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건너편 창고에 대한 메마른 몽상

길 건너편 창고는
한 때 소금창고였다고도 한다.

소금은 바다에 대한 추억보다
햇빛에 대한 기억이 말라가고 덩어리지는 것
그러니까 내륙으로 들어와 죽어버린
바다의 뼈고 햇볕에 풍화된 가루이거나
뱃사람과 요나, 베드로의 물고기들,
그리고 나의 오줌까지
모든 것들의 부분을 함장한 모나드들

염전의 바닥에 오신 소금을 창고에 내버린다. 간수가 질질 흐르고 그늘 밑에서 빠삭하게 말라 잿빛으로 변하되,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불순한 잿빛에 불의 저주가 있을진저

계단 옆에서 담배를 피우면, 사람들이 오고 간다. 짐짓 무심한 눈으로 그들이 계단을 걸어내려 오는 발목을 보거나 얼굴을 본다. 그들의 걸음은 무심한 응시에도 흔들리며 간혹 불쾌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그러면 허파꽈리의 표면을 최대한으로 부풀렸다가 담배연기를 공중으로 내뿜는다. 그러면서 늙음과 젊음에 대해서 그리고 나의 좌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한다. 나의 좌표는 떨리는 저울금처럼 젊음과 늙음의 중간에 위태롭게 놓여져 있고, 그 좌표를 기준으로 늙음과 젊음은 판단되는 것이다. 아가씨가 내려온다. 복부와 자궁에 대하여 몽상하려 했던 나에게 햇빛은 목과 턱을 비추고 젊음이 얼마나 빛나고 값진 것인가를 보여준다. 걸음걸이에 깃든 긍지조차 볼 수 있다. 그 후 초로의 아주머니, 계단의 높이와 연륜의 반비례, 걸음은 짧고도 신중하지만 흔들리고 무겁다. 사람들이 지나가 버리면 텅빈 공간의 한쪽 구석에 꼬질꼬질한 담배를 부벼끄고 하루에 주어진 그 좁다란 공간을 다시 한번 바라본 뒤 엘리베이터의 밀폐된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먹는 것은 땅의 소출임에도 그 식물에 대하여
아무 생각을 못하며
늙음, 육체에 깃든 시간에 무지한 채
정신을 긁고 지난 시간 만 재어보려는
이 무모함은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이 전면적인 무지와 편협한 정신의 사유를
어떻게 하란 말이며
육신의 사유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제 소금창고는 비어버리고 바닥은 견고하게 굳었다. 거기에 쌓아놓은 허접한 것들은 최소한 곰팡이가 끼지는 않겠지만, 염해로 백색의 허연 거품집이 생기고 녹으로 기공이 생기며 삭아내리곤 한다. 그 거품 모양은 흉측하며, 붕괴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붕괴를 방지하기 위하여 허접쓰레기들의 아래와 위를 바꿔 놓기도 한다.

보는 것(風地觀)은 땅 위로 바람이 부는 것이다. 하늘과 태양을 보는 것을 가르켜 눈이 좋다할 수 없다. 글에 나의 생을 본다(觀我生)라고 쓰여있다. 그러나 돌아볼 나의 생이란 있다는 것인가? 허물어진 벽 틈 사이로 스며든 바람(風)은 소금창고의 바닥(地) 위를 스쳐 지난다. 창고 안은 들여다 보기에는 어둡고 바닥은 딱딱하고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다. 단지 쥐똥이 한 쪽 구석에서 냄새를 피우며 말라 갈 뿐이다.

사유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은 시계로만 재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기란 이 도시에선 어림없는 일이다.

영혼의 양식을 찾기엔 지상의 양식에 너무 무지한 셈이다. 생명에 대한 식물의 가르침이란 일년생이건 다년생이건 경이롭기만 할 터인데도 내가 아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창에 눅진하게 내려 앉는 봄철의 나무의 수액이 번거롭기만 하고, 육신의 사유인 노동과 굳은 살, 근육 사이에 스며드는 고통과 피로를 감내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노동이 끝난 뒤의 감미로운 수면과 허기와 갈증 끝의 포만이 뇌수에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가 또한 알지 못한다.

