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백산맥으로…

이제 태백산맥을 다 읽은 셈이다. 큰 숙제를 끝냈다는 느낌이다. 예전(1981년?)에 보성만의 율포로 가면서 벌교를 지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보성의 차밭은 없었다. 아니 있었다 해도 보성의 한쪽 귀퉁이에나 재배가 되고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창포가 보성강에서 키 높이로 자라 지나는 버스의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보고 난 후 벌교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마 제2부용교를 넘어 흙빛으로 찌질대는 벌교천을 건넜으리라. 당시 부용교 위에서 바라 본 벌교는 코울타르가 먹여진 흑갈색 널판으로 지은 적산의 정미소 건물이 보이고, 벌교천 뚝방 아래로 농협창고와 연노랑색의 벽의 이층건물들로 시간이 더 이상 앞날을 향하여 나가지 못하여 60년대의 여울목에서 머물고 만 소읍이었다.

벌교(筏橋)란 뗏목을 이어 만든 다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여자만으로 펼쳐진 뻘 위에 놓여진 다리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동네는 다리도 많다. 벌교천의 위에서 부터 봉림교, 홍교(횡갯다리), 소화다리(제1부용교), 제2부용교, 철다리(철교)가 있다.

회사의 신입사원 시절, 나의 주무사원이 바로 벌교 사람이었다. “벌교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그 당시에도 있었지만, 그는 참으로 신사였다. 아마 그때 당시에 ‘태백산맥’이 출판되고 내가 읽었다면 그와 많은 이야기 꺼리를 찾아낼 수 있었겠지만, 83년인가 젊잖았던 그가 폭압적이던 과장에게 우리가 보는 앞에서 대들었고 그는 “조직원으로써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상사에게 대들었던 자가 계속 회사 생활을 한다는 것은 조직에 대하여 미안한 짓거리다”하며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재작년 여름 벌교를 또 지났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선 벌교는 더 이상 1981년에 내가 보았던 벌교는 아니었다. 타이루를 바른 오륙층 건물들이 올라있었고, 녹차밭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벌교는 차들과 장거리의 소란함에 휩쌓여 있었고, 머리수건을 뒤집어 쓴 아낙네들은 꼬막이 가득한 스텡그릇을 아스팔트 위에 내놓고 팔고 있었다. 더 이상 아스라한 세월의 더께가 앉아 있는 소읍이 아닌 생활의 분주함과 활기로 난장을 벌이는 곳이었다.

1. 역사와 소설

책 ‘태백산맥’에 쓰여진 작가의 연보는 몹시 소략하다. 그러나 ‘태백산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작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찾아볼 수 있는 연보는 대처승인 아버지 조종현의 4남4녀 중 차남(넷째)로 전남 승주(순천) 선암사에서 43년에 태어나 ‘여순반란사건’을 순천에서 겪었고 49년에 순천남국민학교에 입학을 했으며 충남 논산에서 ‘육이오’를 맞이하고, 53년에 작은 아버지들이 산다는 벌교로 이사한다. 순천 토박이이며 14세인 그는 56년 부터 고향을 떠난다.

그러니까 ‘태백산맥’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암울하게 드리우던 이야기이며, 태백산맥의 재료는 그의 주변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을 것이고, 그는 지나간 이야기들을 채집하여 태백산맥의 끝자락의 아랫동네 이야기를 써나간 셈이다.

우리는 ‘줄거리의 역사’를 배워왔다. History(역사)란 His Story(그의 이야기)라고 한다. 여기에서 그(He)란 바로 여호와이다. 여기에서 역사란 이데올로기적일 수 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다. 역사란 신이 예정하신 섭리에 따라 흘러가며 결국 선택받은 소수들만이 아마겟돈의 불의 징벌을 벗어나 신이 임재하시는 지상 왕국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리라는 것이다. 헤겔이든 마르크스든 동일한 직선사관의 틀 속에서 역사의 추동력을 ‘신의 섭리’에서 ‘절대이성’ 혹은 ‘물질’로 대입했을 뿐이며, 역사발전의 마지막 단계를 ‘절대다수의 자유’와 ‘후기 공산사회’로 대체했을 뿐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도식화, 단순화(줄거리화)라는 문제로 역사 속에서 ‘개인’은 이데올로기에 복속되는 존재일 뿐 역사적 개인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면 Story(소설)는 무엇인가? 단순한 허구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인가? 소설이 현실을 무시한 채 동화로 존재할 수 있을까? 현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이며, 소설은 Our Story이기에 읽으면서 울고 웃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소설은 역사보다 현실적이며 <개인>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우리는 車띠고 包띠어버린 ‘역사’ 속에 매몰되었던 ‘개인’과 ‘민중’을 만났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정래’씨가 바라본 당시의 ‘개인과 민중’이 절대다수를 대표하느냐의 문제는 앞으로도 우리의 현대사에 지리한 물음표로 자리할 것이다. 군부독재가 서슬퍼렇게 엄존하던 1983년, 고통스런 물음표를 우리에게 선사해 준 ‘조정래’씨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불그르죽죽한 소설책을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또한 행복한 일이다.

