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와 총의 이유

태양은 아직 지글거린다. 가을은 언제 올까? 멀리서 포성이 제국의 몰락을 예고하듯 간간히 떨렸다가 사그라지곤 했다. 언덕 아래로 길은 9시 방향으로 실타래 마냥 풀어지다 빛 속으로 흐트러져 보이지 않는다.
저격병은 하루종일 언덕 아래를 내려다 보다, 간혹 태양을 쳐다보며 시간을 가늠해 본다.

오후 3시의 태양과 지면의 열기가 머리 속을 멍하게 했다.

적들은 능선을 넘어 저 길을 따라 올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길 것이고, 그들은 어김없이 쓰러질 것이다. 그는 헝겁에 둘러싸인 총신을 먼지와 땀에 얼룩진 소맷자락으로 훔쳤다. 이 성전은 자신에겐 긍지이자 행운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도시의 뒷골목에서 그는 리어카 장사를 했다. 리어카는 그에게 굴욕과 가난에 찌든 내일의 삶을 펼쳐 보였다. 그것조차도 그가 고단한 육신을 끌고 이어온 20년의 결과였다. 골목 저 편에는 도로를 물들이는 은성한 빛이 있었지만, 자신은 어둠 속에 묶여 있었다.

자신도 언젠가 리어카를 떨쳐두고 넓은 대지를 껴안고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 놓은 채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장사를 마치고 고미다락방에 누우면 창으로 보이는 밤의 하늘은 대지의 향기와 숱한 빛을 뿌리며 누구의 것이랄 수 없게 존재했고 끝없이 광막하였다. 그 속에 머물고 있는 모든 것들이 끊임없는 시간의 여울 속을 헤매다, 잠시 멈춰 서서 웃음지으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가 어딘지 모를 귀향지로 향해 훌쩍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초라함은 육신과 함께 허물처럼 용해되고 명료하고 허무한 정신을 만나곤 했다.

그러나 정신이 육신의 고달픔과 서글픔 등을 넘어 자신을 이끌어주기에는 무력했다. 아침이 되어 리어카를 끌고 뒷골목으로 나아갈 때면, 숙명이 지닌 불멸성은, 정신이란 자신의 비참함을 투명하게 밝혀주는 기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개숫물이 흐르는 더러운 골목을 지나 누추한 옷을 벗어 던지고 길 건너편 세계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 곳에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고, 사내들은 짙은 색 양복 속에 향내가 스민 하얀 드레스셔츠를 받쳐입고는 거리를 미끄러지듯 걷고 있다. 한 밤에도 등불이 꺼지지 않고 거리를 비추고 있었으나, 불빛마저도 타인을 위하여 준비되었고 자신과는 동떨어져 아득하였다.

때론 지저분한 뒷골목에도 놈팡이들은 말쑥한 옷에 껌을 씹으며 들어와 주먹질과 욕지거리를 하며 그의 돈을 빼앗고 낄낄거리며 사라지곤 했다. 현실이 투명하면 할수록 좁아터진 다락방과 식은 밥, 골목에 떠도는 욕지거리와 도시의 썩어가는 냄새에 환멸을 느꼈다. 그는 세상을 향해서 소리치고 싶었다, 개자식들! 잘 먹고 잘살라고.

그런 생활을 보내던 중 밀려오는 풍문 속에 자신의 엄마가 살아있으며, 도시의 저편 끝에 산다는 것을 들었다.

며칠동안 고민을 한 끝에 버스를 타고 도시를 가로질러 도시의 산자락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판자와 먼지 속에 서 있는 동네에 그는 당도했고, 주소를 찾아 집이 있을 골목을 찾았다. 그는 빌려있은 양복과 새로 산 구두가 영 불편했다. 게다가 자신이 들고 있는 꽃다발은 낡아 바스러져 내리는 이 동네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골목에 들어서자 지나간 시절동안 자신을 감싸고 돌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왈칵 되살아났다. 그리움은 자신의 생활이 누추하고 힘들수록, 포근하였고 파스텔 분말처럼 색색으로 은은히 빛나며 아련했다. 낮은 하꼬방의 창문과 골목을 싸고 도는 온갖 것들이 뒤섞인 냄새는 더 이상의 환상과 아련함을 간직할 수 없도록 하였다. 엄마를 포옹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포옹을 통하여 가정집의 따스한 불빛과 엄마가 정성스레 지어주는 저녁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가난에 얽혀들고 말 것이라는 그 무게가 두려웠다.

