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그릇

장사가 안되다 보니 아침부터 전무가 불러 이러저런 이야기를 한다. 공연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기업의 논리가 현실을 강박할 수 있는 것은 시장에서가 아니라, 조직 내부에 해당될 뿐이다. 밖에서는 현실이 선행하며, 논리는 설명할 뿐이다.

영업팀장이라는 것은 야전의 연대장쯤 될까? 그러나 전선은 교착상태이고, 통신은 두절되었다. 사단장은 자신이 어제한 말을 번복하고 있다. 우리는 개활지를 포복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습지로 우회하여 어제 파 놓았던 참호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정작 있어야 할 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지리할 뿐 아니라 황당하기도 하다.

“상해의 모든 비드가 그제부터 잠수했습니다.”
“싸게라도 오퍼를 던져서 물건들을 풀어야지…”
“수익은 어떻게 하고요?”
“우선 팔고 보는 것이 장사 아닌가?”

내가 언제 아니라고 했던가? 야포를 개활지 쪽으로 두드려대고, 다소 희생이 예상된다고 해도 한시 방향으로 잽싸게 약진, 언덕 위에 진지를 구축하면 최소한 밀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야포는 2연대를 위하여 집결되었다. 열두문의 야포는 포신이 녹아날 정도로 적진의 칠부능선을 때렸다. 그때 우리 연대는 배를 땅바닥에 깔고 자갈 밭과 웅덩이를 지나 언덕 아래의 숲에 도달했다. 그러나 2연대는 화력지원에도 불구하고 밀리고 말았다. 그러자 열한시 방향에서 적들은 구릉을 따라 여덟시 방향까지 내려왔다. 딱쿵! 따라라… 딱쿵! 적은 우리에게 물러나라고 간헐적이고도 산발적으로 총질을 해대었고 적의 곡사포가 우리의 후미에 피웅~ 펑! 하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숲으로 들어서면 적들은 개활지를 횡으로 가로질러 우리의 허리와 후미를 끊을 것이고 우리는 고립될 것이었다. 우리는 여덟시 방향의 적을 등지고 숲의 허리를 따라 두시와 세시 방향에 있는 습지를 향하여 뛰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그렇다고 너무 음울하게 생각할 필요도,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담배를 피우기 위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을 내려간다. 담배를 피우다 보면, 타부서의 직원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심각한 만큼 재미가 없다.

“박부장이 있잖습니까? 킬로당 딱 십원만 깎아달라는 데요?”
“야! 전략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번은 조금 희생을 해야만 하는 것 아니냐?”
“피벗 테이블을 돌려봐!”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회계적인 지식이 필요한 데…”
“너의 관점은…”
“지난 주 목요일에 A사 김차장 그 새끼하고 술을 먹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경제학은 대충 D+의 수준에 머물렀다. 사실 그 이상 배워보았자 쓸모도 없는 것이다. 그 전제조건은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되, 재화는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뻔한 이야기이며, 이 세상이 한마디로 <餓鬼道>라는 이야기이다. 일단 여타의 변수는 시장에 영향을 그다지 미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는 지점에서 가격과 수량이 결정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아귀지옥>은 수요 공급곡선을 놓고 볼 때, 인간의 욕망이라는 심리태와 상품(재화와 용역)이라는 물질태가 <돈>이라는 지수에 수렴되면서 이익도 손실도 없는 평형을 이룬다고 한다. 이것은 아름다운 환상이다. 완전경쟁시장은 경제학의 논리가 춤추는 무대인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U-MARKET>인 것이다. 그러면 이른바 부르조와도 프롤렐타리아도 없다.

다행이게도 시장이란 비평형적이며, 왜곡되어 있다, 이러한 왜곡된 시장에서 우리는 <제로섬>을 향한 피튀기는 경쟁을 하는 것이다. 버는 놈이 있으면 잃는 놈도 있다. 죽지 않기 위해서 기업은 시장에 좌판을 벌이고 우리를 그 위에 세우고 <자! 골라, 골라>를 외치게 하는 것이다.

완전경쟁시장이 존재한다면 장돌뱅이는 더 이상 필요없게 되고, 나는 <백수>라는 궁색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완전한 세상, <에덴>에서 그 벌거벗은 잡 것들이 무화과를 따 먹을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은 마르크스나 헤겔이 지향하던 역사가 종언을 고하던 그 날, 이성의 본질인 자유가 사해만민에 구현되거나, 마침내 후기 공산사회가 도래한다고 하여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완전한 세상이란 생각보다는 존재하기가 몹시 어려운 것이다. 완전한세상보다, 이 불완전한 세상이야말로 눈물에 젖은 쉰밥이나마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비극은 그렇게 현실에 용해되어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그렇게 교회 안 나가면 지옥 간다.”

나는 대답했다.

“설령 천국을 간다 해도 거기에는 기독교인 밖에 없는걸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지옥갈래요.”

천국을 포함한 이상사회를 향하여 가자고 하는 선동의 목소리는 높아도 정작 그에 대한 이야기는 터무니없이 빈약하다. 그러니까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은 있어도 정작 그 형식은 공허라는 것이다. 불완전한 세상에서 터무니없는 생각을 해왔던 우리는 동굴의 벽, 반대편 그 빛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지옥을 말하고 고통스럽고 비참하고 타락한 현실을 이야기 한 후, 그 반대가 천국이요 유토피아라고 말한다. 역사가 끝나는 자정 이후에 서 있는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결단코 모른다.

저 언덕 너머에 파랑새가 있다. 그러나 어떻게 생겼는 지, 잡아먹으면 맛이 있는 지 없는 지에 대해서는 “니 멋대로 생각하세요,”라고…

내 이야기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내일의 밥 그릇보다 지금의 밥 그릇이 우선하며, 그 위에서 천국과 지옥이 오락가락한다는 것이다.

<돈>이란 결국 약속에 불과한 것이다. 어제의 욕망을 접고, 오늘 육신을 판 댓가로 받아든 약속. 나는 그 노린내나는 돈을 들고 허무한 약속의 견고한 실체를 확인하러 간다. “나에게 설렁탕을 다오! 그러면 한국은행권이라고 적혀있는 오천원 만큼의 익명의 약속을 그대에게 주겠노라.”

<참고: 화폐의 앞면의 문구>

영국의 영란은행권 : I PROMISE TO PAY THE BEARER ON DEMAND THE SUM OF ∼(이 은행권 소지자에게 액면금액을 지불할 것을 약속한다) → 도대체 뭘 지불한다는 것인지?

미국 달러화 : THIS IS LEGAL TENDER FOR ALL DEBTS, PUBLIC AND PRIVATE (이는 公私에 걸친 모든 채무에 대한 합법적 지급수단이다) → 누가 아니라고 했는가?

대한민국 원화 : 없다 → 무덤덤하기는 꼭…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