너의 생의 불순은 들의 가라지와 같이 창궐하여
추수할 소출은 없고 씹을 것이 없느니
네 육신의 정기는 메말랐거니와 어찌 네 영혼이
구원을 받겠느냐
너의 참회의 근원은 바로
탐욕과 무지라
어찌 인자의 귀에 용납될 것이느뇨
귀먹은 저리의 심판으로 내쳐져
무저갱에 던져지리라

고대의 연단술은 육신의 정화와 정신의 총화를 그러모아 불로써 시간을 굽고 거친 것을 내뱉고(吐) 진기는 받아(納) 정수(丹)를 걸러낸다. 진리란 쉽게 설명되고 쉽게 이해되는 것이라 한다. 말인즉 쉽거니와 논리와의 결구 또한 진리다. 쉬운 것처럼 다다르기가 어려운 것이 어디 또 있던가? 천년의 풀무질과 담금질을 통해서 맞이하는 온갖 경험이 타오르고 여과된 끝에 부딪히는 광막하여 지순지정, 단순으로 환원할 수 밖에 없는 지경이 그것이다.

길 건너편 창고의 벽은 허물어지고
지붕은 무너져 내려
사대는 흐트러지고 무화될지언정
네가 알 것이 무엇이던가?

1 thought on “길 건너편 창고에 대한 메마른 몽상

  1. truth 08.11.23. 21:12
    세번째엔 우연히 Andre gagnon의 Smoke gets in your eyes를 배경하여 이글을 읽게되었어요..느낌이 그때마다 달리 전해지고 사색의 깊이도 넓이도 때마다 다른언어들에 꽂혀 잠시 쉬어가게됩니다. 좋은글 생각하게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유리알 유희 08.11.24. 00:41
    아! 거기가 어디메쯤 일까요. 저도 건너편 창고을 바라다 보면 이런 사유깊은 글을 쓸 수 있을라나. 그 창고가 하필이면 소금창고였군요. 소금, 그것이 지닌 무수한 의미, 그것이 스쳐가는 행인들과 어울려 던져주는 생의 여로를 즐감합니다., 여인님!

    꺽수 08.11.24. 13:25
    진리 행복 소금창고 등은 가까운 곳에 있는데 맘엔 그리 멀리 있었군요…좋은글 감사드립니다.

    旅인 08.11.24. 13:46
    기회가 된다면 염전을 가보고 싶습니다. 거기에 길 건너편 창고(사실은 예전의 블로그 이름입니다)가 있겠지요. 염전에서는 소금을 만든다고 하지 않고 소금이 오신다고 한답니다. 그러니 소금이란 긴 기다림의 산물인 것 같습니다.
    ┗ 꺽수 08.11.24. 19:19
    다니던 페염전이 어느날 사라졌더군요 그 후론 가보질 못했는데 아름답군요…떠날때를 알아 떠나는 페염전 낙엽과 글구 유희님이 올려주신 낙화…대비되어 긴 여운이 남네요…
    ┗ 旅인 08.11.26. 19:01
    아주 어릴 적에 염전에 간 적이 있는데 한낮의 땡볕 아래 저수지에서 증발지로 바닷물을 길어올리기 위하여 수차를 밟는 소리가 끼윽끼윽 들리고 결정지 위에 하얀소금이 설탕처럼 오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낮의 정적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죠. 그리고 한번도 염전에 가보질 못했으니…

    라마 08.11.24. 21:13
    ‘관아생’이라는 말을 읽다가 ‘관아지생’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나를 관(찰)하는 일이 곧 사는 일이다’라는, 또다른 몽상의 갈래를 더듬어봤습죠^^,
    ┗ 旅인 08.11.26. 18:53
    주역의 글귀들은 고어 중에 고어라서 해석에 난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관아생은 관아지생과 동일한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으며, 觀我是生之事也로 풀어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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