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과 미소

<창피할 때는 때로 있었지만, 나 자신을 혐오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이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이 싸구려이며, 천박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창피는 다른 이의 시선에 대한 나의 반응이지만, 혐오는 나 자신의 시선에 대한 반성이다. 즉 외면적 형식의 변화는 내 인생 속에 꾸준히 있어 왔지만 자기 자신의 지양을 통한 내면적 발전(초극)은 그만 스톱되어 있었다는 이 이야기야 말로 지극히 혐오스러운 것이다.

친구가 자신의 친구를 소개시켜 주었는 데, 그 놈이 나를 몇번 만나더니 <재수없는 자식>이라고, 그것도 나의 면전에서 말박음을 했고, 굳이 만날 필요가 없어 놈을 만나기를 회피했다. 그랬더니 그 놈은 내가 자신을 알기를 <개똥으로도 알지 않는다>고 하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재수없는 자식>이라고 말한 것이 하나도 그릇된 것이 없다고 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나의 어떤 점이 녀석으로 하여금 <재수없는 자식>이라고 했을까 하고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네가 혐오스러워>하고 여자 친구가 말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다른 남자들은 <뭐야? 이것이 주둥이가 찢어졌다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하며 날뛰었을 것이지만, 나는 <저 아이는 혐오의 뜻이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가? 네가 싫다라고 말하면 안될까?>하는 그런 것이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렇게 욕을 하고 있는 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네? 정말 재수없어> 이런 식이었다. 그리고 얼굴이 시뻘개져 나가는 여자를 쫓아가지도 않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저러지?>하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뾰족하게 떠오르는 잘못을 늘 찾아내지 못했다. 아마 이러한 나의 태도야 말로 그녀에게 분통을 터트리고 <싫다>라는 말보다 더 어감이 강하고 충격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혐오>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서 찾아내게 했을 지도 모른다.

대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 어느 낯선 읍에 들어섰고 간만에 커피를 한 잔 하자고 했을 때, 우리가 들어갈 다방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계단을 올라가면 거울이 있을꺼야. 아마 그 거울에는 [축 발전]이라고 쓰여 있을꺼구, 그 옆에 문이 있는 데 갈색으로 칠이 되어 있군.> 친구들은 계단을 올라서면서 [거울과 거울에 쓰인 글자와 갈색문]에 대한 나의 세가지 예언을 확인했고 <어떻게 아는 거야? 한번 여기 와 봤니?>라고 물었다. <아니, 그러나 다 아는 수가 있지>라고 말했다. 당시의 시골 다방은 대부분 지역 유지나 명망있는 지역 단체에서 보내 준 <큼지막한 거울>을 출입문 곁이나 안에 놓아 두었는 데, 항상 그것을 놓을 위치가 항상 마땅치 않기는 매 한가지였고, 천편일률적으로 그 <축 발전>이라는 글귀와 함께 긴 이름의 무슨 상조회니 연합회 등이 쓰여 있곤 했다. 또한 내가 보았던 창틀에 칠해진 색깔과 베니다판으로 만든 출입구의 색깔은 늘 같았다. 그러니까 세가지 예언이란 당연한 것들임에도 친구 놈들이 한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을 한번 재미 삼아 <발설>해 본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앞에 가던 나는 뒤를 따라오던 친구를 돌아보지도 않고 갑자기 <거기를 아무리 봐도 그 여자는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면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다가와 <어떻게 내가 골목을 쳐다보는 걸 안거야?>하고 묻는다. 그러면 <간혹 가다 불현듯 느낌이 오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놈은 전에 나에게 사귀던 여자의 집이 그 골목 안에 있다고 말했고, 모든 남자들에게 헤어진 여자는 항상 아쉬운 법이며, 고개를 돌려 골목 안쪽을 들여다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놈은 내가 단지 앞서 가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빤히 쳐다보는 듯 이야기했다는 것에 지레 놀라버린 것이다.

