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과 실존

<나>란 타인의 관념의 조각이다. <나>란 이름과 용모·성별·나이 등 차이에 의하여 타인과는 달리 변별지어진 좌표이며, 부모형제·친구·동료·애인·아내·자식·국가 등과의 관계 속에서 설정되어지고 균열되어 조각들인 개체들을 어거지로 묶는 구심점일 뿐이다. <나>란 결국 생각하는 그 누군인가로서의 <나>라는 코기토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관계의 그물망 속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게 결정되어 있는 실존적이고도 연기론적인 <현상>에 다름 아니다.

실존의 세계에서 구축된 <내>가 0 과 1의 깜빡거림을 통하여 On-line을 타고 블로그나 싸이월드, 카페로 올라가 실명이나 익명으로 자리잡는 만큼, 익명의 세계 또한 실존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익명의 세계는 이름 등의 외면적 껍질을 벗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약간은 자유롭고 관계의 그물에서의 일탈을 누릴 수도 있다. 즉 <나>는 꾸며질 수 있고 변조할 수 있다. 나의 나이는 스물이고 꽃같이 아름다우며 돈도 풍족하고 훌륭한 덕성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는 반면, 온갖 추잡한 짓거리를 할 수도 있는 곳이 익명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컴퓨터의 스위치를 끄고, 헛기침을 한 후 실존의 세계로 내려가 후줄근한 그 모양 그 꼴로 <밥 먹고, 똥 싸고, 잠 자면>, 익명의 세계란 지나간 하나의 유희, 가면극처럼 야릇한 추억이 될 것이다.

이청준의 어느 소설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싸롱(70년대에는 맥주를 파는 집을 그렇게 불렀다)에서 마담과 손님들이 가면을 쓰게 되면서 각자의 인격이 가면의 지배에 굴복하게 되는 심리적인 상황을 잘 그려내고 있었다. 이청준은 상당히 비관적으로 가면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지만, 블로그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현상은 다소의 부작용은 있을지언정 상당히 낙관적인 셈이다.

가면도 인격인 셈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타인의 기대에 부응해나가는 방식으로 다양한 가면을 쓰고 있다. 인격이란 단지 가면에 그려진 그림일 뿐이다. 그래서 익명의 세계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실존의 세계에 임팩트를 미치게 되고, 자기가 설정해 논 자아의 표상을 닮아가기 위하여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익명의 세계는 가꾸어 져야 한다.

익명과 실존의 세계를 오락가락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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