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와 사유 그리고 담론

오늘 Rantro님의 포스트를 보다가 불현듯 뭔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 작년 네이버에서 이웃과 벌였던 기나긴 대화가 생각났다. 그래서 쓰기를 단념하고 그 대화를 올리기로 했다.

이 글은 ‘05년 5월 6일자로 작성된 나의 포스트<문화와 한자>를 보고서 한 이웃께서 안부게시판에 본인의 의견을 올렸으며, 다음 날(5/7일, 토) 아침 7시에서 11시에 걸쳐 답글을 올렸던 것이다.

답글을 달면서 뿌듯한 우의를 느꼈고, 감히 퇴계와 고봉 간에 오고 간 오래된 편지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이 글을 보내주신 이웃의 열독의 넓이와 사색적 깊이는 진정한 독서인의 수준으로 나와 같은 범상한 생활인이 감히 대적할 상대가 아님에도 답글을 달아 이웃의 의견을 호도하고 그 뜻을 난삽하게 만든 점에 대하여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오랫동안 블로그 안에<비공개>로 담아 두었다.

이웃께서 공개를 원치 않음에도 익명을 전제로 여기에 그 날 오고 간 긴 대화내용을 공개하고자 한다. 공개하고자 하는 이유는 블로그라는 이 공간에서 어떠한 대화가 오고 갈 수 있는가를 한번 예시하고, 오프라인에서 보다 더 한층 진전된 인간관계의 자리를 건설해 낼 수 있다는 비젼을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볼품 없는 포스트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신 이웃께 더 할 수 없는 존경과 감사의 념을 보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웃께서 보낸 글은 갈색글씨, 나의 답글은 남색글씨로 처리해 놓았다. 그리고 이웃의 글은 한 글자도 건드리지 않았으며, 나의 답글은 오자를 수정하고, 익명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블로그 이름 등을 삭제했을 뿐이다. 중간과 마지막의 검은색 글자는 오늘 이 포스트를 정리하면서 작성한 글이다.

참고: 문화와 한자

여인님.. 님의<문화와 한자>를 읽고서 이런저런 ‘주절거림’을 풀어보았습니다. 비판이거나 제안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사유의 확장을 나름대로 하려는 ‘버둥거림’의 한 단면을 보여드리고 싶어서, 길고 긴 글을.. 나누어 올려봅니다.

심하게 말 많다,는 ‘촌철살인’의 비판을 듣고서는 한참, 주눅들어 있답니다. 그래서, 내일 아침, 즈음에… 지울까 한답니다. 덧글, 꼭 달아주셔요~ ^.* 중언부언이더라도.. 용서를.

1. 역사와 문화

삶의 방식 혹은 그 양상the way of life을 문화라 한다면, 문화는 현재적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폭넓게 사유할 수 있을 것이며, 다층적 삶의 양상이 치밀한 결을 이루고 무늬를 직조한 것이 ‘삶’이 될 것이며, 이를 적절한 ‘도구적 사고’로 재편집한 것이 ‘역사’가 될 것이다. 역사는 통시적 맥락 속에서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

반복하자면, 문화를 현재성의 단면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으로 한정하고 문화의 불연속성(은 ‘사유’될 뿐, 실재하지는 않겠지만)을 ‘삶’으로 규정한다. 삶은, 다양한 ‘도구’로 재편집될 수밖에 없다. 언어는 ‘도구’로서 다층적 삶의 결을 이뤄온 현재적 사유의 도구인 것만은 명백하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가 과연, 순결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거듭거듭한 의문에 답을 구해야 할 것이다. 언어의 순결성,은 모든 언어에 적용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한글’과 ‘한자’로 국한하여 문제제기를 해보자.

