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한자

1. 문화의 종속성

때때로 입시정책보다 국어교육에 종속된 한자교육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럴 때 마다 석연치 못한 점이 많았다. 우선 문교당국에서는 왜 <낱말>의 수를 확대재생산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축소재생산을 하려고 기를 쓰는 것일까 하는 가이고, 다음은 개념과 술어의 명료성을 위해서는 분명 한자가 도구로써 몹시 유용함에도 그 사용을 원천적으로 제한하려고 하느냐이다.

우리의 국어교육 정책이 식민지를 벗어나 문맹율이 극도로 높은 시점에 시작되어 엘리트 육성보다 <보통교육> 차원에서 한글 중심의 정책을 펼칠 수도 있고, 한자를 가르친다는 것이 교육의 효율성 면에서 뒤쳐진다는 것을 고려할 때, 과거의 문교정책의 일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에서 문명율이 가장 높은 나라라는 점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데도 요지부동, 한자교육을 박대하고 있다.

여기에서 불현듯한자에 대한 박대가 서구 강대국의 농간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서구에 대한 문화적 종속성을 심화시키기 위하여 동양문화와 긴밀하게 관련된 한자 폐지의 기치를 휘날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망상조차 든다.

물론 이것은 확정적인 것이 아니기에 후일 심각하게 연구를 해봐야 하는 과제이리라.

2. 외래어에 대한 문제점

전에 한·중·일 삼국이 외래어 수용에 대한 논의를 가진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일본>은 외래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만 가나의 발음표현 한계 상 외래어를 약화(略化)시킬 수 밖에 없어 외래어가 일어화 되고, 전문용어의 경우 일반인이 전혀 이해를 못한다는 점의 문제가 있고, <중국>의 경우 제한은 없으나 유입된 외래어를 쓰는 놈마다 제각기 달리 표현하여 한 외래어에 무수한 한자표현이 존재한다는 문제가 있으나, 무엇보다 문제는 우리의 한글이 중·일이 부딪히고 있는 문제점을 일거에 해소할 장점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외래어에 대하여 쇄국정책을 쓴다는 점이다. 즉 외국어가 우리나라에 상륙하기 위해서는 비자 발급이 무지하게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용어와 술어를 통하여 학문(과학)과 기술이 유입되는 이 국제화 시대에, 자국어 보호를 한답시고 알량한 짓거리를 교육당국에서 하고 있는 셈이다. 즉 우리 문교당국자들께선 단어의 도구적 기능에 대한 성찰이 엄청 부족하다는 것이다.

3. 사전과 번역의 문제

어떤 책을 읽다 보니 <le discours>라는 단어가 <진술>로 해석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 단어는<담론>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진술>과<담론>의 사이에는 개념적이거나 느낌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사실 이 책은 어떤 책의 번역이 아니라 학자로써 집필한 <구조주의>에 대한 해설서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le discours>가 <담론>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다. <담론>이 푸코, 데리다, 하버마스 등 후기 구조주의와 일련의 학자의 연구에 있어 불가결한 용어일 뿐 아니라, 일상용어 속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구조주의가 언표 간의 차이와 유사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는 작자가, 각 언표는 사회적 약속에 의하여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강조해야 할 자가, 우리나라에서 어떠한 약속체계 속에서 <진술>과 <담론>이 쓰여지고 있는 지 조차 검토가 안된 채 자의적(언어가 자의적이긴 하다)으로 <담론>을 <진술>로 치환해 버린 것이다. 자신은 학자로써 의미만 정확하게 표현하면 된다는 그 입장은 우리의 학계가 형성해 놓은 기존의 질서를 싸그리 무시하는 처사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le discours>가 <담론>보다 <진술>이 적절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학자라면 학계에서 형성한 <약속>과 <질서>에 복종해야 하며, 그 약속과 질서에 반감이 있을 경우 논문과 자료로 기존의 체계를 비판하여 재정립해야 하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할 문제는 아니다. 참고로 이 작자는 <記表>와 <記意>로 정립된 용어도 <能記>와 <所記>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이와 같은 별 것 아닌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낱말>을 아주 우습게 보는 경향에서 근거할 지도 모른다. 영어사전은 열심히 찾아보면서도 국어사전은 장서로써 깨끗하게 보존되는 경향은 일반 가정집 뿐 아니라 상아탑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국어사전의 제작이 일본사전의 번역에 불과하다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4. 다시 한자로

요 며칠 사이에 이러저러한 블로그를 방문한 결과, 그들이 몹시도 어려운 주제를 놀라울 정도로 정치한 사변과 명확한 술어를 사용하여 유려한 문장으로 논리를 전개해 가면서 소화해나가는 것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글에서 동양고전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동양고전이나 불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블로그는 많이 있으나, 그들보다 나는 앞에 말했던 블로그들에서 동서양의 융합점을 바라보고 싶었다. 좌일각 우일변으로 동양고전에 빠진 사람은 서구적 사유에 대한 말이 없고, 정치한 서구의 논리에는 동양적 광대화해의 사고가 빠진다.

우리는 중학교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쭈~욱 영어를 배워왔다. 그런데 한자는? 또 한문은?

문교정책의 기반이 실용성 위주로 한다면, 서구가 특히 미국이 파먹을 것이 많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러나 해도 해도 너무한 것은<국어정책>이라는 것에 의하여 한자를 말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자란 어찌되었거나 이천년 가까이 써왔던 우리 문화의 기반인 것이다.

아들에게 한자를 좀 익혀라 하면 녀석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이 꼭 <또 고리타분한 소리하시네>하는 표정이다. 그 시간이면 영어 한 단어를 더 외우겠다는 심사일지는 몰라도, 한자는 엄연히 우리 글인 셈이다. 우리의 문화는 창피하다 해도 우랄 알타이계통의 韓문화와 시노 티베탄계통의 漢문화의 혼혈이다. 우리 조상이 사대주의네 뭐네 해도 한자를 통해서 문화의 일각을 형성해왔다는 점은 분명하며, 이와 같은 방식은 좁은 땅덩이와 적은 인구 속에서 문화 형성에 몹시 효율적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제 한자를 가르치지 않으니 우리 아이들의 <아이디>는 한국인으로 동양인인데, 우리문화, 크게는 동양문화로 진입할 <패스워드>를 상실한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폐쇄된 도로로 갈 수 없어, 맘에 들던 안들던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문화 쪽을 택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서구는 보편이고 동양은 특수라는 공식이 이 땅에 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결국 이렇게 되면, 동양문화권에서 이탈은 물론 우리문화에서도 탈구가 될 것이며, 서구문화에 대한 종속성은 비약적으로 심화되어 나갈 것이다.

이 한반도에서 최초, 최대로 한글로 인쇄되어 배포된 서적이 성경이라는 점에서, 그 다음이 서구의 과학을 담은 신학문의 교과서이고, 이광수의 <흙>과 같은 사랑 계몽소설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동양이 될 수 없다. 육체는 동양의 것일진데, 뇌수는 서구의 그것이다. 이런 철저한 영육이원론의 유토피아가 바로 여기 대한민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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