2. 民衆, 國民, 人民, 民, 個人, 사람

사람이라는 것의 명칭은 몹시 많다. 너무 많아서 다 설명하기란 힘들다. 국민은 양말로 the nation이다. Nation이란 보편적 사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민족, 어느 지역에 사는 사람, 한나라의 사람’ 등을 가르킨다. 따라서 특수성이 개제된다. 인민은 people이다. 그러나 people은 민중과 국민을 포괄한 보다 보편적 개념이다. 그러나 people 또한 정치적인 특성이 탈각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은 정치성은 탈각되더라도 사회적인 개념에서 쓰여지며, 사람이란 종의 특성에서 말해진다.

우리의 헌법 전문을 보면, “悠久한 歷史와 傳統에 빛나는 우리 大韓國民은 3·1運動으로 建立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法統과 不義에 抗拒한 4·19民主理念을 계승하고…”라고 되어 있다. 재야운동권에서는 동학혁명을 전문에 넣자고 헌법개정 때마다 소리쳤지만, 법 개정 때마다 그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것은 ‘민중’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삼일운동의 핵심어는 ‘민족’이며, 동학혁명은 ‘민중’이다. 민족에서 국가로의 이행은 자연스럽지만, 민중에서 국가로의 이행의 과정에서 ‘민중이 아닌 자’는 어떻게 하느냐라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된다. 그리고 ‘민중’의 개념을 어떻게 획정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 ‘민중’을 사회의 기층세력이라고 볼 때, ‘프롤레타리아’와 ‘반민중’으로써 ‘부르조와와 쁘띠 부르조와’라는 대립각이 형성되며 ‘반민중’은 타도할 대상으로 부각된다. 그리하여 미군정 하에서 만들어진 제헌헌법은 ‘민족’에서 부터 시작된다.

그러니까 ‘태백산맥’은 민족이라는 포괄적인 개념 속에서 ‘민중’과 ‘반민중’ 간의 서럽고 처절한 투쟁을 노래부르고 있으며 ‘외세’까지 가세한 싸움은 더럽기만 하다.

공자가 말씀하신 시경의 삼백오편을 한마디로 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라는 것은 민중의 생활 속에는 거짓(이데올로기 포함)이 없다는 뜻이리라. 농사가 잘되면 함포고복의 즐거움을 누리고, 배고프면 고통스러워하며, 그 절규는 개인의 이득을 위함이라기보다 몸과 피가 부르는 절실함이기에 위정자나 제자들에게 “민초들의 소리에는 거짓이 없다. 그러니 그들의 소리를 들으라”고 소리친 것이다.

‘태백산맥’은 사특함과 거짓이 없는 민중의 소리를 짓밟아 누르려는 거짓으로 점철되고 사특한 위정자와 재력가와의 충돌에서 민중들이 산으로 쫓겨가고 굶주림과 헐벗음 속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그들은 ‘평등과 자유’를 얻은 것이다. 산 아래에선 그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나눠주지 못했어도 빨치산의 산 위는 ‘공산주의의 이념’ 아래에선 그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유와 평등’이었지 ‘공산주의’는 아무래도 좋았다.

3. 공산주의, 당, 국가. 민주주의

자유란 얼마나 기가 막히게 좋은 소리냐? 그러나 자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답할 자신이 없다. 민주란 또 얼마나 환장할 소리던가?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울부짖으며 거리에서 찾아낸 민주주의 속에서 민주의 뚜렷한 실체를 나의 뛰는 가슴으로 뽀돗이 보듬을 수 있었던가?