님의 게시 글을 보고 덧글을 단다는 것이 몹시 어려운 작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제 포스트<문화와 한자>에 대해서 다시 한번 반성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보아야 한다는 점과 두번째는<문화와 한자>에서 언급한 사람은 아니었지만<두 분>블로거의 포스트 속에 깃든<동양적 사고>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했으며, 세번째는 비판적인 입장에서<나>는 동양적 사유에 대하여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느냐 였습니다. 제 글의 주제는 세번째의 비판적 입장에서<너도 한 개도 모르지 않느냐?>에서 시작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진지한 논의를 위해서, 저의 천박한 지식의 꺼풀을 버껴내기 위해서도 님의 덧글을 지우지 않고 남겨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짧은 시간에 달아주신 글을 이해하고 답변을 하기란 제 능력 상 어려운 점이 있어 이미 포스트(비공개로)로 옮겨 놓고 오늘은 간단한 답변만 달고 후일 다시 논의의 도마 위로 올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20050507 07:06]

한자의 유구한 전통은 중세시대를 관통하며 명약관화한 동양적 사유의 수단으로서 또 정치체제의 구축을 위한 실용적 도구로서 그 위상과 위력을 떨쳐왔다. 중세적 사유는 결코 한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한글의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의 ‘지식’을 ‘재편집된 역사’로 가정하고 다층적 정치경제문화적 역관계 내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한글의 ‘창조’를 ‘세종대왕’으로 소급한 것에 대해서는 많은 ‘절절한’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의 만행’이라 비판하고 있고, 그 언어를 단군시대로까지 소급한 주장에 대해서는 ‘합리주의자’들이 ‘비논리’의 잣대로 어불성설을 내세우고 있으므로 일단, 한글의 태생과 실체에 대해서는 이 두 주장의 범주 내에서 사고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해보자면 몇 합리적 민족주의자들은 한글에 윤색을 가한 문화적 권력으로서 ‘중세시대의 지식인층’을 거론하기도 한다. 어느 시대에나 ‘언어’는 사고의 수단이었고, 언어의 치밀한 조직체인 ‘문체’가 어떤 종교의 힘보다 더 막강하다는 판단을 중세의 천재적이며 개혁적인 권력자 정조는 놀랍게 직파하고 ‘문체반정’을 통해 새 세상을 배태할 수 밖에 없는‘새로운 사유’의 뿌리-언어-곧 문체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중세시대의 지식인층이 ‘한자’의 절대 권력을 기반으로 한글의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과 그 사유가 내포한 ‘새로운 시대’의 위협적 가능성을 서둘러 진압했다는 지극히 ‘문학적 상상력’을 발동시켜볼 수도 있는 지점이다.

저는 신화적인 상상력이 부족하며 또한 현실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입장에서<가림토>와 같은 문자가 한글과 동일맥락의 표음문자로 쓰여졌다는 것에는 반대하는 입장이며, <가림토>와 같은 문자는 우선 마헨조다로의 해독불가능한 문자와 동일한 맥락에서 연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정조대왕의<문체반정>이 어떤 맥락에서 연유했는지는 몰라도 단순한 연암 등의 신사고의 제약을 위한 쿠테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조는 누구보다도<신지식인>이었기 때문이며, 그의 修學好古는 과거로 회귀하는 것을 지향하기 보다는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문체반정>을 통하여 절대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친위쿠테타의 명분을 쌓고 있었는 지도 모릅니다. 청이 당시<팔고문(八股文)>으로 지식인의 지식(과 문체)을 자로 잰 듯 재단하고 있었지만 정조의<문체반정>은 그와는 다른 것 같습니다.

즉<문체반정>은 기성의 양반계층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지<민간>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리안족이 인도에 들어가 세계 최초의 인공언어<산스크리스트어>를 만들어 <브라만>사제 계급과<크샤트리아>이하의 세속을 가른 것과 같은<왕>과<사대부>이하의 계급의 명확한 분리, 교회를 라틴어로 세속은 자국어로 나누어 중세를 지배해온<중세적>사고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당시 언문소설의 비약적 발전은<문체반정>과 역의 관계에 있다고 보여집니다.[20050507 07:32]

☞ 사실 나는 정조의 문체반정의 의도에 대하여 나는 거의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2차 윤색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것처럼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하기 짝이 없는 ‘식민 문화 가꾸기’의 일환으로서 진행되어온 ‘언어’에 대한 광범위한, 광포한(감히, 그 ‘사유와 실행’의 범위를 아직도 규명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아주 정치하게!) 왜곡과 윤색은, 기정사실화 되었지만, 아쉽게도 ‘윤색된’ 한글의 본꼴을 향한 ‘회귀’의 노력은 해방 이래 지금까지 다양한 정치 경제 문화적 역관계 속에서 좌초되어왔다.

