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갈 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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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직면하는 것은 수평선도 차디 찬 조수도 말미잘과 불가사리의 꿈도 아닌 단지 시간일 뿐이다. 수평선은 하늘과 수면을 양분하고 백사장은 폭양 속에 하얗게 빛나며 뜨겁다. 두드러기 때문에 매년 해수욕장으로 갔다. 두드러기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나서는 친구들의 요구에 끌려가다시피 바다로 갔다.

바다는 팔괘 중 태(兌)괘이다. 태괘는 흐르지 않는 물, 연못과 호수와 바다를 뜻한다. 흐르는 물을 뜻하는 것은 감(坎)괘이다. 태(兌)는 <기쁘다(悅)>이다. 그래서 바다와 호수를 보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러나 감(坎)은 험하다 빠지다를 뜻해서인지 몰라도, 강을 보면 심사는 우울해진다. 그러나 잠깐의 기쁨을 위하여 바다가 던져주는 그 지루한 시간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낮이면 숙소의 방문과 창을 열어놓고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었다. 바람은 늘 시원하고 소금에 절어 끈끈했다. 오후 네 시쯤 낮의 태양에 덥혀진 미적지근한 바다 속에 들어가거나, 아직 해가 맹위를 떨치기 이전, 새벽과 아침에 바다로 나갔다. 그러면 모래 위에 차디찬 이슬이 발바닥에 닿았다. 아니면 멱을 감고 난 후 목물을 한 후, 해가 지기 전 바다로 간다. 그러면 바다의 색을 거무스름하게 가라앉고 낙조가 붉은 금빛으로 빛난다. 그렇게 하루는 가는 것이다.

이 어려운 바다를 명상하기 위하여 A. M. 린드버그의<바다의 선물>을 읽고 바다로 가야 할 지도 모른다. 그녀는 “참을성과 신념, 사람들은 텅 빈 시원스럽게 트인 허심탄회한 해변 같은 마음으로 바다가 보내는 선물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실 혼자 있는 시간이 우리의 생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어떤 샘은 우리가 홀로 있을 때에만 솟아오른다”고 하는 그의 말은 바다에 다가선 인간에게 맞는 말이다. 그러니까 바다는 보러 가기 위한 곳이 아니라 시간을 보내고 또 맞이하기 위하여 가는 곳이다.

우리는 바다와 해변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한다. 일출과 일몰을, 갯벌과 바닥이 비치는 맑은 물을, 포구와 넓은 백사장을, 한적함과 늘씬한 비키니의 여자를, 얕거나 깊은 물, 차거나 미지근한 물을, 고독과 연인을, 조개와 생선과 말미잘과 불가사리와 고동껍질과 거친 파도를… 이 모든 이율배반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바다를 보거나 명상하지 못한다. 단지 그러한 바다를 기대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바다로 가는 자들에게 권한다. 가고자 한다면 계절이 지난 바다로 가라. 그리고 마악 부두에 정박한 배처럼 당분간 떠나가는 것을 접어둔 채, 바다에 가까운(바다가 보이면 더욱 좋다) 곳에 방을 얻어라. 밤이 되어 파도소리가 소근거리거나 우짖는 소리가 들리면 더욱 좋다. 그리고 며칠을 보내면 바다가 그대에게 다가서리라. 그대가 외롭다면 더욱 좋다. 때론 바다 쪽으로 난 방문을 열어놓고 편지를 써도 좋으리라.

바다는 이해하기가 너무도 광대하여 빛이 좋은 날과 흐린 날과 비 오는 날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과 봄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민박집 주인은 물때가 바뀌니 몇 시간 만 더 있다가 떠나라고 했다. 우리의 버스가 율포 해수욕장을 벗어날 때, 갈색의 바다 저 편에서 짙푸른 바닷물이 쳐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 명료하게 보였다. 그러니 어떻게 어느 해변이 좋다고 말할 수 있으랴?

시도, 제부도, 학암포, 만리포, 무창포, 변산, 꽃지가 서해, 백도, 경포대, 추암, 강구, 칠포가 동해, 송정, 해운대, 광안리, 다대포, 구조라, 상주, 율포, 땅끝이 남해의 내가 가 본 해수욕장이라고 하지만 나는 어디가 좋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좋다는 것은 순간이며, 거기에 오래 갈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국민학교 이학년 때 해운대로 갔다. 그때 지금과 같은 제방은 없었고 모래밭은 국제호텔 앞까지 그 폭이 1킬로가 넘었던 것 같다. 한 낮에는 모래밭이 뜨거워 맨발로 갈 수가 없어 물까지 슬리퍼를 신고 가야 했다. 물에서 놀다 보면 때론 슬리퍼가 물에 떠가기도 했다. 바다에는 불가사리와 말미잘이 있었고 때론 죽은 물고기의 시체가 보이기도 했다. 보름쯤 지났을 때, 아버지는 돈이 떨어졌다. 어머니가 돈을 가지고 내려올 때까지 우리는 값이 싼 국수를 먹어야만 했다. 나는 밀가루 음식을 먹지 못했다. 아버지는 국수를 많이 먹으면 길게 오래 산다고 하기도 했고, 국수가닥을 입에 물고 후루룩 삼키면 국수가닥이 딸려오는 것이 재미있다고 했다. 아버지의 재미있는 설명과 어렴풋이 느낀 아버지의 호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며 나는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아마 바다 가에서 잠시 다가온 빈곤이 없었다면, 아직도 나는 국수를 먹지 못할 지도 모른다. 만리포에 갔을 때, 아버지는 갑자기 서울에 일이 생겨 올라가고 동생과 나만 남았다. 우리는 심심하였기에 나는 동생의 손을 잡고 길다란 해변과 해변을 따라 걸었다. 우리는 절벽과 파도의 포말과 시간에 따라 수면 위로 다르게 번져가는 빛의 일렁임과 장대한 시간과 태풍이 휩쓸어가는 백사장을 보았다. 그리고 무창포에서는 저어가는 배를 세워 무인도에 홀로 내렸다. 야트막한 무인도에서 해풍의 울음소리와 고독의 시간을 헤아렸다. 그리고 홀로라는 것이 불과 몇 시간 만에 얼마나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며, 무인도가 만들어 내는 망상의 집요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포구의 지친 비린내와 어부의 새카맣게 타버린 등과 심심함에 지쳐 울리는 통통배의 기적소리, 갯벌 위로 밀려오는 밀물, 이런 것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우리는 바다를 보지 못한다. 바다는 너무 크기도 하거니와 너무 깊기도 하여서, 결국 우리는 감각의 해변에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그리고 어부와 포구에 사는 자들은 더 이상 바다를 바라보지 않는다.

추신: 짜근미소님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서 이 글을 올립니다. 그러니 린드버그의<바다의 선물>을 읽고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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