그러나 죽어가는 엄마의 침대로 기어들어가 열기에 들뜬 엄마의 냄새에서 단 한사람 만이라도 끔찍하게 자신이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고생의 의미를 찾아가던 <뮤>와 같이, 자신도 엄마를 껴안고 체취와 체온을 느낌으로써 이 세상과의 유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좁고 개숫물과 오래된 그늘에 젖어있는 그 골목을 걸어가는 마지막 이유이자, 절실한 바램이었다.

골목의 끝, 엄마가 살고 있다는 집 문 앞에 당도했을 때, 엄마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음을 절망적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하등 그리움을 간직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대문 너머로 그릇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나가 뒈져라! 이 웬수 새끼야!>하는 고함이 터져 나왔고, 한 젊은이가 문 밖으로 튀어나와 <빌어먹을! 내가 다시 여기를 오나 봐라? 싸질러 놓으면 다 엄마야? 아이 씨발>하고 침을 길거리에 퉤 뱉고 골목을 걸어내려갔다. 다시 문이 열였고 메마른 중년의 여자가 나왔다. <그래, 다시 나타났다간 그 날로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이 자식아!> 라고 소리친 후, <에이 빌어먹을 자식>하며 여인은 올이 늘어나 축쳐진 옷을 툭 털며 돌아섰다. 여인은 그가 거기에 서 있는 것을 한번 올려다 본 후 고개를 꺄웃한 후 문 안으로 사라졌다.

메마른 몸에 어울리지 않게 큰 옷을 입어 초라해보이는 부시시한 그 여인이, 찌들어 눈동자에 물기마저 말라버리고, 생활과 현실 벽 이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듯한 그 여인이, 자신의 엄마가 맞는다는 것을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부를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들고 왔던 꽃다발과 과일을 들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시간이 생길 때면 도시를 건너, 그 골목에 들어서곤 했다. 그러나 차마 그녀를 부를 수 없었고 되돌아서곤 했다. 그리고 자신의 다락방으로 올라가 문을 잠그고 식은 밥을 먹었다. 차디찬 식은 밥을 삼키면 코구멍에서 외로움이 식도로 함께 밀려 내려갔고, 가슴이 컥컥 식은 밥과 외로움을 밀쳐냈다. 그러면 이유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 그런 자신이 처량하여 그는 이불을 입에 틀어막고 울었다. 울음을 놓아버리면, 다락방의 창 너머로 별이 보였고 여름 햇빛에 그을렸던 땅이 식는 냄새가 밀려왔다. 도시의 밤 속으로 달려가는 전동차 소리와 술 취한 행인의 노래소리 등이 쪽빛의 밤 하늘로 풀려갔다. 그리고 자정을 알리는 사이렌이 도시의 불빛 저쪽에서 애애앵하고 울었다.

그해 가을이 오자, 그만 그 골목에 익숙해져버렸다. 그래서 더 이상 골목에 들어가지 않고 건너편의 공터를 어슬렁거리거나, 가게 앞이나 선술집에 앉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들은 이유없이 목소리를 높이거나, 아무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소근대거나 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 빨리 가는 것이었고, 자신의 헛된 삶을 죽음이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쾌락을 탐하지만 돈은 늘 부족한 듯 했다.

공터에서 그만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총각!>하고 누군가 불렀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엄마라는 여인이 거기 있었다. 그의 몸은 뻣뻣하게 굳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에 우리 골목에서 몇 번 본 것 같은데? 여기 사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디에 사는 데? 이곳에서 자주 본 것 같은 데…?>

목구멍에 꽉 찬 침을 삼키고 헛기침을 한 후, 더듬더듬 자신이 사는 곳이 도시 저편이며, 누군가를 찾으러 왔다고 간신히 말했다.

