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짜리 이야기

퇴근시간에 지하철을 타면 잠시 책을 펼쳐보지만, 이내 견딜 수 없어 깜빡 졸게 된다. 그렇지만 용케도 내릴 곳에서 서너 정거장이 전에는 깨어나곤 한다. 무더위에 설친 밤잠의 후유증일지도 모른다.

어제도 그랬다. 눈을 뜨고 여기가 어디쯤 인가 하고 있을 때, 맞은 편에 앉은 아주머니가 나를 뻔히 쳐다보고 있었다. 침이라도 흘렀나 하고 입가를 손으로 한번 훔치며 어디까지 왔는가 했더니, 조금 더 졸아도 무방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졸았고, 두 정거장 전에 깨어났다. 무릎 위의 책을 가방에 넣고, 앞을 보니 아까의 아주머니는 계속 나를 보고 있었다.

‘왜 쳐다보는 거요?’ 라는 심정으로 내가 쳐다보자, 그녀는 눈길을 거두고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딴청을 피우는 그녀의 이마와 코 끝을 보았을 때,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확실치는 않아도 그녀일지도 모른다는 아득함. 오래 전의 기억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지하철은 이미 강을 건넜고, 이제 역은 한 정거장 만 남았다.

그때 딴청을 피우던 그녀는 다시 나를 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꼭 “왜 나를 모르겠어?”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어제 올렸던 포스트의 <한 장짜리 이야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거나, 착시현상일지도 몰랐다.

눈 앞에 있는 아줌마는 나의 기억 속에 흘렀을 시간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고, 살이 붙어서 그런지 다소 육중해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그녀가 쌍꺼풀 수술을 했다는 것이다.

그녀와 27년 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들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기억하는 우리의 농담과 같았던 대화 속에 그런 것이 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 데?>
<얼마나? 그러니까 말이지…
네 눈에 쌍꺼풀이 참 예뻐, 그리고 주근깨가 안보여.>
<너 지금 나를 목욕시키는 거지? 그런데 니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나두 쌍꺼풀 있다고 잘 봐!>

그러나 그녀가 나를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으며, 내가 그녀를 사랑했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다. 단지 그때 그녀는 164쎈티의 늘씬하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간직한 소녀였지만, 쌍꺼풀은 없었다는 것 밖에 더 이상 말할 것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건너편의 아주머니에게서 젊은 시절의 그만한 아름다움을 찾아보기란 어려울 성 싶었다. 아니면 27년은 생각보다 아주 긴 시간이거나, 너무 많은 것들이 우리의 육신에 퇴적되어 젊음의 찬란함을 파헤치기에는 너무 깊을 지도 모른다.

<한 장짜리 이야기>는 그녀를 위해서 썼었다. 파란 모나미 볼펜으로 딱 한장에 알맞은 이야기를 썼고 늘 그것을 편지로 보내려 했으나, 결국 그 이야기들은 나의 서랍 속으로 기어들어가고야 말았다.

<한 장짜리 이야기>를 썼다고 그녀를 못 견디도록 좋아했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할 일이 없었고, 그래서 이야기를 만들어 보았고 그녀에게 보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뿐 이다.

오히려 <한 장짜리 이야기> 쓰기를 그친 한참 후, 어느 섬에 놀러 간 나는 11월의 추위 속에서 이름모를 새의 비명 같은 울음소리에 깨어나 새벽이 다가오도록 비가 내리는 섬을 배회하다가 갑자기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외로움을 만났다.

어둠과 외로움 속에서 섬의 끝에 다다랐을 때, 강은 새벽을 위하여 밤새도록 안개를 뿜어내고 있었다. 안개 속으로 경춘국도와 섬의 가로등 불빛이 스며들었고 안개는 빛을 발하며 강물 위로 꿈결처럼 흘렀다. 나는 빛에 휩쌓여 차라리 강물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때 마지막으로 남았던 구원의 밧줄은 그녀의 이름 밖에 없었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만나면 반드시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녀에게 매달릴 것이라고 맹세를 했다.

결국 나는 그 말을 못했고, 우리는 합정동 사거리의 모퉁이에 있는 카페에서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닌 여자였다는 것을, 내가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할 수가 있었다.

헤어진 지 이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의 사촌오빠라고 어떤 놈팽이가 전화를 했고, 나와 그녀 사이에 무슨 일이 없었냐고 애걸하며 몇 번이나 물었다. 야비하기도 하고 비루한 놈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친구였을 뿐이며, 만약에(만약에) 사촌오빠라면 동생의 말을 믿으라고 몇번이고 되풀이해야 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그녀가 뭔가 음산한 어둠 속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섬에서 스스로에게 한 맹세를 지키지 못한 것이 그만 그녀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한동안 우울했고, 그녀에게 몹쓸 빚을 지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을 까마득하게 잊었다.

그런데 <한 장짜리 이야기>의 주인일지도 모를 여인이 바로 건너편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주춤주춤 일어나 출입문으로 다가갔고, 지하철은 역에 도착했고, 나는 내렸고, 계단을 올라가 개찰구를 지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랐을 때, 이미 비는 그쳤고 잠시 우울했던 생각은 신선한 바람에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이 <한 장짜리 이야기>들은 제 포스트들의 여기저기에 숨어있거나 약간 수정이 된 채 한 장짜리 분량을 조금 넘게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망명자의 소고>는 당시 한 장짜리에서 몇년 후 대여섯장이 되었다가 그만 더 이상 진도가 나가기를 포기하고 만 오래된 골치꺼리였는 데, 이제 새삼 저를 괴롭게 하네요,

혹시 그럴리야 없겠지만, 이 <망명자의 소고>가 조만간 포스팅될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아니다’ 입니다. 왜냐하면 SF적이고, 퓨전역사물이며, 추리적인 특성을 지녔으며, 영양가있는 내용이 풍부하고, 사랑과 우정이 깃든 이야기라고 제가 말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이며, 황당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가 되버릴 위기에 직면하거나, 아니면 능력 상 중도하차 하던지, 가장 불행한 사태는 제가 미쳐버린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기에 당분간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으로 암약활동(워드프로 작성)을 벌이다가 어느정도 자신이 생기면 감질이 나도록 토막토막 잘라서 올려볼 생각입니다. 안되면 할 수 없지만, 그냥 관두고요,

그냥 후딱후딱 올리는 제 포스팅의 특징을 아시는 이웃분들께서 <그럴리야 없지만> <혹시> 기다리실까봐 대신 이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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