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과 깁스

비가 오는 탓에 인터넷이 고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머리 속을 더듬거리며 써가던 포스트를 저장하는 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리고 블로그가 열리지 않았다. 저녁식사를 하고 난 후 간신히 열어본 블로그에는 아까 저장했던 포스트는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쓴다.


땀을 너무 많이 난다. 골프연습장의 사장님이 “왜 그렇게 땀을 많이 흘리세요?”하고 묻는다. “남보다 심장박동이 좀 빠릅니다. 그러다 보니 여름에는 견딜 수가 없네요.” 남의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즈음이면 나의 얼굴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다 보니 여름의 더위는 형벌처럼 무섭다. 의사는 ‘갑상선 결절에 의한 갑상선기능항진’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래서 피를 뽑았다. 검사 결과는 정상인데 모든 기능이 정상선의 끝 부분에 치우쳐 있었다. 그러니까 지수 상으로는 정상인 데, 자신의 소견은 기능항진의 예후가 있다는 것이다.

‘갑상선 기능항진’이라는 병은 호르몬의 이상으로 몸이 타 들어가는 증상이다. 신체대사가 신속히 이루어지는 관계로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몸은 열기에 휩싸이고, 체온을 조절하기 위하여 많은 땀을 흘린다. 늘 초조해 하며 때론 격렬한 분노로 폭력적이 되기도 한다. 몸과 마음이 타 들어가기에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지고 몸은 바싹 말라가는 餓鬼의 병이 바로 이 병이다.

때론 아내가 예전에는 차분하던 사람이 성격이 몹시 급해졌다고 하지만, 오히려 더 느긋해진 것처럼 느껴지고 먹기는 많이 먹지만 이 예후가 진행되는 동안 꾸준히 살이 졌다.

그러나 나의 몸은 뜨겁고 심장의 박동은 빠르고 땀이 많이 난다. 그리고 지친다. 그래서 여름이면 이빨이 들뜨고 아프다.

어떻게 이와 같은 질병이 다가온 것인지를 나는 뚜렷이 알고 있다. 올해에도 피를 뽑아 <기능항진>의 정도를 다시 한번 체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고, 깨어났을 때는 네시였다.

잠에서 덜 깨어 소리도 나지 않는 ‘인기가요’를 보다가, EBS로 돌렸다. 문학기행 ‘그 남자의 책, 198쪽’을 하고 있었다. 어느 우울한 도서관 사서가 어느 한 청년을 만남으로써 우울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이야기였다. 내가 본 부분은 “도서관의 창 밖으로 보는 이 곳의 지붕의 색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라고 우울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마 지붕은 삶의 모양일지도 모르고, 변함없는 색은 생활이 늘 그 모양 그 꼴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저 지붕들의 색깔이 변하면 도서실을 떠나려고 했다”고 한다. 그때 도서실 한쪽 구석에서 오른손에 깁스를 한 청년이 책을 테이블 위에 잔뜩 쌓아놓고 그 책들 속에서 만원짜리 지폐라도 찾는 듯 다급하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는 죽은 애인이 전해 주었던 메모, 책제목이 물에 지워져 버린 채 “198페이지를 봐! 거기에는 내가 너에게 하고픈 말이 들어 있어”라고 쓰여진 메모의 그 책을 찾고 있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책의 198페이지를 찾아볼 수 없어서 도서관의 사서에게 자신의 애인의 이름을 대고 그 도서실에서 빌려갔던 책을 알 수가 없겠느냐고 했다. 그녀는 깁스한 청년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애인이 빌려갔었던 모든 책의 198페이지에는 죽은 애인이 청년에게 ‘하고픈 말’같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녀도 서가의 아무 책이나 꺼내 198쪽을 펼친다. 그 쪽의 첫 귀절은 “지나갔었다”였다. 그녀는 독서를 하고 있는 노인네들을 보고 “내 나이 칠십. 모든 어려운 일은 지나갔었다” 라고 읊조려 본다. 그러면서 ‘그 남자의 책, 198쪽’은 ‘그녀의 책, 198쪽’으로 조금씩 전환되어 가며, 더 이상 도서관 창 밖, 지붕의 색이 변하지 않아도 자신의 삶이 조금씩 변화되고 의미가 있음을 발견해 나가기 시작한다.

문학기행의 내용은 좋았지만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청년의 깁스한 오른 팔이었다. 그 팔로 책장을 넘기는 불편한 모양은 고1 때를 기억하게 했다.

세번이나 나는 오른팔에 깁스를 했다. 고1 여름방학에 팔이 부러졌다. 그리고 그 해 육영수 여사가 저격 당했고, 지하철 일호선이 개통되었다. 그리고 사라호 태풍이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학이 되었다. 개학이 되자 “4·19 때도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지 않았다”던 교장은 “국모를 시해한 어쩌고 저쩌고”되지 않는 소리를 하면서 “너희는 분개할 줄도 모르느냐”며, 우리를 거리로 내몰았다.

9월초의 나뭇잎 속으로 이미 가을의 짙은 색이 스며들기 시작했지만, 도로는 한낮의 열기로 자글자글 끓고 있었다. 저격범 문세광하고 일본과 무슨 관계가 있는 지는 몰라도, 다른 학교의 학생들은 일본대사관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우리 학교는 동아일보로 가자고 했다. 그것은 일본대사관 앞에는 무수한 학교의 학생들이 연좌시위를 하고 있는 만큼, 학교 선전이 안되니 동아일보 앞에서 연좌시위를 한다면, 신문기사에 “시내 ○○학교 본보 앞에서 시위”라고 활자화될 수도 있다는 학교당국의 아주 현명(교활)한 판단이라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부터 “뛰어!”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깁스를 한 오른팔을 감싸 쥐고 거리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현동에서 서대문을 지날 때까지 뛰었다. 나는 지쳤고 잠시 거닐고 있을 때 나의 어깨 위로 몽둥이가 떨어졌다. 교련선생은 “자식들이 이렇게 요령을 피우다니”하다가 나의 깁스를 보고 몽둥이를 덜렁이며 스쳐 지났다. 새문안 교회 옆을 지날 때쯤 ‘전원 학교로 복귀’라는 아무런 이유를 알 수 없는 지시가 떨어졌다.

우리는 어른들의 허무하고 치졸한 장난에 놀아났다는 것과 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가에 대한 의문을 꼬깃꼬깃 접어 휴지통에 집어 던져 넣은 후, 학교로 터덜터덜 돌아가야만 했다. 나의 어깨는 무겁고 고달팠으며 팔은 얼얼했다. 그리고 왜 우리가 거리를 뛰어야만 했는 지를 생각했다.

학교로 돌아온 어느 날, 우리는 교정을 둘러 쌓았던 플라터너스 나무가 밑둥에서 부터 잘려나간 것과 이쑤시개가 되었다는 알았고, 이부가리로 빡빡 밀은 머리 위로 떨어지던 햇빛이 얼마나 뜨거운 것인가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월말고사를 볼 수 없다고 하는 나에게 담임은 깁스를 했더라도 시험은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시험에서 일학기의 전교등수에 해당되는 20등을 반에서 했고, 이학기 내내 반에서 20등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고자 했던 동아일보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시작되었고, 일반상업광고주들의 광고가 떨어지자, 시민들이 “동아일보 민주를 위해서 힘내세요”라는 광고를 실었다. 우리 학교의 학생 몇몇이 광고를 냈고, 교무실에서는 그 학생들을 불러 정학이니 퇴학이니 하는 소리들을 했다. 유신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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