<누굴 찾길래?>
<엄마요.>

그녀의 눈이 잠시 흐릿해졌다가, 다시 메마른 눈으로 그를 또렷하게 쳐다보았다.

<혹시 이름이라도 아우?>

누군가에게 들었던 엄마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렇군! 그 사람을 찾으려면 더 이상 이곳으로 오지 마시오. 총각이 찾을만한 사람이 아니라우.>
<아니 왜요? 아주 오랫동안 저는 엄마를 기다리고 찾아왔습니다.>
<찾아서 뭘 하시려고? 오히려 총각과 엄마에게 불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겠오?>
<불행이라고요? 도대체 불행이 뭐죠?>
<가져서 안 될 자식을 가진 것과 만나선 안 될 애미를 만나는 것이라우.>

<버림받았다는 것과 외로움의 고통을 아십니까?>

여인은 한동안 그를 쳐다본 후

<버림받은 것에 대해서는 알겠지만, 외로움은 우리 같은 년에겐 오히려 복이지. 외로움을 면하려고 가난과 미움을 택해서는 안 되지.>
<가난과 미움이라니요?>
<총각이 사는 동네나 이 동네나 못살기에는 매한가지니 알겠지만, 그녀의 가난은 총각을 더 힘들게 할 것이고, 총각이 그녀에게 가져다 준 불행 때문에 그녀는 총각을 미워할 것이우.>
<제가 가져다 준 불행이라니요?>
<그걸 알아서 뭐하려고?>
<제가 가져다 준 불행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전 그냥 버려졌을 뿐 이예요. 그냥 버려졌다구요.>
<그건 버림받은 씨였기 때문이라우. 총각 때문에 엄마의 모든 삶은 어긋나기 시작했고, 자식을 버리고 잊기 위하여 엄마는 증오를 배워야 했다오. 그리고 엄마는 자식을 잊었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했고 사랑을 받아야 할 자식들마저 거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우. 그리고 사랑을 받아야 할 자식들마저 미워한 어미는 자신에게 다가왔던 젊은 시절의 불행을 모두 퍼 담아 총각을 치열하게 미워할 수밖에 없었지…>

그는 미움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받아야 할 사랑은 땅바닥에 버려졌고, 자신은 간신히 살았으나 그래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했다. 그러나 무수한 나날의 방황과 주저함 속에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간직해왔던 그리움의 실체는 결국 미움과 저주였다. 그래서 그는 소리쳤다.

<대체 이 땅이, 하늘이 무엇 때문에 나를 이곳으로 끌고 왔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나에게 마지막 남은 것마저 여지없이 박살을 내버리는 군요. 당신이 어머니라면 저주하든지 미워하든지 괜찮소. 그러나 책임져야 할 것이요. 굶주림과 멸시는 좋소. 그러나 외로움과 서글픔은 책임지시오!>
<외로움과 서글픔? 다 속편한 소리지. 가슴 속에 드글드글 끓어오르는 증오는 어떡하고? 총각! 만약 내가 엄마라면 총각의 외로움과 서글픔 그리고 나의 증오를 쌤쌤이라고 쳐버릴 거라우. 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니, 더 이상 이 빌어먹을 동네에 얼쩡대지 마슈.>

그때 공터의 한쪽 구석에 바람이 불었고 먼지가 말려져 가는 끝에 코스모스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깡마른 아이가 깡통을 차며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 속에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간신히 생각해 냈다.

