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시간을 지나며…

아내가 한달 봉급을 톡 털어서 시계를 사 주었던 적이 있다. 그것은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아도, 격에 맞지 않으면 만족할 줄을 몰라. 그래서 애초부터 제일 좋은 것 아니면 안돼>라며 사 준 그 시계는 크로노메터, 즉 항해시대에 경도를 측정할 정도로 정밀도가 높다는 시계였다. 그러나 시간이 맞지 않았다. 한달에 삼십분씩이나 늦게 가는 시간을 조정하고 나자 이제는 한달에 오분씩 빨리 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간조정을 하지 않기로 하고, 시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형편없는 그 시계를 아내가 한달 봉급을 희생해가며 사 주었다는 것 때문에 오년이 넘도록 차고 다녔다. 때론 오랫동안 조정을 하지 않아 십오분씩이나 빨리 가기도 했다.

한두달 전인가 그 시계를 풀고 사은품으로 얻은 시계를 찼다. 한 보름이 지나자 팔뚝에서 종기가 생겼고 가려웠다. 그래서 그마저 풀고 나니 팔이 허전할 정도로 자유로워졌다. 항상 틀리던 시계를 차고 다녔기에 시간을 대충 어림잡아 계산하고, 시계를 보면서도 <지금 몇 시일까?>를 늘 생각해 왔기에 사실 상 시계란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 7시 15분경 철거덩거리는 지하철에서 <수업시간 전에 담배 한대 피울 시간은 있겠지?>하고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거기에는 9시 55분이라고 찍혀 있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55분이라…?>하고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중국어 수업>은 30분에 시작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을 때, 55분이란 기묘한 시간이었고, 더욱이 시간을 보니 9시라고 되어 있었다. <9시 55분?> 내가 예상하던 <7시 15분>과 <2시간 40분>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30분 단위로 다른 나라와 시차를 가진다는 점을 계산해 볼 때, 지구 상에 있을 수 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개찰을 하고, 사무실로 올라가 핸드폰을 꺼내 다시 시간을 보니 7시 20분이었다.

<그럼, 그 두시간 사십분은 어디에서 왔다 갔을까?>

시간의 전송 착오라고 하기엔 기묘했고, <2시간 40분>만큼 비틀린 시간 속을 헤매다가 다시 제 시간을 찾았을 때, 얼마나 안심이 되었던가.

아침의 기묘했던 기분과는 별개로 시간이란 또 얼마나 기묘한 것인가?

시간은 있는 것 같으나, 관념일 뿐이며 감성(대상을 인식 속에 받아들이는 능력)의 형식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인식의 <구속>일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복종>하는 것. 우리는 졸리지도 않지만 시계를 보고 잠자리에 들며, 배고프지도 않은 데 그 시간이 되었다고 밥을 먹는다. 그리고 천금을 주고도 시간을 살 수 없으며 가치있게 쓰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시간이 가질 수 있는 황홀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헤어진 연인과의 마지막 키스가 그립다고 하여 시간을 되돌린다면 마지막 키스는 없고 키스만이 남게 된다는 진부함은 어떻게 할 것인가.

되돌린 시간 속에서 되찾은 청춘이 결코 청춘일 수는 없고, 걸맞지 않는 늙음일 뿐이며, 삶이 덮어놓았던 갈망인 죽음은 영원히 유예되고 말 일이다. 아니면 관 뚜껑이 열리고 <부활>이 아닌 삶으로의 느닷없는 귀환이란 죽은 자에겐 얼마나 황당한 경험이 될 것인가?

<시간이 없는 세계에 머물도록 나를 내버려 둘 수는 정녕 없는 일 인가?>

스티븐 호킹은 <시간의 역사> 속에서 빅뱅으로 팽창하기 시작한 우주가 팽창을 멈추고 다시 수축을 하기 시작하면 시간은 거꾸로 흐르게 된다고 한다. 이런 노가리는 끔찍하다. 수축의 과정 속의 어느 날, 나는 다시 관에서 튀어나와 되돌아가는 삶을 살다가 자궁 속으로 사라진다는 이야기인 데… 더욱 끔찍한 일은 우주는 이러한 수축과 팽창을 용수철처럼 계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태까지 나는 얼마나 많이 태어나고 살고 죽었다가 관에서 튀어나오는 일을 반복했다는 말인가?

더욱 재미있는 가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반대편(아니 이면이라고 하자)에 마이너스 電荷를 갖는 우주가 있으며, 정반대의 존재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마이너스의 <나>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反物質(Anti-Matter) 개념은 無(0)에서 有(양수)가 나온다면 반드시 有에 상응한 마이너스(음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치한 산수가 고도의 천체물리학의 세계에도 여지없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빈약한 상상을 믿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너무 결정론적이거나 양적 우주관 속에서 수학적 정합성에 맞추어 허우적대는 유치한 상상일 뿐이다. 이 가설이 맞던 틀리던 좀더 멋진 신화를 기대하기로 하자.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다음 말이다.

<오늘 아침에 두시간하고 사십분 즉 시간이 40도 각도로 비틀어져 있었던 것을 누구 보신 분 안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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