자본주의 국가도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도 자신들의 政體를 민주주의공화국이라고 한다.

북한의 현행헌법 제1장 제1조에 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라고 되어 있다. 같은 장 제4조에 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로동자, 농민, 근로인테리와 모든 근로인민에게 있다. 근로인민은 자기의 대표기관인 최고인민회의와 지방 각급 인민회의를 통하여 주권을 행사한다.”라고 쓰여있다. 제11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 제12조 “국가는 계급로선을 견지하며 인민민주주의독재를 강화하여 내외 적대분자들의 파괴책동으로부터 인민주권과 사회주의제도를 굳건히 보위한다.”라는 등의 알송달송한 말들을 지껄인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이 끝나고 프롤레타리아가 성취한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었다. 공산주의는 전세계 프롤레타리아가 일치단결하여 해방의 그 날을 맞이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 인민(로동자, 농민, 근로인테리, 근로인민)에 의한 一黨 만이 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독재를 한다. 이러한 독재는 인민이 주권을 갖는 민주주의 독재이다.

공산주의가 성취되지 않은 바, 서방 제국주의에 대응하고 반동의 발호(적대분자들의 파괴책동)를 근절하고 세계 적화의 그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그들은 일당 독재(령도)에 의한 일국사회주의 국가의 성립을 필요로 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맞는 셈이다.

이러한 一國社會主義는 당의 령도 하에 서방 자본주의 제국에 대항하여 반동들의 준동(생산수단의 확보)을 막기 위하여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가 접수(사적소유의 근절)하고 전체주의에 입각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일국 사회주의라는 것은 결국 가장 거대한 ‘주식회사 소비에트 1노동자·농민·병사들의 민주적 자치 기구‘로 변모했던 것이다. 모든 생산수단은 당이 지배(100% 지분소유)하는 국가가 소유하며, 프롤레타리아(인민)는 노동을 하고 소비를 하는 가장 고도로 자본집약적인 일국주식회사가 되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자본집약에 따라 빠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나, 결국에는 효율성을 잃어버린 거대 공룡기업이 도산이 바로 1991년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인 것이다.

그러니까 소련은 의제 자본주의에 다름 아니었다. 지금 중국에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등소평이 지껄이면서 경제적 빈곤과 낙후에서 탈피하는 과정에서 벗어난 만큼 중국의 주요모순은 이제 인민의 물질적 욕구와 낙후된 사회생산력 간의 차이로 인한 것으로 규정하고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시장경제를 도입해야겠다는 ‘남순강화’는 한마디로 “우리도 자본주의 한번 해 보자”라는 소리이다. 그러니까 공산주의는 영원한 이념일 뿐이라는 말이다.

자유와 민주가 실체없는 영원한 염원인 것처럼 염상진, 하대치, 김범우, 외서댁, 손승호… 그들은 다가가지 못할 영원한 이념을 위하여 우리의 산하에서 피로써 사라질 일이었다. 그들이 사라진 곳에 자유와 민주가 꽃피우고 모든 이들이 함께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푸르른 동산이 가꾸어 질 것인가? 아니면 역사의 되먹지 못한 날조가 그들의 이름을 더럽히고, 그들은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사라질 것인가?

4. 감상

몇장을 남겨놓지 못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태백산맥’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 민족은 살아남았고 살아갈 것이라는 것, 미선이 효순이를 미군 탱크바퀴 아래 보내면서도 우리는 살아갈 것이라는 것, 비굴한 우리야 말로 민족과 언어을 지키는 바로 그 힘이라는 어느 늙은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살아갈 것이라는 것이 이 ‘백두대간’을 지켜온 우리들의 함성인 것이다.

이 책을 읽도록 권고해 주신 이웃분들께 감사드리며, 책의 마지막에 있는 글을 올린다,

나는 ‘태백산맥’의 거대함을 사랑하기 보다는, 그 구체성을 사랑한다. 구체성이라는 것은, 삶과 역사에 대한 직접성이다. 이데올로기는 삶에 대한 직접성을 확보함으로써만 역사 앞에 순결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관념이 아니라 생명의 분비물이다. 생명의 분비물일 때만,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가동시킨다. 우리는 ‘태백산맥’에서 그렇게 역사를 가동시키는 이데올로기의 힘을 읽는다.

김훈(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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