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답변에 대신하여

사라진 글들에 대하여

글을 올린 후 분명 ○○님의 꼬리말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과를 마친 후 늦게 집으로 돌아가 □□□□에 다시 입장하였더니 그만 꼬리말들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모니터의 크기 차이 때문인 지 몰라도 집에서 모니터를 보면 뭔가 생경한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했기에 ◇◇카페의 에러로 생각했습니다.

정말로 아침 일찍 출근을 한 후 부담스러웠던 사장 보고를 끝내고, □□□□로 다시 들어가 보았더니 꼬리말이 정말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화두와 같이 던져지는 ○○님의 꼬리말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때론 답(숙제)을 미뤄두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사실 편지에 추신이 있다면 항상 본문의 내용보다 실질적이고 가치있는 내용은 거기에 들어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또한 꼬리말 없는 카페의 글이란 버려진 글과 같다는 것을 점차 느껴가고 있습니다.

저처럼 익명의 공간을 처음으로 맞이하는 사람에게는 꼬리말은 아마도 익명의 광장을 들여다 보는 잠망경과 같을 것 입니다.

□□□□가 제가 가입한 첫 카페이며, 다른 카페는 가입을 했어도 수동적으로 정보만 얻는 수준으로 제가 글을 올리고 있는 카페는 □□□□ 뿐 입니다.

사실 ○○님께서 □□□□에 안계셨더라면 사라진 회원이 되었을 지도 모르며, 더 이상 □□□□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 입니다.

수줍은 마음으로 □□□□에 노크를 한 순간, ○○님께 딱 걸려버렸고, 일기나 젊은 시절 끄적거렸던 자기만족을 위한 나르시스적인 글이 아닌 누군가에게 검증된다는 위기에 노출되면서 스릴과 서스펜스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니고 있던 글의 재고는 이미 소진되었고, 일상에서 맞이하는 것들을 조잡하나마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완 글이라는 숙명을 지니게 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면 몽상적, 현학적인 비린내는 제거되고 현재적, 현실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지도 모릅니다.

□□□□에 게시된 글을 읽으며, 제가 제일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꼬리말을 달아주기를 원하면서도 저는 타인의 글에 대한 찬사인 꼬리말을 달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유는 올려진 글들을 심도깊게 혹은 평심하게 읽지를 못했기에, 그 보다는 지적인 능력 자체가 세사에 두루 능통하지 못하여 편향되어 있기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의 식구의 대부분이 여성인 데, 제가 남자라는 탓도 있을 듯합니다.

○○님의 정곡을 찌르는 꼬리말과 때론 고도의 해석을 요하는 꼬리말들을 대하면서 □□□□에 접어든 것이 익명의 해방공간을 만나는 것이 아닌 하찮은 글일 망정 준엄한 심판과 가혹한 자기반성이 따를 수 밖에 없음을 새삼 느꼈습니다.

그러한 반성적인 자세를 가르쳐 준 분이 바로 ○○님이며, 제게 보여준 관심은 글을 씀에 있어 용기를 주지만,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간직하면서 계속 글을 써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여름의 지루한 빗줄기가 서서히 걷혀져 가고 맹추인 지 중추인 지를 모를 계절에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꼬리말이 올려지기를 기대하며, 조석으로 기온이 변해가는 날들에 감기 조심하시고 추석을 가족들과 함께 잘 세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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