한자의 매력을 ‘뜻글자’에 둔다. 뜻글자가 갖는 ‘기의’의 깊고 넓은 사유의 가능성은 ‘폭넓고 창조적 사유’에 목말라 있는 중세의 지식인이나 지금의 지식인들의 갈증을 풀어주기 썩 적합한 도구인 듯도 하다. 탐닉되는 이유가, 그래서 ‘한자교육’의 중요성과 열풍이 발작처럼 휘몰아치는 까닭도 여기에 근거한다. 그러나, 과연 ‘한글’은 다만, 단지 ‘소리글자’에 불과한, ‘사유의 한계’가 명백한 혹은 ‘감정어’의 비대함으로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함몰시켜버린, 다른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 이상은, 언어의 완전성을 획득하기에는 미숙한, 유아기언어에 불과한가? 섣불리, 서둘러 답하기에 앞서,

‘한글’을 둘러싼 다양한 ‘정치 경제 문화’적 권력의 작용을 염두 해본다면, 의문의 꼬리 하나 정도는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로, 다사함 김명식선생(하늘말 배움터, 자연의 선생(재야지식인))은 ‘한글’의 뜻글자로서 원래 꼴로 회귀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계신다. 서울의 몇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강의가 있다. 모든 언어가 ‘체용’을 지니지 않고서는 애초 ‘탄생하지도 않았다는 지극히 순박한 ’원시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글의 ‘짜임과 얼과 쓰임’의 본꼴을 확인하려는 어찌보면 무모한 노력을 진지하게 바라본다면, 앞선 질문에 섣부른 답은 일단 유보하는 것이 바람직할 성싶다.

글이란 사고의 그릇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한학(天은 一과 大이다 식)과 같은 문자의 신비화 쪽으로 흘러가는 것은 글의 도구적 기능을 중시하는 것보다 그릇이 멋있네 아니네 하는 논의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언어계통으로 보면, 중국어가 속해 있는 시노티베탄어는 언어(계통)적으로 몹시 원시적인 언어이며, 우리언어가 속해 있는 우랄 알타이어는 몹시 발달된 언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자가 지닌 공간적 고착성은 개념화, 관용화에 몹시 유효하며, 우리의 글은 동사의 변화는 물론 형용사를 비롯한 술어의 변화 또한 다양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 두 문화를 버무린다면 아주 훌륭한 사유의 표현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사실 일본의 문화는 구백년간의 한자와 가나의 병용을 통해서 민간에 토착화되었고, 그래서 개항 당시 전세계 최고의 문명율(독일 빼고)을 지닐 수 있었기에 빠른 시기에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특히 그들의 문자가 한자겸용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도 무리없이 민간에 스며들었고 습득되었다는 점은 참고로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20050507 07:54]

☞ 사실 여기에서 나는 논지를 적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답글을 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모든 언어는 기의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뜻 글자로 어원을 갖추고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자가 유입되면서 우리 고유의 언어의 어근의 의미가 퇴색되어 갔고 유실되었다는 문제다.

2. 도구적 사유의 한계

언어는 사유의 도구이다. 중세의 ‘한자’라는 도구의 광범위한 지배력과 근대 국가 형성 이후의 ‘한글’이라는 도구의 강제된 지배력은, ‘언어‘가 ’사고의 도구‘라는 자연발생적 의미만을 지니지 않고 다양한 정치적 관계 속에 놓여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해방 이후 다양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한글 전용‘의 시대를 살고 있다. 부분적으로 ’사유와 삶의 영역의 확장‘을 위해서 ’한자겸용‘ 내지는 ’공용어화‘에 대한 실용적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고 제기되고 있다. 충분히 숙지하고 검토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제안들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를 구체적으로 하기에 앞서, ‘실용적 가치’ 즉 ‘도구적 가치’로서 언어를 바라보는 관점의 한계와 다만(!) ‘도구적 가치로서 언어’(만)을 전제로 담론이 전개된다면 이는 명백히 ‘경제’적 권력(층)의 과도한 개입일 수밖에 없는, 불균형을 야기시킬 뿐. 일 것이다.

