는 말이야 니들이 어떻게 보아도… 니들이 아무리 비웃어도… 나에겐 살아가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단 말이야. 그리고 니들이 여편네의 배 위에서 아니면 자식들을 패가면서 아니면 내연의 거시기와 그 짓을 하면서 참으로 무덤덤한 삶을 살아도… 나는 말이야 나의 영혼의 소명에 따라 시를 쓰고 있단 말이야’ 라고 그들이 이 세상을 비웃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때론 나도 이 무덤덤한 생활을 한 귀퉁이 접어놓고 시를 쓰거나 정처없이 방황을 하고 싶다.

그런데 일요일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가 이 땅 위에 존재해야 할 어떠한 어설픈 논리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우울하거나 죽고 싶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살을 생각할 만큼 인생에 대한 기대감도 없었고, 우울이 어떤 감정인지 조차 나는 모른다.

내가 보기에는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부장 또한 이 땅 위에 살아야만 하는 뚜렷한 이유는 없는 것 같고, 늘 심심하기가 나보다 더한 것만 같다. 그래서 그는 교회를 나간다.

더군다나 오늘은 창 밖이 미치도록 맑고, 먼바다 이웃나라에 들이닥친 태풍의 긴 꼬리가 남긴 바람이 나무 잎을 속절없이 흔들어 대며, 가을이 나의 창을 두드리고 있는 데, 책상에 쪼그리고 앉아 딱히 할 일이 없어 이 따위 글이나 쓰고 있는 것이다.

가을을 맞이한 창 밖이나, 맞은 편 부장의 이야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실인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사실인 나 자신>이 아무리 생각하고 점수를 후하게 주려 해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불행하게도 <이 세상 또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과 동의어다. 이 세상이 반짝반짝 영롱하게 빛난다면, 긴 숨을 몰아 쉬며 다급하게 이 세상을 포옹하고 말려들어가 더 이상 나의 존재가 가치가 있는 지 없는 지 조차 생각할 여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허무(이런 묵직한 단어를 쓰기엔 적당치 않다는 것은 알지만)에서 빠져 나오는 길이 쌔고 쌨다는 것을 투명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너무 간결해서 실행하기에 약간의 난점이 있고 후유증으로 좀 피곤하다는 이유로 활용을 않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존재감을 투명하게 헤아리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뚜렷한 이유가 있는 놈을 찾거나, 아니면 길거리에서 남들에 대하여 아랑곳 않고 지랄발광을 하거나, 이유 없이 나에게 눈알을 부라리는 놈의 등짝이나 인후부에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식칼로 푹하고 쑤시는 것이다.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두세 번 더 찔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 빌어먹을 자식이 피를 뿜으며 넘어지고 나면, 범인을 잡겠다는 경찰들의 추적과 함께 나의 인생은 다급해지고 본질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즉 더 이상 삶에 대한 권태나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하여 생각할 여유는 없어지고, 평소 별로 누려본 적도 없던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직장과 가족을 내팽개친 채, 골목과 들로 달아나면서 한 끼의 밥에 대한 애착에 못 견뎌 하거나 불면의 밤을 지새웠던 침대의 포근함을 새삼 생각하게 될 것이며, 자신이 동냥했던 한 푼이 얼마나 절실했던가를 깨닫고, 누추했지만 안락감에 깃든 집과 자신을 갉아먹는다고 생각한 가족이 얼마나 소중했었던 것인가를 뚜렷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삶을 탕진해 왔는가 또한 알 것이다. 그렇다고 권태감이나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길에 식칼만 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단지 자살과 교수형의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사실 ‘왜 살아야만 하느냐?’하고 물으면 살아야 할 뚜렷한 이유가 없는 것이 이 놈의 인생이다. 그래서 살아야 할 이유를 생각한다는 것은 늘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리거나, 아니면 쓸데없는 생각을 한 죄로 사람을, 땅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옥상 또는 자주 안 가던 약국으로 가게 만든다. 그러니까 인생을 알차게 보내기 위하여 인생에 대하여 생각하기 보다는 빚을 얻어다가 부동산 투자를 하고 땅값이 오르네 내리네, 노 아무개가 사람을 잡네, 융자금 갚으려다 보니까 갈비집 한 번 가 보질 못하네 하며 사는 것이 훨씬 현명한 것이다.

