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으로 가는 계단의 세번째…

천국으로 가는 계단의 세 번째 디딤돌은 중앙극장에서 명동의 뒷골목이 연결되는 백병원 골목을 지나 저동으로 가다가 우회전하여 퇴계로로 올라가는 좁은 길, 영락교회의 건너편에 있었다. 교회로 가는 사람이 붐비는 주일이면, 그 계단은 희미해지고 아예 흔적조차 없기도 했다. 그 디딤돌이란 교회의 맞은 편, 조그만 카페의 안, 창 밖이 내다보이던 낡은 의자였기 때문이다.

천국으로 올라가는 네 번째 디딤돌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세 번째의 디딤돌이 아직도 거기에 있는 지조차 알 수 없다. 믿음과 경건, 그리고 선의에 복종함으로써 천국에 오른다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단지 그 낡은 의자에 앉아 있던 시간들 속에서, 뚜렷하게, 거기가 천국으로 올라가는 세 번째 디딤돌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다.

“너 요즘 어디에 가 있는 거냐?”
“좋은 곳이 있어. 때론 거기에 가 있곤 해.”
“어디인데?”
“말해 줄 수 없어.”
“왜?”
“거기에 있으면, 계절이 스쳐 지나는 것과 연인들이 천천히 걸어가는 것을 볼 수 있지. 조용해서 가만히 앉아 책을 보아도 되지. 그 곳을 너희에게 알려준다면, 금방 시끄럽고 너저분한 곳으로 변할 것이고, 다시는 이 도시에는 발 붙일 만한 곳이 없을 거야.“

단 한사람만 나의 이기적인 고독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나의 여자친구였다. 아마 명보극장이나 스카라에서 영화를 보고 난 후, 명동으로 걸어가다가 약간의 피로감에 쉬고 싶을 때, 사거리에서 두리번거리다 카페를 찾아냈고 우리는 그만 거기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그 후로 종로나 명동에서 시간이 남거나 할 일이 없으면, 그곳으로 갔다. 창을 마주하고 앉아 있으면, 때론 젊은 아가씨들이 지나다 창 밖에서 나를 쳐다보곤 했다. 그러나 아가씨들이 나를 쳐다본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창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본 것이었다. 나는 유령처럼 실내의 어두움에 휩싸여 온갖 지나는 사람과 계절들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창 밖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늘 창 밖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고, 일주일에 한두번 그것도 오후 세시쯤 그곳으로 가곤 했기에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야금야금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늘 약속시간보다 앞서 그곳에 가곤 했기에 카페의 아가씨가 나에게 말을 넌즈시 건네곤 했다.

“아직 애인이 안 오신 모양이네요?”

잠시 그 아가씨에게 미소를 떠올린 후, 개의치 않고 읽던 책을 계속 읽는다.

그러면 여자친구는 카페의 바깥 유리창에 손을 대고 그림자를 만들어 그 속으로 눈을 들이대고, 카페 안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있으면 창을 손으로 똑똑 두드렸고, 내가 고개를 들면 환한 미소와 함께 문에 매달린 방울을 딸랑하며 들어왔다.

“오래 기다렸어?”

내 곁에 앉는 그녀의 몸에선 거리에 가득한 계절을 스쳐지나온 냄새가 잠시 쏟아져 내렸다. 산들바람이 스쳐 지난 풀냄새이거나, 마른 커피냄새와 같은 것, 겨울이면 세수비누처럼 맵고 차디찬 냄새가 났다. 그 냄새들 속에는 항상 감촉이 따스한 그녀의 향기가 섞여 있었다.

“아니 일부러 한참 일찍 왔어,”
“왜?”
“여기 있으면 마음이 편해. 그리고 너를 기다리며 책을 읽는다는 것도 좋고.”
“오늘 수업은 안 빼먹은 거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영락교회 앞을 느릿하게 지나가는 오후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너 저기 교회에 가본 적 있니?”
“한번 있었지.”
“예배당에?”
“그래.”
“왜 천당에라도 가려고?”
“나도 양심이 있기 때문에 천당에 갈 생각은 않고 있어. 노력도 안할꺼구. 지금 이 자리가 좋아.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세 번째 디딤돌에 앉아 세상을 보는 기분이야. 그리고 내 옆에 네가 있잖아.”

그때 바람에 플러터너스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떨어지기 시작했고, 을지로에서 퇴계로로 이어지는 한가한 도로 위로 가을날의 햇빛이 웃음지으며 늦은 오후로 걸어가고 있었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유리알 유희 09.01.30. 17:20
    아! 감미로워라. 지금도 그 계단과 그 카페가 있을까요. 여인님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책을 보면서 누군가를 기다려 보고 싶어지는. 센치한 소녀의 글 같습니다. 선하고 아름다워서요. ㅜㅜ
    ┗ 旅인 09.01.31. 18:36
    그 시절에는 다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자리가 어디엔가 있지 않았을까요? 아마 지금 그 자리는 없어졌을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드네요. 에이 천국으로 가는 네번째 계단이나 찾아가볼까?

    난 향 09.01.30. 20:21
    창문에 걸려 있는 꽃들의 어우러짐이 매력적입니다…누군가를 기다리며 책을 읽는 모습이 참 행복해 보입니다….
    ┗ 旅인 09.01.31. 18:37
    그런데 책이 잘 안 읽혔습니다. 그녀를 기다리느라고 정신이 딴 데 가 있어서… 하지만 행복은… ^^
    ┗ 난 향 09.02.02. 14:10
    물론 엄청행복했을 것 같아요..사랑이란 제 3자는 잘 모르거든요..상대방과 자신만의 교감이니까요..
    ┗ 旅인 09.02.02. 14:34
    그럼요. 다시 그런 시간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유인 09.01.30. 22:45
    밖이 잘보이는 찻집에 앉아 뭇 지나는 사람의 표정이나 걸음걸이 차량행렬을 바라볼 때면..참 재미있고 앉아 있는 내가 행복스럽게 느꼈든 기억이 이글을 읽으며 떠올려봅니다.^^
    ┗ 旅인 09.01.31. 18:39
    그렇죠? 사람들이 지나는 모습을 보면, 무의미하기도 하고 심각하기도 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저도 우습고, 시간이 흘러가는 그 모습들이 차분하고 좋지요.

    라비에벨 09.01.31. 11:43
    천국의 계단은 그리 은밀한 곳에 있군요…
    ┗ 旅인 09.01.31. 18:40
    에벨님도 한 군데 마련하시지요.

    truth 09.02.01. 21:38
    이쁜그림을 보고있는듯..절기의변화 그속에 많은 인생들의 행동들이 다..들여다보이는듯합니다. 바람결에 흔들리다 떨어지는 플러터너스 아..참 한가롭고 아름다운날의 소중한기억입니다.귀한글 잘감상했습니다.
    ┗ 旅인 09.02.02. 14:34
    서울에서 그만큼 한가한 거리도 없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마음으로 창 밖의 그 길들을 바라볼 수 있었죠.

    꿈처럼 09.02.05. 02:09
    풍경 좋네요. 설마 당시에 신분이 교수셨던 건 아니죠? “오늘 수업은 안 빼먹은 거지?” – “그렇다고 할 수 있지.”
    ┗ 旅인 09.02.05. 09:18
    학생이었는데 하두 수업을 자주 빼먹어서… 제 여자친구가 체크하곤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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