언어는, 도구 이상의 그 무엇이다. ‘그 무엇…이라…?’ 좀 아쉽다.(;;) 하여간, 실용성과 효용성 너머의 보다 본질적 가치를 향한 중요한 ‘뗏목’이다. 그 도구 너머의 ‘뗏목’으로서 언어는, 그러나 명백히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한자’이든 ‘한글’이든을 막론하고, 동양의 광범위한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샅샅이 훑으며 시대와 삶에 영향을 미치며 지나온, 위대한 ‘인식의 토대’를 구축해온 ‘도교’와 ‘불교’가 ‘언어’의 한계를, 어느 지점에서건 반복해서 ‘당부’하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사유의 확장’을 위해 ‘한자 겸용’ ‘한자교육’의 중요성을 제기하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고심해야 할 지점은, ‘언어의 한계’이다. 단지, ‘한글 전용’이나 ‘한자 겸용’이냐의 이분법적 사유로 ‘언어’를 성찰하는 것은, 명백한 한계와 모순으로 치닫는 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더더구나 ‘실용적 확장’이 아니라 ‘인식의 확장을 위해서’라는 참으로 순결한 목표를 향한 논의라면 더더구나!

왕필의 得意忘象은 뜻을 얻었을 때, 象(뗏목으로서의 언어)을 잃어도 된다는 것인데… 사실 그 意라는 것 또한 언어로 골조지어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道可道 不可道 名可名 非常名>이라는 언명이 말은 뗏목에 불과하며 그 너머에 뭔가 있다라는 신비주의적 환상을 심어주고 있는 데, 제가 보기에는 노자라는 노인네는 몹시도 현실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자의<도가도…>란 언명은 칸트의란 감성의 형식을 넘어있기에 알 수 없다 라는 것과 동일한 언표를 갖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왕필의 意란 오히려 이해라기 보다는 오해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데, 모든 이해란 오해일 수 밖에 없으며, 모든 이해는<세계 내 존재>에서 만 기능할 수 밖에 없음에서 볼 때, 해석학적 순환에서 이해의 순간에 반짝이는 것이 意이며, 그것은 일언이폐지에서의 집약으로 이해가 되지, 불교적인 깨달음의 무시간성, 무공간성, 무언어성의 공의 순간에서 찾아온 意는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깨달음은 언어도단, 불립문자의 세계이겠거니와 우리는 말로써 살아가는 依言眞如의 세계에 살고 있는 만큼 離言眞如는 山門으로 가야할 것입니다.[20050507 08:22]

☞ 정치경제적인 역학관계 속에서의 담론조작의 도구로써 언어를 이야기하기에는 우리는 어떠한 담론 속에 살아가며, 그 시대의 담론은 언어학적인 방법보다 고고학적으로 탐색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어떠한 이데올로기 아래에서는 기표는 불변하되 기의 전변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가 목도한다고 하여도…

18세기, 우리 역사에서 중세 말-근대초의 지식인들 뿐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 김시습을 비롯한 시대를 통째로(=총체적으로- 중세의 ‘총체성’의 가능성은, 이미 파편화된 근대 이후의 ‘총체성’보다는 훨씬 유리한 지점이 있다.) 사유했던 위대한 ‘철인’들은, ‘한글 전용’을 주장해왔고 그리고 한글로 그들이 터득한 ‘삶의 비의’를 전수했다. 불교 도교 유교를 합종연횡, 종횡무진하며 방대한 철학적 사유를 펼쳐낸 매월당은, 금오신화에 그 비의를 전수했다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유의 체계’를 세습하지 못한 현대인들의 눈엔 고작 ‘小說’로만 보일 뿐이다. 더 방대한 비의秘意를 담은 금오외전 역시 한글로 전한다,고 한다. 18세기로 다시 돌아가 보면 18세기의 천재적 지식인이었던 박지원과 정약용은, 그러나 정약용은 ‘조선시’의 중요성을 인정하기도 했지만(즉, 새로운 세계의 배태는 ‘새로운 사유(의 수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통찰에서) 그의 많은 작품들은, 그러나 한자로 창작되고 번역되고 있다. 박지원은, 아아, 아름다운 천재 박지원은, 한글작품이 없다. 그의 사유가 ‘한자’로 ‘종속’되고 ‘체제화’ 한 것이, 18세기 실학자들의 한계가 아니었겠는가, 그리하여 결국 ‘주체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근대성’이 우리의 인식 틀로 사유되지 못하고, 서구화된 일본의 사유체계를 ‘이식’해야만 했던 뼈아픈 과거,는 두고두고 되씹어볼 만하다.

