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은 무엇으로 사는 가

어제 집에 들어갔더니 아내가 말한다.

<여보! 우리 집에 글쎄 빨간머리 앤이 왔지 않겠어?>

외국에서 교환 학생이 와서 며칠을 보내면서, 또 조용한 생활을 뒤집어 놓는 것이 아닌가 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 데?>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왔다니까…>
<그냥 오다니?>

그때 불현듯 스치는 생각, 아들 놈이 방학을 했다는 사실이 뇌리에 와 박혔다. 놈이 염색을 한 모양이다. 아내는 혹시 내가 길길이 날뛰지나 않을까 하여, 미리 초질을 해두려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하고 녀석의 방을 왈칵 열었다. 아들 놈이 이 세상에서 짐짓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다녀오셨어요?>하고 말한다. 역시 빨간머리다.

놈은 염색을 한 후, 그것이 마음에 찔렸는 지 공부를 하는 척하고 있다. 공부라는 것이 모든 잘못의 속죄이고 고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내가 와서, <꼭 짜장면 배달이라도 하려는 것 같지 않아?>

그랬다. 짜장면 배달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머리에 물을 들이고, 한 손에는 철가방, 한 손에는 핸들을 잡고 골목과 길거리를 누비곤 했다.

<가발같은 데…>하고 녀석의 머리를 당겨보자, 그제서야 아버지가 더 이상 혼내지 않을 것 같았는 지 <괜찮아요?>하고 삐식이 묻는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빨간머리냐? 초록색, 보라색도 있는 데?>
<그냥 요.>

그냥 요? 그것은 아버지의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 방식이 아니던가? 즉 <이유는 없고 마음이 꼴려서>(끌려서는 아니다)라는 그 다음에 <귀찮으니까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뜻이 섞여 있지 않았던가?

<나랑 손잡고 할아버지한테나 한번 가볼까?>
<왜요?>
<임마! 가려니까 챙피하냐? 그럼 왜 했냐?>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고, 운동을 갔다오니 완전 면죄부라도 받은 냥, 빨간머리를 해 가지고 자기가 언제 공부했느냐 하고 티브이에 눈을 쳐 박고 있다. 에라이~ 이 짜식아!

나는 아들 놈에게 별로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아내의 말을 빌자면, 그 나이 때 나는 아들보다 좋은 학교에 다니지도 못했고, 영어도 녀석만큼 못했고, 키도 작았으며, 공부도 그만큼 못했다. 다 아들 잘 얻은 줄 알라고 한다. 누가 아들 개판으로 얻었다고 했나? 그러나 아내와 나는 아들의 교육에 대하여 시각차가 크다.

아내는 아들이 잘 살기를 바란다. 나는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잘 사는 것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 다를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뚜렷하게 말할 것은 없다. 그러나 잘 살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좋은 학력이나 좋은 자리, 특정한 능력과 년간 수입,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경쟁과 남과 다르다는 우월감의 확보, 잘 산다는 외면적 기준 등에 부합해야 한다. 그러나 행복하게 산다는 것에는 조건이 없다. 조건이 없는 만큼 행복이란 자신의 내면적 기준에 따라 가꾸어 나가야 하는 더욱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아들은 잘 사는 기능에 충실하되, 행복하게 살기 위한 내용이 불충분할 것 같다는 우려가 나에게는 늘 있는 것이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공짜로 알려줄 것이지만 나도 행복하거나 가치있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왈가왈부할 일은 못되지만, 적어도 외면적인 기준이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아들놈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삶과 온갖 세상의 삶들과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민감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아니 꽃과 새들, 온갖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무한한 동정과 동경을 지녀야만 자신의 삶의 실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고 자신에 다가올 고통과 번민들을 참아내며 일상 가운데 조그만 행복들을 길어낼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세대가 아들에게 준 것은 너무 제한적인 것이다. 나의 자식들에게 세상의 고통들과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고 싶다. 비록 그것이 피상적일지라도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저들이 자신의 세계를 꾸며갔으면 싶다. 아들은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한 채, 토플 점수를 올리거나, 수학의 빠진 점수를 채우고 남은 시간은 1초에 24컷으로 돌아가는 영화에 매료되거나 만화를 본다. 녀석은 책을 읽으면서 느릿하게 줄거리와 내용을 추상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또한 정지된 그림을 이모저모로 뜯어볼 여유를 가지지 못한다.

아들에게 말하고 싶다.

청춘이 그렇게 흘러가도록 우리가 만들었는 데…
미치도록 들끓는 마음을 책상에 가둬두었는 데…

네 머리가 보라색이면, 초록색이라면 내가 어쩌겠느냐? 아들아!
지금 네 청춘이 행복하지도 즐겁지도 않은 데, 네 힘으로 살아갈 그때는 차마 즐겁고 행복하겠느냐?
그러나 항상 생각해라. 잘 살기보다 행복하기를…

… 못난 아빠가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