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에 대한 생각-2

서부희 양의 죽음에 대하여

잠깐의 출장에서 돌아와 짜근미소님의 포스트에서 <서부희>양의 부음을 접했다. 신문을 볼 시간이 없어서 직원들과 점심을 하면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는 <길은정과 편승엽>류의 아주 진부하고도 결론이 없는 이야기이며, 명확하게 양측 다 입장 차이가 있어 듣고 보면 다 그럴듯해 보이는, 이 놈 말을 들으면 저놈이 죽일 놈이고, 저 놈 말을 들으면 이 놈을 쳐 죽여야 마땅한 논의 속에 서 있는 주제이다.

그런데 이 글이 짜~하게 내 맘을 긁고 지나는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한 아가씨가 버림을 받았고 그리하여 자살의 길을 택했다는 1960년대류의 스토리라는 점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가지고 신파다 뭐다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쾌락과 퇴폐에 찌들어 있는 이 세태에 <서부희>양은 죽음으로 조용히 질문하고 있다.

<너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그러나 우리는 <사랑>과 <쾌락> 사이에 어디쯤 서 있는 지 도무지 알 길이 없고, <사랑>이 옳은 것인지, <쾌락>이 옳은 것인지 조차 모른다.

세상이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부정하려고 하여도 부정할 수도, 긍정하려고 하여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 세상에 살고 있다.

타인의 도덕적 선함을 욕망하면서도, 스스로가 악행을 거듭하고 있는 곳이 이 세상이라는 점이다. 때론 이 악행은 아마 <선>이라는 것 때문에 틀 지워져 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선함이 없어져 버리면, 악행 또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세상이나, 결국 우리는 <선악>에 물들 수 밖에 없는 존재일 뿐이다.

오늘 서리풀님의 포스트에서 <질투>에 관련한 아주 명료한 글을 보았다. <남자>는 자신의 유전자를 50% 가진 자식을 얻기 위하여 <여자>가 다른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질투>하며, <여자>는 어느 잡놈을 받아들여도 자신의 유전자가 50% 확보되는 만큼 자신의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눈독을 들여서 보호받아야 할 자신과 자식을 내팽개칠 것을 걱정하여 <질투>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투>란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보호기제인 셈이다.

<서>양의 이야기에서 남자는 이미 50%의 유전자를 확보하였기에 다른 <쾌락>을 찾아 떠나고, 남자의 <보호>를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여자는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 된다.

나는 이러한 수학적인 이야기를 떠나서, 그 남자의 가증스러운 행위에 대한 판단을 떠나서, 서양의 죽음이 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시대에 어떤 이야기로 자리매김을 할 것인가 지켜보고 싶다.

오래 전 최인훈씨의 어느 단편에 <세상의 모든 여자가 부정하기를 욕망하면서 정작 자기의 여자만은 정숙하기를 기대한다>는 한 구절을 보고, 무릎을 쳤던 적이 있다.

거기에 바로 <죄>가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세상에 죄 많은 남자들로서 서부희 양의 죽음에 사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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