우리 국어의 문제점은 바로 님의 이 글에서 연유하였다고 보여집니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무식한 상것들>이 한글로 글을 쓰고 <양반님네들>이 한글로 글을 써서 그 글이 어느 지점에서 합류하여 도도하게 흐르게 되었다면 지금의 문교당국에서 지침 시달이나 병용이다 뭐다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세익스피어가 문교당국의 지침과 맞춤법에 따라 사대비극을 쓰고 소네트를 쓴 것이 아니고, 독자와 관객들의 니즈에 맞추어 글을 썼다는 것, 그리고 방대하게 민간에 축적된 영문자료들에 영국 문교당국은 쫓아가며 유산을 유지, 보존, 재해석해야 하는 종속적인 입장에 설 수 밖에 없다는 결과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문교당국이 불쌍한 것은, 지들 멋대로 기준입네 뭡네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한글로 문학을 정초한 세익스피어나 이태백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문하여 전거를 잘 들지는 못하겠으나, 일본에는 하이쿠의 바쇼와 같은 대가가 있을 뿐 아니라, 겐지모노를 필두로 각종 모노가 있고, 그 무식한 미야모토 무사시조차 낭인 칼잽이의 경험을 살려 ‘오륜서’를 썼다는 것은 부러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한글로 된 민간전승의 풍요로움(토속적이며, 약간 음란하고, 귀신과 바램, 욕지거리 등이 함께 얽힘)이 없으며, 학자들의 심오한 한글 레포트가 없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만약 한글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면, 결국은 국한문 혼용의 길을 밟았을 것입니다. 지식이란 감각과 같은 생리작용을 하기에 역치작용이 있어서 처음에는 한글도 떠듬거리며 배우다가 한글을 깨우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적 갈증으로 한자도 배우게 되고 표현의 명확성을 위하여 한자를 쓰게 된다는 것은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병용의 실태는 편리함도 있지만 명확함에도 있기 때문입니다.[20050507 08:53]

3. 경계 밖을 향해

‘지배자의 도구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는 없다’는, 아주 감동적인 ‘혁명 구호’가 있다. ‘새로운 세상’은 단지 새로운 정치체제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본과 물질과 소유적 삶과 이분화되어 편협해진 인식과 … 그 모든 것들이 ‘지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자냐 한글이냐, 이 담론이 갖는 한계는 명백하다. 더 이상 어떤 ‘도구’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의 ‘틀’ 내에서 논의를 반복하는 것은, 과거의 삶을 답습하고 과거의 사고 틀을 재생산하고 그 구조를 견고하게 만드는 일일 뿐, 창조적이지 못하다. ‘언어’에 대한 논의는 지금의 ‘논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미, ‘한자냐 한글이냐’는 담론 주변에는 다양한 ‘정치, 경제, 문화적 권력의 다층화된 ’시선‘이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 생산적 담론이 되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시선을 ’경계‘ 밖으로 던져야 한다. 과장 섞인 판단이긴 하지만 한번도 우리 역사에서 ’한글‘ 자체에 대한 순수한 논의를 우리의 역사적 관계- 다양한 역동적 질서는 한번도 진행하도록 허용한 적이 없다. 한글 전용/한자 병용의 양자택일적 선택 앞에서 우리는, 몸 틀임을 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이 논의의 욕망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과연 ’한글‘은 ’유아기적 언어‘에 불과한지 ’유아기적 언어‘로 ’진술‘한 지식의 근거가 과연 타당한지, ’한글‘을 거쳐간 수많은 정치권력과 다양한 힘의 작용은 어떻게 작용해왔고 그 오욕의 역사가 입혀온 ’더께‘를 벗겨낼 수는 없는지, 한자의 유용성을 추구하는 것이 창조적이고 확장된 사유를 위한 필연적 선택일 수 있는지 아니면 익숙한 ’인식틀‘의 중언부언이 될 개연성은 있진 않은지, 중세적 질서와 사유를 답습하고 복습할 까닭이 없다면 그리하여 ’어제‘를 넘어선 유연한 사고와 광대한 사변의 눈을 새롭게 확인하고자 한다면, 새로운 인식의 눈을 떠야 할 필요가 발생한다.