<그럼… 나의 아버지는 누굽니까?>
<총각의 아버지? 총각의 어머니는 이 동네의 뒷골목에서 몇명의 사내에게 강간을 당했지요. 그리고 그녀는 이 동네를 벗어나지 못한 채 총각을 낳았고, 처녀가 아니라는 것이 다 소문난 이 동네에서 비열한 남자에게 시집을 갔오. 또 남편에게 더럽다고 매일 맞으면서도 또 자식을 낳았오. 그녀는 남편과 자식과 이 동네를 증오했다우. 그러니 총각의 아버지를 어떻게 알겠어요?>

그녀는 떠났다. 한번 엄마라고 불러보고 싶었지만, 누추한 입성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어깨는 돌아보지 않을 듯 단호했다. 그녀가 골목의 그늘 속으로 사라지자, 가슴 속에서 한 줄기 증오가 푸른 인불처럼 일어나 자신의 머리 속을 뒤집었다. 그는 동네를 떠나 무작정 걸었다.

도시 위로 어둠이 밀려왔고 차 소리와 불빛이 마구 섞이며 어둠 속으로 용해되며 밀려갔다. 버려진 자식이며, 굶주림과 멸시와 외로움 속에 살아왔지만 최소한 그리움은 있었다. 그러나 그리움조차 사라지고 자신이 개 같은 놈들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에게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자, 용기가 생겼다. 도둑질과 살인도 저지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때 눈에 시커먼 칠을 한 여자가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았다.

<아저씨! 놀다가지 않을래요?>하며 여자는 자신의 가슴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그녀의 몸에서 야릇한 냄새가 났다. 갑자기 여자의 살냄새를 맡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얼마예요?>
<팔백 빠따카! 잘해 드릴께…>

그는 자신의 호주머니 속의 돈을 헤아렸다.

<육백삼십 밖에 안되는데…>

여자는 한동안 생각하는 듯 서있더니,

<다음에 또 온다면…, 이번에는 깍아드릴께요.>

여자를 따라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 침대와 베니다 경대 그리고 비닐 옷장으로 꽉찬 좁은 방에 들어섰다. 그 방에 들어서자 가슴이 쿵쾅쿵쾅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정하기 위해서 침대의 한쪽 끝에 앉아 방안을 둘러보았다. 한쪽 벽에는 반쯤 벗은 아름다운 여자가 자신을 향해 웃는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여자를 보았을 때, 눈과 입술 끝에 가느다란 주름이 보였고, 촌스러워 보였다.

<나이가 든 것 같은데…>
<그러니까 팔백이지… 그런데 아저씨 처음이지?>

그는 아니라고 하려다 고개를 끄덕했다.

<그럼 내가 알아서 편하게 해줄께.>

여자의 요구대로 복도의 끝에 있는 욕실에서 몸을 씻고 침대로 기어들어가 여자의 냄새를 맡았다. 여자는 키득거리다가 으으음하고 콧노래를 불렀다. <우스크의 붉은 장미는 항상 늦게 핀답니다. 그것은 그리움 때문이라오.>라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였다. 여자의 몸에서는 화장품 냄새와 간간히 구석진 곳에서 쉰 살냄새가 났다. 그러자 마음은 편해졌고, 뿌리가 잘려져 나간 그리움이 파도소리처럼 밀려왔다. 그는 여자의 모든 곳을 냄새 맡았다. 그러자 여자가 <이제 그만 사랑해야지? 내가 넣어줄께>하고 자신의 거기를 잡았다.

여자의 속으로 그는 들어갔다. 그러자 여자의 온몸이 자신의 가슴 속으로 꽉 밀착되었고 짧은 환희 의 끝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 커다란 공허의 구멍으로 밀려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허무했고 슬픔 때문에 약간의 눈물이 맺혔지만, 그 날 오후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꿈 같이 아무 일도 아닌 듯 했다.

<슬펐쩌? 왜, 동정을 잃어서?> 여자가 그의 눈끝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내며 그렇게 물었다.

<아니! 그냥 좀 슬퍼서…>

여자는 그에게 팔백 빠따카로 삼십분동안 자신을 살 수 있지만, 더 자고 가도 된다고 했다. 그는 여자의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었고, 새벽에 그녀의 속으로 다시 한번 들어간 후, 해가 떠오르는 도시 속으로 돌아갔다. 도시의 골목과 도로 위로 한결 쌀쌀한 햇빛이 투명하다 못해 은빛으로 반짝였지만, 그날 아침의 도시는 간밤의 멸망 속에서 또 다시 새롭게 난 것처럼 달라보였다.