인생은 뼈 골이 빠지도록 힘들수록, 앞 날에 대한 기대감으로 살고자 하는 생의가 무럭무럭 피어나는 것이란 말이다.

사실 이러한 생의에 점거되면 더 이상 세상의 아름다움과 찬란한 계절에 대하여 무심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고, 누가 보아도 한푼 두푼에 집착하게 되고, 외모에는 무심해지게 된다. 무엇 때문에 사느냐고 혹자는 묻겠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고 관 뚜껑에 못을 박을 때까지 ‘돈, 돈, 돈’하며 한번도 궁끼를 벗어나지 못한 채 밥숟가락을 놓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혐오스럽다면 도박이나 주색잡기에 빠져들 수도 있다.

이렇게 될 때,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재미없는 진실에 당도하게 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재미없는 진실 때문에 사는 것이다. 때로 죽어봤자 뭐 달라질 것이 있느냐? 오늘은 그런대로 괜찮았으니 내일도 괜찮을 것이며, 자식들은 별로 기대할 것은 없지만 크고 있고, 마지막으로 내가 죽어봤자 세상은 달라질 것이 없으며 그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그 야박함에 강력한 배신감으로 치를 떨며 “두고 봐라! 내가 벽에 똥칠을 할 때까지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살아주마.”라고 오기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은 늘 전혀 바라지 않는 시간에 농담처럼 다가오는 법이다.

충분하고 필요한 때에 알맞게 죽음이 다가왔다는 소식을 아직도 나는 접해본 적이 없다. 죽어 없어져야 할 놈들에겐 늘 그것은 천천히 왔고, 살아야 할 만한 가치를 지닌 사람들에겐 시도 때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것이 죽음이다. 그러니 아마 나에겐 천천히 올 확률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이 다분히 심술궂은 것을 아는 것은 현명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의 본질을 뒤흔들 수는 없다. 단지 살아남는 것들을 위하여 유언장 정도는 준비할 수 있겠지.

약간은 내가 싸이코라는 반증은 행복과 아름다움 그리고 세상에 만연한 사랑, 하느님의 은총, 이런 것에 매혹되기 보다는 세상에 만연한 고통과 번뇌와 심심함과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이 빚어낸 비참한 결말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다가온 죽음과 기근, 참사 이런 것에 나는 훨씬 더 미혹되고 그것들로부터 살아가야 할 이유와 당위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림자와 어둠을 통해서 보는 빛이 더욱 투명하고 밝게 빛나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것과 아픈 것과 불합리하고 말도 안 되는 이 세상이야말로, 살아가는 길 위에 널려 있는 죽음의 날카로운 조각을 밝혀주면서 <살아야 한다>고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잘 나가던 에덴동산의 아담에게 매료될 수 없다.

먹지 말라고 하나님이 신신당부한 선악과를 쳐먹고 동쪽으로 쫓겨난 아담은, 신의 애완동물이던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으며 교회가 날조했는 지는 확인할 길은 없지만 천국과 지옥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거나 혹은 영원하고 지루할 것 같던 삶 속에 한 줄기 죽음의 빛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그는 최초의 인간이자 위대한 인간이다. 아마 이런 이유로 나는 배교자이며, 에덴의 아담보다는 동쪽에서 늙어 죽을 운명을 지닌 사람의 아들이기를 택할 자인 것이다. 그리하여 죽지도 못한 채 하늘로 들려 올라간 에녹에 대하여 진심으로 애도하는 사람이다. 그는 삶 속의 추잡하고 잡스런 모든 것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하늘로 올라가 영생을 누리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고달프거나 짜증스러웠던 이유를 말하고자 했던 나는 결국 그것을 말하지 못한 채 드디어 서강의 저쪽으로 내려앉는 태양이 이맘 때쯤 어떠한가를 뚜렷하게 바라보면서도 차마 말로 이야기를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내려앉는 태양을 바라보는 것은 위험하다. 너무 장렬하여 이유도 없이 슬퍼지거나 아니면 정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제 하늘을 엷게 뒤덥기 시작한 구름 밑을 수평으로 날아온 빛은 아파트의 벽과 건물의 유리창 위에 부딪혀 최후의 빛으로 자멸하면서 발광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약간 기울어진 모퉁이의 건물 일층의 음식점에서 퇴근을 앞둔 직장인을 유혹하기 위하여 아직도 날이 밝음에도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림자는 동쪽을 향하여 빛의 거리만큼 한정없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서쪽 하늘은 도저히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의 색깔로 내 얼굴을 비추고 도로는 나즈막한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너무 이 세상이 찬란하단 말이다. 빌어먹을…