이런 예언놀이는 나의 취미가 되었다. 이러한 예언(왜 예언이라고 했는 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이 반복되었고, 명동의 어느 다방에서 만나 히히덕대고 있던 친구 놈들 앞에 내가 짠~하고 나타났을 때, 놈들은 <어떻게 우리가 여기있는 줄 알았냐? 집에서도 모르는 데…>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너희 놈들은 나한테 접수된거야. 방 안에서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했더니 갑자기 여기라는 생각이 들더군>하고 말했다. 아마 이것은 좀더 복잡한 매트릭스적 사고가 필요하다. 만약 A를 잘 안다면 그 놈이 잘 가는 곳은 대충 알 수가 있다. <누굴 만나러 갔는데요?>하고 묻는다. <B를 만난다더군> 그러면 C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혹시 B나 A를 만나러 가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면 놈들이 어디에서 무슨 작당을 하기 위하여 만나고 있느냐가 쭈악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가지의 개연성의 좌표를 엮어보면 특정 지점이 나오고, 세 놈의 무슨 이바구를 나누고 있을 것인지는 투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친구들은 재미 삼아 사소한 예언을 부탁하기 시작했다. 가령 다방에 앉아 있는 남자가 있다면, 누굴 기다리냐고 물었고, <여자>라고 말했다. 어떤 여자냐고 물으면 <단발머리를 하고 치마를 입은 여자>라고 했다. 그러면 다방 문이 열리고 단발머리에 치마를 입은 여자가 들어서서 남자 앞으로 다가갔고, 친구들은 경이에 가까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너 혹시 주문도 외울 줄 아니?>라고 물었다. <아직은 못하는 데… 그것도 가능할 것 같은 데>라고 말했다. <그럼 다음에 이 다방 안에 들어오는 여자를 한번 우리 자리로 오라고 주문을 외워 볼까?>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아가씨가 들어왔고, 우리 자리로 점차 다가오기 시작했다. 친구 놈들은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떠올리며 나와 그 아가씨를 쳐다보았고, 마침내 그 아가씨가 내 옆자리에 앉자, 놈들은 자리에서 뛰쳐나갈 지경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내 여자친구야. 놀라지들 말고 인사들 해> 하고 놈들을 다독거려 주었다.

이러한 예언연습을 그만 두려 했으나, 그것은 영혼을 잠식하면서 점차 신명이 들기 시작했고, 세상이 나의 손바닥 안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 그것보다 모든 것이 나의 뜻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어느 때에는 마치 신들린 것처럼 모든 것을 맞춰 나갔고, <그럼, 내 여자친구 집의 대문은 어떻게 생겼는 지 말해 봐!> <음 대문은 양철대문인 데… 쪽문은 녹이 슬어서 색칠을 다시 해야겠네> <그리고?> <아참! 문까지 계단이 있는 데 별로 높진 않아> <그걸 어떻게 알지?> 그러나 놈은 자신이 그 이야기를 내게 해 주었던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언 흉내내기는 한 일년 정도 한 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대신 어떤 모임에 한 여자가 있다면, 모든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고, 모두들 그녀에게 접근을 하기 위하여 말을 걸던가 갖은 노력을 동원할 때, 가만히 있으면서도 그 여자가 나에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몹시 간단한 일인데도 친구들은 그러한 기법을 몰랐다.

