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굴의 뿌리

그 해 여름에 시인이자 걸인인 그가
장마와 함께 우리 앞에서 사라졌고
우리는 개천에서 건져 올린
그의 찢어진 운동화에
묵념을 올리는 것을 잊었다.
그러자 존경하는 거짓 위로 또 다른
치졸한 거짓이 올라섰고
그 다음에는 어리석은 거짓이 덮였다.
땅은 황폐했고 씨앗은 발아하지 못하여
굶주린 아이들은
석양이 미쳐 날뛰는 들로 나가
바람 결에 떠도는 풍문의 뿌리를 캐어다
폣병으로 콜록이는 어른들의
쾡한 초상 위에 올렸다.
솥에 마른 물을 부어
삶의 부수수한 조각과 함께
국을 끓였고 얼굴 없는 누군가는
탕약처럼 쓰디쓴 국사발을
밥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정작 숟가락은 없었고
침묵의 둘째마디로 휘휘 저으면 그만
뼈조각들이 올라왔다.

찬란했던 공동묘지의 아래에 누워있는 죽음의 이름을 밝히기 위하여 무덤을 파헤쳤고 누군가는 다시 흙을 덮었다. 묽디 묽은 대낮에 인불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는 2시 27분이었다. 거리를 달리던 電車가 섰고 비굴했던 침묵이 내려 나를 노려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너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이슬 09.03.20. 10:16
    비굴했던 침묵이 내려 나를 노려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너다…. 글 잘 읽었습니다.
    ┗ 旅인 09.03.22. 10:55
    간혹은 그랬던 것 같은데, 이제는 저를 보고 소리치는 것조차 없습니다.
    ┗ 이슬 09.03.23. 04:53
    새로운 한 주도 편안하시길….^^

    알렙 09.03.20. 17:31
    우리는 마치 은행의 잔고처럼 조금씩은 비굴의 뿌리를 갖고 살지요. 어느 날은 무엇인가 얻기 위해 남몰래 몇가지 비밀번호를 누르며 꺼내 쓰곤 합니다. 이럴 때는 침묵해야 합니다. 만약 이 사회의 질서처럼, 명확한 스스로의 알리바이를 위해, 살기 위해서란 변명을 하면 그 순간 세상은 거친 이리의 들판이 되겠지요. 우리는 저마다 조금씩 빚진 것처럼 이유들을 데리고 삽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생명의 항변일 수는 없지요. 진실이란 항상 보편에 발 디딘 절반의 협상이지요.
    ┗ 旅인 09.03.22. 10:38
    진실이 용기를 구제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 속에 절반의 협상, 사쿠라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절반의 협상이 감추어져 있던 모양이었네요. 이제는 비굴을 카드빚처럼 남용하고 있습니다. 허어

    솔바람 09.03.20. 20:27
    세월을 지나오며 비겁하게 늘어가는 주름살같은 자기합리화의 훈장들…내가 거칠게 만든 들판은 몇 평이나 될런지 왈칵 부끄럽습니다…귀한 글 잘 보고 갑니다~
    ┗ 旅인 09.03.22. 10:48
    햄버거 한조각 때문에 거칠어지는 땅이 오평방미터. 떳떳하지 못한 것은…? 생명이 의탁한 세상에 대한 빚 때문인지? 비굴해야 살아지는 것 때문인지? 저는 그저 삽니다.

    유리알 유희 09.03.21. 03:04
    낼 잘 읽으렵니다; 지금은 어지러워요.

    러시아황녀 09.03.21. 10:34
    얼마전 소주를 세병째 마시던 시인의 소망이 걸인이라고 해서 선생님 취하셨다고 했는데… 서늘한 것이 지나갑니다.
    ┗ 旅인 09.03.22. 11:04
    서늘한 것이 이제 지나가서 봄인가 봅니다. 봄이어야 하겠지요. 우리들의 비굴했던 그 날들의 지나감을 위하여…

    유리알 유희 09.03.21. 12:14
    찔립니다. 그건 바로 나, 였거든요. 비굴의 뿌리, 그것도 뿌리이니 잘라 버리면 치명적이겠지요. 치명적이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엎드려 있기만 하는 죄, 수치를 안고도 숟가락없이 사발째로 탕약을 들이키고 살아 있는 죄, 값은 이렇게 노래라도 불러야 탕감이 되거늘… 시도 쓰시는군요. 부러버라.
    ┗ 旅인 09.03.22. 11:07
    시는 아니겠지요? 제 말이 언제쯤 시가 되겠습니까? 비굴의 뿌리가 잘라져 혀와 전혀 무관할 때. 그때쯤이야 시가 되고 노래가 되는 것이 아닌지…?
    ┗ 유리알 유희 09.03.22. 13:25
    시 맞어요. 여인님! 하긴 저는 시치지만요. ㅎㅎ 혀와 전혀 무곤한 뿌리라면 객관화는 되겠지만 구체성 상실로 난해시가 될 수도 있지 않으려나? (자신없은 작은 목소리라로 주절주절“ )

    truth 09.03.22. 03:20
    솥에 마른 물을 부어 삶의 부수수한 조각과 함께 국을 끓였고,,,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잘 대하였습니다.
    ┗ 旅인 09.03.22. 11:08
    그러면 살아있는 것들의 거친 맛이 올라올까요?

    라비에벨 09.03.23. 13:32
    그 뿌리는 밟아도 끊여도 삶의 일부일 터이니 아주 조금만 곁에 두자구요. 모나지 않게 정은 피하면서…비굴하여라~
    ┗ 旅인 09.03.24. 08:33
    그 뿌리가 깊어서 캐내도 캐내도 그 끝을 찾아볼 수 없으니… 그냥 제 옆구리에서 자랍니다.

    여명(黎明) 09.03.30. 18:52
    시가 제 마음에 쏙 듭니다.^^ 요즘의 제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해서….잘 감상하구 갑니다.^^
    ┗ 旅인 09.03.31. 20:15
    모두들 마음이 스산들 하신 모양이네요. 몸보다 마음이 더 따스해져야 하는데…

    집시바이올린 09.04.08. 04:40
    그러나 정작 숟가락은 없었군요 좋은 시 감사해요 여인님은 글을 쓸때,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어요 모서리가 딱딱 맞아 떨어져서 ….실제 생활에서도 그처럼 꼼꼼하신지….옆의 이미지는 여인의 가슴이군요 요런건 오디서 구해오시는지…참 신기해요 너무 이쁘요^^
    ┗ 旅인 09.04.08. 16:36
    때에 따라 꼼꼼하기도 하고 엉성하기도 합니다. 이미지는 사진은 어디서 얻지만 추가 가공하여 올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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