This Post Has 5 Comments

  1. 글과 사진이… 참 강렬합니다.
    글과 사진이 따로 노는 것 같은데…
    또 따로 놀지 않고.
    이질적인 조합 같으면서도 또 어울려서… 여러가지 생각거리를 주네요.
    여인님의 글. 어렵기도 하지만.. 여러가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1. 여인

      누군가는 이 글을 보고 악마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사진이 좀 야하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2. 흰돌고래

    사진은 지우셨나봐요^^
    잘 읽었습니다!!
    저와 같은 (혹은 비슷한?) 고민을 한 흔적을 이리도 자세히, 또 명쾌(?)하게 보여주시니, 이것 만으로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실은 아까까지 기분이 별로였는데, 다시 또 단순한 생각으로 기분이 좋아졌어요. (위소보루님의 댓글에 그 답글로 쭈욱 나열했어요 ㅎㅎ)

    마지막에 이 세상이 너무 찬란하단 말이다…

    가 특히 와 닿습니다.

    1. 여인

      기분이 좋아지셨다니 다행입니다.

      이 글을 쓰는 그 날 그 시간의 저물어가는 풍경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멋있었습니다.

  3. 旅인

    여인
    이 글은 작년 9월에 쓴 글입니다. 다시 올려봅니다.
    └ 목련
    음 여전히 여인님만의 무게 있는 글 입니다.
    여인님의 글들은 언제나 비범함을,
    지리산에서 도를 너무 많이 닦으신것 아닌지요..흐흣^^(웃자고 농담이에요.)
    조용히 숨죽이며(당췌^^!숨을쉴수가 없어요.)잘읽고 감니다.
    └ 여인
    이런 글을 읽으면 좀 우울해지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악마적이라고 하던데요.

    glumbler
    두 번 정독을 하면서 허무, 염세, 덧없음 그런 단어가 머릿 속에 순간 떠오릅니다. 갑자기 포스팅 된 글에 제 기분도 전이 됩니다. 또한 시인 ‘천상병’ 이라는 세 글자가 눈에 들어오면서 동시에 한 인물이 떠오릅니다. ‘천상병’ 시인보다 더욱 아름다운 사람은 분명 부인 ‘목순옥’씨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 시인이 싫습니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세상의 ‘시인’이라는 사람들이 싫습니다. 더욱 ‘시’도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아마 그들의 삶이 탐탁지 않다고 할까요? 그러면서 그들이 부럽지만. 세상은 언제나 바둥바둥 아귀다툼을 하면서 하루를 마감하고 또 그런 내일을 기다리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도대체 인간은 왜 사는 것일까요? 요즘 저도 만사가 귀찮습니다. 악마라는 놈하고 술 한 잔 코가 삐뚫어지게 꺽을 수 있다면 그 답이나 알 수 있으려나요.
    └ 여인
    인간이란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아닐까요? 그래서 자살이란 희귀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물건너 섬나라 쪽바리들은 할복자살이라는 것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명예라는 허울을 위하여 고통스런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우매함을 대단한 것으로 인식하다니요?
    모든 나날들이 대단하다면 산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이런 무심한 날들 때문에 저의 이런 허무하고 먕랑한 사유도 조금 진전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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