가령 <아무래도 그 여자에겐 검정색이 수호색이 될 것 같아>라고 애매한 소리를 친구 놈들에게 말해 놓은 뒤, 나는 느긋하게 그 말이 발효되는 과정을 지켜보면 되었다. 그러면 어느 날인가 여자는 내 앞에 쭈뼛거리며 나타나 <검정색이 저의 수호색이라니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그러면 <얼굴선이 곱고 목선이 부드러워서 검은 색을 무난히 소화해낼 수 있고, 그 색이 본인이 간직하고 있는 품위를 돋보이게 할 것 같아서… 그만, 주제넘게… 그런데 무슨 과라고 하셨죠? 혹시 그림 그리지 않으세요?>하면, <제가 그렇게 보여요?>라고 다가서곤 했다. 친구들이 보기에는 <나는 가만히 있어도 고고한 저 여자가 어느 날 나한테 다가오게 될꺼야>하던 믿지 못할 이야기가 실현되어 버린 셈이지만, 자신들이 그 아가씨에게 <검정색이 수호색>이라는 말을 전함으로써 다가오게 된 동기를 마련했다는 것을 놈들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면서 놈들은 나보고 이상한 <흡인력>이 있다고 했지만 정작은 나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악마의 장난인 것이다. 나는 점차 그 속에 빠져들게 되었고,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조작해 나가고 있었다. 때론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에 홀린 것 같아>하고 말하며, <난 내가 어떻게 너랑 여기에 함께 앉아 있게 되었는 지 도무지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술수를 벌이는 일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나의 뜻과는 달리 늘 나의 머리는 개연성을 계산하면서, 필연성으로 쉬프트시키는 데 들어가야 할 가장 효과적인 레시피를 생각해 냈다. 레시피만 확정되면 숙성에 필요한 시간은 늘 정해져 있기 마련이었다. 나는 <정지하라! 너 공교롭고 삿된 사고여!>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여름이 되면 방충망을 걷어 낸 나의 방에는 엄청난 모기떼들이 몰려들었다. 한 겨울동안 얼었다 녹은 벽의 균열로부터 습기가 스미고 방 안에는 곰팡이가 피어 올랐다. 곰팡이를 죽여버리기 위하여 테레빈유를 붓에 잔뜩 묻혀 곰팡이가 자라난 벽의 곳곳에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책상 위나 넓은 방바닥 위에는 책과 화구, 캔버스 등으로 가득했고, 늘 두통과 위염에 시달리고 있었다. 친구들은 내 방에서 중세의 마법사의 낡은 지하실을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여자 친구들은 <상상 이상이야!>라고 말하며, 나의 어머니의 인내력에 존경을 표함은 물론 내가 누리는 자유로움이 부럽다고 했다. 그런데 더욱이 이상한 일은 방 안에 가득한 모기들 조차 나를 물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학교 삼학년이 되자, 나의 왕국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독하고 절망스러웠지만 모든 것은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사람들이 겪는 그 소란스러움과 유치함에서 벗어나 왕국은 늘 조용하고 자유로웠다. 그렇지만 친구를 만나도, 여자를 만나도 내 속에는 늘 외로움이 깃들었고, 내가 감정을 지니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과연 우정과 사랑과 같은 색깔이 나의 마음 속에 있는 지 늘 의문이었다.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때는 집에서 멀지 않은 절두산으로 나가 허물어져 가는 오후의 장엄한 빛깔을 보거나 산보를 할 때 뿐이었다.

아마 그때 쯤 <隱身術>을 완성했던 것 같다. 모든 사람 속에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법으로서의 <은신술>은 사실 노자의 <和光同塵>을 이론적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잠언류의 논문이었다. 온갖 서적과 채근담의 싸구려 경구들을 연구하여 <빛 속에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법>을 완성하였고 친구에게 보냈다.

그리고 이삼년의 세월이 지난 것 같다. 나는 제대를 했고, 추적추적 내리는 눈발을 뚫고 오대산 월정사에서 순천의 송광사를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자 친구 녀석이 여자를 소개시켜 주겠다며 전화를 했고, 싫다는 데도 나흘 후 종로의 양지다방으로 나오라고 했다. 전화를 끊었을 때, 어머니가 편지를 전해 주었다. 오래 전 <은신술>을 보냈던 친구의 편지였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제대를 축하한다.

너한테 묻고 싶다.

<무엇이 너를 생각하게 하는가?>

무엇이 너를 생각하게 하는가? 라는 구절을 읽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과연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을까?>라며 마당을 서성거리거나, 아직 길 가로 잔설이 남은 길을 따라 홍대입구까지 산보를 하며 친구의 질문에 해답을 찾으려 했다. 그 해답은 너무 뻔하여 <神>이었다. 그러나 그런 뻔한 답을 묻기 위하여 놈이 편지를 보냈을 리는 없었고, 놈은 뻔히 답을 알고 있으면서 나를 시험하자는 것이었을 지도 몰랐다.

그 날 저녁 밥을 먹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리고 해답을 찾기 전에는 이불을 벗어나지 않기로 했다. 식사 때와 화장실에 가는 일을 빼 놓고는 이불 속에서 <무엇이 너를 생각하게 하는가?>를 눈을 감은 채 붙들고 늘어졌다.

감은 눈 속의 어둠 속으로 행성과 같은 빛들이 스쳐 지나고, 온갖 단어들이 <무엇이…>라는 질문에 들어왔다가 틀에 맞지 않아 덜거덕 소리를 내며 깨지고 또 사라져 갔다. 세상의 모든 단어들과 관념들이 그 질문에 다가와 허무하게 깨어져 나갔다. 불현듯 눈을 뜨면 밤이었고 또 다시 눈을 뜨면 낮이었다. 세상의 모든 단어들이 진실이자 허구였고, 그 뿌리가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의 의식은 하염없이 어둠 속을 표류하고 있었고, 몇 번이나 <그것은 신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에 말려들 뻔 하다가 빠져 나오곤 했다.

