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을 읽기 시작하며

책을 읽는 원칙은 단권으로 된 소설만 읽고, 대하 장편소설은 가급적 피하라는 식이었다. 소설을 읽더라도 흥미보다는 그 책이 담고 있는 자양분을 생각하라는 금욕적 원칙을 고수했다. 그러면서도 때론 무협소설에 빠져 몇일을 보내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는 금전적인 이유에도 있다. 나는 책을 빌려 보지를 못한다. 여태까지 무협소설을 빼놓고 빌려본 책은 처남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펼쳐본 후, 다 읽지 못하여 빌려온 책에 불과할 정도다.

소설을 읽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된 것 같다. 그렇다고 딱히 무슨 책을 읽는다고 할 수도 없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을 들자면 김훈씨의 책 몇 권?

태백산맥은 나의 독서의 기준에서 볼 때 예외적이다. 황석영씨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장길산>은 한 줄도 읽어보질 못했다. 박경리의 <토지>도 그렇다. 예전에 유행하던 <대망>도 읽지 못했다.

사실 태백산맥이 해금되었다고 하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가, 블로그에서 태백산맥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들 때문에 할 수 없이 1권을 사 들었고 이제 2권에 접어들고 있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니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재미라는 것보다 논문이나 수필, 신문에서 느낄 수 없는 생동감이 펄펄 살아 느껴진다는 점이다.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공전에 공전을 거듭하던 때에 아버지께 <해방되던 날 아버지의 느낌은 어떠셨어요>하고 물었다.

아버지께선 생각한대로 <나라가 망한 줄 알았다>고 술회하셨다. 그리고 <광복>이라는 것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데 며칠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광복 바로 전 몇 년을 사범학교를 다니셨다. 사범학교란 충용한 <황국신민>을 길러내는 전초에 설 선생을 양성하는 곳으로 식민지 조선 내 어느 곳 보다 <내선일체>가 강조되고, 선생들은 군복정장에 군도를 차고 수업을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 <반도인>과 상당수의 <내지인>이 이 학교를 다녔는 데, <반도인> 동기는 통상 아버지보다 대여섯살이 많았고, <내지인> 동기는 거의 동갑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아버지는 자식들마저 가진 어른인 <반도인>과 함께 할 동족적 정서와 같은 나이의 일본인 친구들과의 정신연령적 동질성 속에서 갈팡질팡하셨을 지도 모른다. 아침마다 부르는 기미가요와 황국신민서사 속에 바래어 어느덧 귀축미영에 대항하여 대동아공영을 부르짖는 대일본제국이 열여덟 살 아버지의 조국이 되었고, 어느 날 졸지에 광복이 찾아온 것이다.

해방되던 날에 대한 질문을 다른 어른들에게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른들의 말씀은 무덤덤했다. 광복이라는 획기적 사건이 그 이후의 무수한 난리로 이분들에게 희석되어버렸거나 아니면 식민지 체제에서나 광복된 조국에서나 그분들의 삶이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는 것일 수도 있다.

점차 커오면서 이러한 어른들에 대하여 약간의 수치심을 느끼곤 했는데, 특히 그런 감정은 외가 쪽에 치우쳐 있었다. 일정시대에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에도 풍족하게 살았다는 것이 결코 이 땅에서는 떠벌릴 수 있는 일이 못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친일이라던가 애국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다 못 먹고, 힘겹게 살았는 데, 나의 외가만 호의호식했다는 점이 수치스럽게 했다. 언젠가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데 부유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제대로 다스려지는 데 가난한 것 또한 수치이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러니 나의 수치는 그릇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사실 조상이 양반입네, 만석, 천석을 했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모멸이 될 수도 있는 역사의 연장선 상에 우리는 놓여 있다.

아마 <광복의 그 날>에 대한 감격이 석연치 못했던 것이 우리의 현대사의 불행일지도 모른다. 그 날의 감격이 치열하였고 오래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면, 우리의 지금은 어떠했을까?

요즘 태백산맥을 읽는다 했더니, <아직도 안 읽어보았냐?>고들 반문이다.

그래서 읽는다. 그러나 나의 심사는 몹시 답답하다. 몰라도 해방공간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현실이 부정 탄 과거를 반석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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