전적으로 공감을 하며…

지식과 배움에 틀을 지으려고 하는 데 위정자와 기득권에 뭔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인위인 동시에 인간에게 있어 자연이기에 놓여지고 큰 물이 흐르게 해야 합니다.[20050507 09:06]

☞ 한글은 언어가 아닌 언어를 담는 도구로 이해해야 하며, 그 경우 몹시 우수하다는 것을 이야기했어야 했다.

4. 다시, 인식의 도구로서 언어에 대해

언어가 되기 이전의 순수한 ‘사유체’로서 ‘음악’을 하는 ‘임동창’씨를 보면 때론 그의 ‘경계 없음’ 혹은 ‘경계 밖’을 사유하는 탄탄한 인식의 힘이 부럽기 그지 없다. 그는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을 듯싶다. 동, 서양의 악기를 막론한다. 그러나 어떤 악기도 ‘과거의 방식’대로 답습되진 않는다. 그는 그 악기의 다양한 ‘의미’를 생산해내고 있다. 악기가 내포한 다양한 ‘의미층’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그의 실험은 무한대로 확장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도구’로서 ‘언어’를 부릴 수 있는 능력은 어쩌면 무제한일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하지만 나름대로 확신에 찬, 주장을 펴본다. 언어는 인식의 도구이다. 다양한 형태의 ‘언어’는 인식의 확장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단순한 ‘어휘’적 앎이 아니라 ‘의미 맥락’이 통째로 이해되는 ‘문체’로서의 언어 습득이 광범위하게 펼쳐져야 한다. 한자병용이나 한글 전용이냐의 논의가 갖는 한계는, 논의를 이분화하여 양자택일하게 함으로써 두 개의 ‘모순가득한 담론’이 갖는 한계를 포괄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해버린다. 그리고 한글의 가능성, 한번도 우리 역사에서 오롯이, 제대로 ‘뜻을 펴보지 못한’ 우리의 ‘언어’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성찰의 기회를 갖지 않고서 익숙한 방식으로 회귀하는 것은, 지금 시대가 ‘지역(땅의 영역)을 중심으로 한 문명권의 형성’이라는 중세시대의 세력재편과 유사한 형태로 변화하고는 있지만, 무모한 시대의 역(易)이다. 시대는 이미 새롭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인식의 도구가 새롭지 않다면, 인식 범주의 확장과 ‘리좀적 사유’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비극을 예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님의 결론부에 와서는 공감 밖에 더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볼 때, 한글은 어느 글보다 열린 글의 기능이 크다고 보여집니다. 알파벳에 토씨만 달아도 되고 알파벳을 소리나는 대로 적기에 몹시 용이하여 타국의 언어마저 수용하기에 무리가 없는 글이며, 그것도 시계열적 음운배열이 아닌 초중종성을 한 공간 속으로 압축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국어라는 한계보다 보편글(큰글이라는 한글)로 활용할 수 있는 글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협애한 관점에서 한글을 놓고 볼 것이 아니라, 넓고도 보편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저도 생각합니다.[20050507 09:18]

☞ 사실 뿌리에서 근거한 사고(리좀적 사고)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 그래서 한자병용과 한글전용을 포괄하면서 논의된 담론을 넘어서는 제 삼의 길을 찾을 길이 없는 지도 모른다.

익히 여인님께서 말씀하신 바 있는 두 블로그(가운데, 저는 마콘도님의 경우)의 사유는 경계 없음 내지는 경계(를 굳이 설정한다면) 밖과 안을 자유자재로 왕래하는 ‘뿌리줄기’로서 ‘리좀적 사유’의 한 면을 명백히 보여준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역시, 동양적 사유의 광대한 뿌리의 박약함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신 바 있으나, 모든 포스트를 살펴보신다면, 이미 ‘동양적 사유’의 깊은 이해를 최대치로 확장한 후에 다른 사유의 범주로 그, 튼튼한 인식의 촉수를 뻗어가고 있음(촉수가 확장하는 양상은,그러나 철저하게 ‘비선형적’이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서양의 융합점’이 물리적 ‘융합’이지 않은 이상, 낯선 인식의 토대를 마련할 수밖에 없고, 그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지평을 이미 ‘개인적’으로 확장해가고 있다,는 생각, 놀라움, 기염!