그러나 엄마가 있는 골목과 창녀를 다시 찾지는 않았다. 리어카를 끌고 뒷골목으로 나가 그늘 한편에 의자를 펴놓고 간혹 생각이 나는 듯 <과일사세요, 과일!>하고 소리쳤으며, 하루하루는 지리하게 지나갔다.

자신의 한정된 작은 삶 속에서 지겨운 고독과 만나고 있을 때, 전쟁이 터졌다.

뒷골목에도 벽보가 붙고 승전의 호외가 거리를 휩쓸었다. 그리고 거리를 떠돌던 멋진 사내들과 놈팡이들이 군에라도 갔는지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도 골목을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전쟁터 속의 함락된 도시의 선술집에서 승리의 건배를 하고, 이국여인에게 수작을 걸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제국은 그를 부르지 않았다. 제국의 군화가 적들의 땅을 유린하면, 곧 그 소식은 뒷골목의 그에게도 전해졌다. 결국 도시를 배회하던 그 잘난 놈들은 전쟁터에서도 용감했으며, 제국은 자신과 같은 초라한 자들은 필요치 않을 것 같았다. 자신에게는 전쟁마저도 하나의 꿈일 뿐 현실이 아니었다.

거리에는 사람이 점차 사라지고 장사마저 힘들어졌다. 주정뱅이 영감은 배운 것이 없어 글자도 제대로 못 읽는 너 같은 놈은 제국의 기생충이기 때문에 성전을 치를 자격이 없다고 했다. 날이 가면 갈수록 도시는 폐허처럼 공허해졌다. 행인들이 뜸해지고 손님이 없어 하루 종일 좌판을 열어놓고 해바라기만 했다. 더 이상 놈팡이들이 괴롭히지도 않았다.

도시는 껍질만 남았다. 거리를 밝히던 가로등은 이제는 더 이상 켜지지 않았고 사내들이 사라지자 젊은 여인들은 더 이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거리에 환락이 사라지고 어둠과 굶주림과 정적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그는 주린 배를 하고서도 무의미하게 리어카를 끌고 거리로 나갔다. 아무도 그의 좌판을 거들떠 보지 않았으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 밖에 없었다.

생활이 더 이상 나갈 길을 찾지 못할 때, 마침내 제국이 그를 불렀다. 훈련소에 들어서고 난 후 이미 성전은 없고 제국은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감지했다. 솜털이 채가시지 않은 청소년 아니면 중년 사내, 부랑자 같은 자들이 훈련소를 메우고 있었다. 막사 위에 걸쳐져 있는 스피커에서는 아침저녁으로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선무방송이 계속 되었다.

성전은 몽매한 인류에게 제국이 지닌 고도의 유기적인 질서와 제국 내에서 완성된 자유를 열방에 전파하여 사해만민의 복락을 도모하기 위함이요, 이 성전을 치르는 제국신민의 혈한과 심장에서 쏟구치는 충용을 바탕으로 야수 같은 적국의 전선은 함락되고 무신의 가호로 무지한 적들은 괴멸되고 있다고 하였다.

선무방송의 높은 목소리와 충용, 자유 등등, 이러한 것은 자신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제국의 승리와 패배 또한 아무 의미도 없었다. 유월의 저녁, 흙과 풀들이 낮의 열기에 조용히 녹아나는 냄새와 저녁 짖는 밥 내음이 연병장에 가득하고 하늘 저편으로 노을을 뿌리며 해가 내려앉기 시작할 때, 자신이 남들과 똑 같은 인간이며, 아무와도 동떨어지지 않은 군인이라는 것을 느꼈다. 막사의 창 가에 내려앉는 풀벌레 소리에 무한한 애정을 느꼈으며 연병장을 낮게 울리는 트럼펫 소리 속에서 자신이 남과 같다는 동질성과 자신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버림받지 않았다는 느낌을 건져낼 수 있었다. 어린 동료들이 자신을 의지하고 그들과 머리를 맞대고 밥을 먹고 똑같이 훈련을 받고 함께 잠을 잘 수 있다는 데 기쁨을 느꼈다. 자신이 태어난 삭막한 적지 속에서 병영은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고 더 이상의 소외감이나 멸시 따윈 없었다. 그는 나는 똑같다고 소리칠 수 있었으며, 남들과 같이 웃을 수 있었다.

