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은 책 위를 스치는 어느 날의 음악

♬~♪

읽어야 할 책이 많다. 우선 <황무지>를 다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재생의 의미를 밝혀 내기 위한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읽으며 레미의 숲에서 풍요의 의식과 잠들지 못하는 왕의 충혈된 눈에서 초조한 방황의 실마리를 구하여 프레이저의 거짓말을 풀어헤쳐야 할 지도 모른다. 아니면 에저키엘과 함께 <바빌론의 강 가>를 산보해야 할 지도 모른다. 우상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페니키아로 조수처럼 밀려가서 水死(황무지의 Chapter Ⅳ)를 암송해야 할 지도 모른다. 오래 된 책의 한귀퉁이에 水死에 대하여 [일과 죽음의 의미]라고 의미심장한 글씨로 그때의 나는 써 놓았다.

페니키아사람 플레버스는 죽은지 二週日
갈매기 울음소리도 깊은 바다 물결도
이익도 손실도 잊었다.

책들을 읽은 후 누군가를 위하여 뭔가를 끄적거려야 한다. 잘 쓰지도 못 쓰지도 않아야 된다. 중용의 절제가 요구된다. 그러나 정말 읽고 싶은 것은 라캉(J.Lacan)이거나, 莊子다. 읽다가 중단한 논어는 계속 읽어야 하겠지만 체질 상 맞지 않는다.

문제는 시력이다. 안구건조증과 원시는 늘 눈을 피로하게 하고 지나친 흡연은 가속시킨다. 어둠이 몰려오면 도시는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풍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명료함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바이다.

                                      바다 밑의 潮流가
소근대며 그의 뼈를 추렸다, 솟구쳤다, 갈아앉을 때
그는 노년과 청년의 고비들을 다시 겪었다.
소용돌이로 들어가면서,

결국 <서양미술 400년展-푸생에서 마티스까지>는 놓쳐 버렸다. 그러나 그림을 본 지 너무도 오래되어서 전람회장의 차고 그늘진 공기와 <멈춤과 봄>의 지리한 산보를 견뎌낼 지 또한 의문이다. 너의 육신은 정욕과 피와 고름의 부대자루이거늘, 어찌 너의 의식은 아름다움에 탐닉하느뇨? 우리의 고뇌는 늘,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 함께 아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얼굴을 보고 동물은 냄새로 사랑을 한다. 얼굴에 매료되어 흘레를 붙는 동물은 없다. 개들과 소와 말들은 암컷의 성기에 코를 밀어 넣고 킁킁거린 후, 사랑을 한다. 사람의 사랑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는 같지만 형식에서는 다소 다르다. 그것이 인간이 동물에 비하여 가소로운 이유다.

                                       이교도이건 유태인이건
오 그대 키를 잡고 바라보는 쪽을 내다보는 者여
플레버스를 생각하라, 한 때 그대만큼 미남이었고
키가 컸던 그를.

<水死의 전문>

음악은 모르지만, 그것은 시간의 강 속에서 정적과 소리가 살을 섞는 형식이다. 사울의 얼굴이 아름다우매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면,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어짐은 골리앗을 돌팔매로 쳐죽인 탓이 아니라, 그의 노래와 루트의 가락소리가 더위에 시들은 처녀들의 밤을 들뜨도록 했기 때문이다. 애가의 영창이 아름답기란…

DOGSINATAS

도그시나타스(Dogsinatas)란 라틴어가 아니다. 뉴 에이지적인 것에 대한 하나의 경고이자 사기일 뿐이다. 거꾸로 읽으면 <Satan is God>이다. 교황청이나 교회에서 이러한 망발을 할 이유란 없다. <사탄이 신>이라니? [그들에게는…]이란 말이 빠져 있을 뿐이다. <신국론>이나 <카발라적 오컬티즘>이나 다 플로티누스의 따라지이며, 그의 좌 우익일 뿐이다.

음악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예술은 광란이며, 규제되지 않는 광란은 기존의 질서, 견고한 고집을 허물고 디오니소스의 포도주, 그 젊음의 피 속으로 용해시킬 뿐 아니라. 젊은 이들이 영통한 시인 오르페우스를 따르지 않을까 해서 일까?

쾌락이란, 세속의 쾌락이란… 절대적 쾌락을 위하여 희생되어야 한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쾌락을 저주하며, 그들의 성가에서 악기를 제거했다. 수도사들의 낮고 독송과 같은 합창만 허락하였다. 그러나 단선율의 그레고리안 성가야 말로 가장 찬란한 음악이 아니던가? 북소리조차 없는 정적, 고딕의 궁륭 아래로 한 수도사의 맑고 처연한 목소리가 지나면, 아으~ 아으~ 신음과 같은 소리가 일어나 궁륭을 두드리고 메아리 진다. 메아리들은 서로 습합되어 맥놀이지며 전혀 다른 소리와 리듬으로 변한다. 끊임없는 반복과 낮은 파장으로 인하여 인간을 반 수면의 상태로 빠져들도록 최면한다. 만트라의 낮은 웅얼거림 속으로 무거운 번뇌가 뚝뚝 떨어져 내린다. 마치 오늘 낮 새순에 밀려 목련 꽃잎이 툭! 떨어지듯… 아아! 아도라무스 테 도미네!(adoramus te domine: 주를 찬양할지어다)

그들이 말하는 적그리스도는 멀리 있지 아니하고 바로 목줄기 옆에 있다. Enigma, Era, Adiemus, Lesiem 등이 그러하다. 그들은 그레고리안 아니면 칸투스에서 심령의 소리를 뽑아낸다. 애니그마의 <Beyond The Invisible>에서는 갈증에 젖은 여인의 낮은 속삭임이 노래를 주문한다. 누군가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광야를 넘어오는 아득한 백 뮤직 속으로 잠시 그레고리오 성가가 스친다. 아디에무스의 <Song Of Tears>는 여인의 같은 노래가 반복되고 밀려가고 또 밀려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좌절하면서 침묵 저 속으로 빨려들다가 새 빛으로 또 떠오른다. 이어러의 <Ameno>는 그레고리오 성가가 혁명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것은 함성이자, 절규로 죽어가는 인간들의 처절한 춤! 아메노 도리메 도리메 도. 끝날 것 같지 않는 스타카토. 레지엠의 <Fundamentum>은 파이프 오르간과 진군하는 북소리 속에서 전쟁의 신을 부르는 주문을 외운다,

…… Romulus Dominus Remus Romulus Divinus Duramentum……

음악이란 결국은 소리 속에 깃든 침묵을 찾아내는… 그래서 마지막에는 정적! 그것을 찾아가는 짧은 시간의 여행이며, 하나의 광기일 뿐이다.

This Post Has 2 Comments

  1. wys

    정말 멋진 글 이군요.

    감사합니다.

    1. 旅인

      고맙습니다.

      종종 인사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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