문화는 삶의 모습, 그 자체이다. 현재적 순간의 단면이 문화가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이 비선형적으로 무수한 가능성 속으로 그 촉수를 확장시켜 가듯이, 문화도 확장해가고 있다. 언어 문화는 우리의 현재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다. 그러나 그 언어가 ‘역사’ 속에서 성찰되지 않는다면, 무모한 오해와 억측이 난무할 것이고,

고대인들의 처절한 고뇌의 산물로서 ‘언어’의 참된 가치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용도폐기’해버리는 참담한 ‘문화적 살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뿌리 줄기’의 생명력을 간과해버릴 지도 모른다.

오늘 새벽, 님의 게시물을 놓고 과연 님의 글을 잘 이해하고 답변을 할 수 있을 것인가와 제가 가지고 있는<동양적 사유>란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양적 사유>가 서구의 과학적 사고에 비하여 뛰어난 점은 무엇이며, 그 동양적 사유에 접근하기 위한<나>의 사고의 기반은 어떠한 사고이냐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서구적 사고방식>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즉<동양적 사유>로 직입할 성찰의 방법이 제겐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저는 제가 그러한 <사유>나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건방진 시야에서 다른 블로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사유>나<방법>의 편린이나마 찾아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실<마콘도>님이나 <클라투>그리고 또 많은 블로거들을 볼 때, 그들의 뛰어난 재능은 나의 기대와 욕망을 채워줄 가능성의 비젼이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동양적 사유>에 대해서 대만의 황뚱메이 교수의 책에서 그 일단을 보았습니다만 황뚱메이 교수의 언어도 서양철학의 도구를 빌어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블로거의 포스트를 보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유>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점은 저한테 앞으로도 지리한 의문이 되겠으나 저의 협애한 사고로는 한계에 부딪힐 것인바, 저는 고전이나 읽고 이들은 자신의 뛰어남을 저와 같은 범상인을 위하여 좀 할애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20050507 10:59]

사실 이웃의 글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답글을 썼다고 볼 수는 없다. 분명 이웃은 한자병용과 한글전용이라는 글을 도구라는 측면에서만 보지 말고 이러한 논의를 촉발하게 한 우리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담론을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문화와 한자>라는 나의 포스트를 고집하며 이 글을 쓴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글의 논지를 잃고 단편적인 사항에 집착하여 보다 거시적이고 건설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국한문 어쩌고 저쩌고를 둘러 싼 논의의 가운데를 흐르고 있는 담론의 실체를 정치경제학적 측면에서 여과해 낼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그래서 논의를 초월한 해답을 갖지 못한다. 누군가 초월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면, 양자택일의 지리한 논의는 종식되고 보다 나은 해법과 그에 대한 반대 의견이 제시될 것 같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게시글과 답글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나의 글에 대한 생각을 피력한다면…

가림토나 김시습의 비의나 사다함의 본꼴 등의 논의에 대하여 나는 몹시 회의적이다. 그것은 국수적인 신화요, 환상이라고 생각한다.가림토가 글인지 기호인지의 여부에 대한 연구와 글이라면 실제적인 의미 또는 음운체계가 밝혀져야 하며, 김시습의 비의가 있다면 그에 대한 논문과 비평이 있어야 하고, 본꼴에 대한 명확한 연구결과와 논리적인 정합성 등이 필요할 뿐이다.

글이란 기록을 위한 매체이다. 그래서 사용의 편의성과 정보의 담지체로서의 보존시간(음운변화 등의 통시적인 시간), 각종개념의 조합능력, 의미전달의 명료성, 의미 확장성(造語能力) 등등의 무수한 Function을 유기적으로 잘 발휘할 수 있어야 뛰어난 글이 된다. 그러한 면에서 한글과 한자에는 각각 장점이 있으며, 나는 이러한 도구적, 실용적 측면에서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는 자이다.

본 포스트를 올리는 것에 스스럼 없이 동의해 주신 이웃께 감사하게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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