훈련을 마치자 그는 뛰어난 사격솜씨 때문에 특수훈련을 받게 되었다. 훈련단 참모는 그를 불러 군과 같은 뛰어난 사병은 제국의 무훈을 빛낼 별이며 야만스런 적들에게 위대한 민족성과 성전의 역사적인 의미를 만방에 알려줄 수 있는 자라고 하였다. 군의 사격실력은 제국의 동방점령을 완수토록 할 것이며 제국과 동포를 위하여 무훈을 떨쳐줄 것을 부탁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긍지와 자랑에 눈물이 날 것 같았고 제국과 동포를 위하여 신명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

혹독한 특수훈련을 받은 뒤, 저격병으로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는 임무에 따라 위장을 하고서 들 옆 구릉 위나 소택지의 한 곳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다가 적이 오면 총성을 울려대거나, 아니면 달아나는 적을 사냥개처럼 쫓아 그들의 등에 총알을 쏘아 붇곤 했다.

맨 처음 적을 죽였을 때, 만족했으며 무덤덤하였다. 적은 손가락에 느껴지는 방아쇠 마지막 저항감 이후의 느슨함과 개머리판의 묵직한 중량감과 함께 자신의 눈앞에서 풀썩 튀어 올랐다가 땅 위로 스러졌으며 그것은 진실했다. 그 후 화약연기가 피어오르면 적은 허무하게 쓰러졌고 삶과 죽음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제국의 전선은 차츰 밀려갔다. 자신은 밀리는 전선의 끝자락에 엎드려 조준경 속에 눈을 들이밀고 적을 기다렸다, 그리고 일발필도의 총성을 울리곤 했다. 제국은 몰락하여도 그는 승리하고 있었으며 전장 위에 자라나는 가녀린 풀들과 구릉을 쳐다보면 포연 속에 시들어 가는 여름 하늘은 웅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삶이 정점에 도달하였음을 느꼈다. 광막한 대지와 죽음을 초월한 공간 사이에서 자신의 초라한 삶이 존재의 중심점에 흘러듬을 느꼈다. 세상은 자신에게만 적지가 아니라 모든 이에게 허무한 입을 벌리고 있으며, 그와 같은 냉혹함 앞에 풀꽃도 대지의 훈향마저도 처량했고 저녁 놀은 그토록 장엄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자신은 이 적지에 가장 초라한 존재로 태어나 다락방의 명상을 통하여 모든 부조화와 모순의 응징자로 태양과 대지의 기름부음 받았다고 믿었다.

땅바닥을 통해서 자동차의 낮은 엔진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 지글거리는 태양도 이제 가을 속으로 기울 것이다. 적들이 온다. 저들은 나의 기름 받은 손에 의하여 죽어가기 위하여 낮은 엔진소리를 내며 달려 오는 것이다. 나는 안다, 네 놈들은 옳고 나보다 훨씬 잘 났다는 것을. 그리고 너희는 선택받았고 삶은 너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가혹했다. 너희는 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에게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란 없다. 나의 피는 더럽고, 엄마의 증오로 충만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증오야 말로, 살 이유로 가득한 너희의 인후부와 심장에 총알을 박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긍지이다. 이것이 멸시에 가득했던 세월이 나에게 준 은총이며, 네 놈들은 살만큼 산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멸망조차도 아름다운 것이다.

저격병은 총신을 쓰다듬으며 조준경에 눈을 들이밀었다. 그때 조준경의 영점 위로 때 이른 코스모스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것만 같았다.

8월 23일 전선의 날은 뜨겁고 맑았으며, 포연과 함께 태양의 붉은 노을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1978년도 초에 쓰고, 2002.06과 2005.07에 다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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