해답을 찾지 못하는 한 질문은 영원히 흘러가고, 정신의 모든 부분들이 타오르거나 육신이 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했으며, 눈을 뜨지 않으면 장님이 되거나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때론 잠을 자고 있는 것인지 깨어있는 것인지 조차 모호했다.

좀더 더 나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 까? 답을 찾았던 지 아니면 정신 속에 유폐되어 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생각 속으로 오후 한 시의 시계 종소리가 때~앵하고 밀려들어왔고 갑자기 친구가 여자를 소개시켜준다는 약속이 떠올랐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더 생각을 진전시키려고 했으나 의식은 열려있던 생각들을 하나씩 접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이 <그것은 생명이야. 세상의 관념조차 포괄하는 생명, 사람들은 그것을 神이라고 하기도 하고, 絶對理性 혹은 道라고 다양한 단어로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생명이지>라고 부르짖었고 나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약속시간까지는 두시간 가량 남아 있었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놓여 있었음에도 나의 방은 처음 본 것처럼 낯설었다. 아니 그 보다는 창 밖에서 흘러드는 빛을 태어나 처음 본 것 같았고 경이로웠다. 라디오를 켰다. 음악방송이 나왔고, 아리따운 목소리의 여자 디제이가 어떤 여자의 엽서를 읽고 있었다. 방송을 들으며 나는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그 엽서의 내용에 매료되었을 터이지만, 이제는 그 엽서의 내용이 얼마나 천박하며 값싼 것인가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삼일동안 못했던 세수를 하고, 버스를 타고 눈이 질질 녹아 내리는 광교에서 내려 다방에 들어가 친구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을 때에야 그 곳에 잘못 왔다는 것을 알았다. 아가씨가 왔고 친구가 소개한답시고 뭐라고 떠들고 떠났지만, 너무 깊은 침묵 속에 빠져 있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나를 소개한 후, 아가씨가 묻는 말에 단답형으로 답변을 한 후 다시 침묵에 빠져들곤 했다. 가령 <이 음악 참 좋죠? 그런데 무슨 음악을 좋아하세요?> <매니큐어 같은 것은 바르지 않으시나 보네요?>라는 등의 말로 대화를 이끌 수도 있었겠으나,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나의 무료한 침묵이 상대편에게 얼마나 큰 실례인가를 알면서도 말을 할 수가 없어 간신히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묻고는 그만 자리를 파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고등학교 때의 친구가 왔다. 친구는 전도를 할 요량으로 왔는 지 <너 요즘 교회에 안 다닌다며?>라고 이야기를 꺼낸 뒤, 이러 저런 이야기를 했다. 놈의 이야기는 나와 같이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던 사람에게는 참으로 진부한 이야기였다. 친구는 갑자기 성경의 어느 구절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요한복음 17장을 좋아해>라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는 그 구절을 읽어주기를 청했다. 내가 요한복음 17장을 다 읽자 놈은 <너처럼 성경책을 읽는 사람은 처음 봤어. 어떻게 그렇게 읽을 수가 있는 거지?> <진리에는 힘이 있어. 너희는 못 느낄지 몰라도 난 그걸 느낄 수 있어.>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기독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나의 침묵 속에 갇혀 있던 친구는 <그럼, 그만 가 봐야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친구를 배웅했고 다시는 녀석이 내게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어렴풋이 알았다.

그리고 학기가 시작되었고, 복학을 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곳곳에서 슬픔을 만나곤 했으며, 간혹 울고 싶었다. 가령 버스의 차장이 피로에 지쳐 출입문에 기대어 졸 때,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라하며 차마 깨울 수가 없어서 그녀가 깰 때까지 한두 정거장을 더 간 뒤 버스에서 내려 다시 걸어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침묵 속에서 점차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때론 수다가 터져 나와 한없이 지껄이거나 했지만 대부분 침묵 속에 있는 것이 훨씬 편했고 그 고요함이 좋았다.

그리고 어느 봄날인가 길에서 지나간 세월을 만났고, 그만 내가 나의 왕국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 왕국을 잃었을 때 나는 그만 바보가 되었고 침묵 속에 빠져들거나 슬픔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누군가가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미소, 수줍음을 간직한 미소를 지을 줄 안다>고…

한때는 젊었던 크리슈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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