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의 증여

Constitutum domini Constantini Imperator

 

로마 카톨릭 교회의 기초가 되는 위조문서로 이 “기증서”는 콘스탄틴 대제가 교황 실베스터 1세(314-335) 앞으로 보낸 것으로 다른 여러 증여물들과 함께 다음에 열거하는 특권과 재산을 교회에 기증하겠다는 내용을 요지로 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임종 시 개종을 하고 제국의 지배권을 로마주교에게 넘겼다는 주장은 교황청(라테란 바실리카)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이 콘스탄틴의 증여가 기록 상에 등장하는 것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 4세기가 아니라, 8세기경이다. 이때는 단지 로마주교가 초대 주교였던 베드로의 적통을 잇고 있다는 명분에서, 그레고리우스 1세(590~604년)가 게르만인의 포교를 위해 활약을 하자, 각 지방의 주교들이 로마교회의 권위를 인정하기 시작한 시점과 절묘하게 일치하고 있다.

이 날조된 문서를 바탕으로 로마주교는 교황의 권위를 차지하는 동시에 열방의 주교들을 제압하고, 후일의 신성로마제국의 세속적인 지배권마저 인정받게 되면서 로마 카톨릭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그 내용은

(1)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주교(로마교황)는 안티오크(antioch)와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의 네(四) 주교들을 관할하는 지상권(primacy)을 갖으며, 전 세계의 주교들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2)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건축된 로마 교회의 라테란 바실리카 궁전(Lateran Basilica)은 온 교회의 머리로서 상위(上位)에 선다.

(3) 로마 주교는 황제와 동등한 명예와 권한를 갖으며, 그 중에는 제국(帝國)의 왕관을 쓰고, 자줏빛 망토와 튜닉(tunic)을 입으며, 제국의 모든 특수한 훈장과 표식을 부착할 수 있는 권한을 포함한다.

(4) 황제는 로마 주교와 라테란 궁전의 후계자들에게 로마 시의 모든 교구는 물론, 이태리의 모든 주, 성, 도시 및 서방지역들을 기증한다.

(5) 황제는 동쪽에 그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새 수도를 건립하고 행정부를 이 신 도시로 이주하였노라. 이는 하나님께서 기독교의 수장(首長)이 거하도록 정하신 곳에 세속정부가 권력을 가짐이 불편하다고 여겨지는 연고니라.

(6) 이 문서는 이 기증 행위를 감히 위반하려는 사람들을 저주하며, 콘스탄틴 황제가 손수 서명하고 성 베드로 묘지에 갖다 둔 것이다.

를 명백히 밝히고 있다.

교황은 샤를마뉴(Charlemagne)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 ‘콘스탄틴 황제의 기증서’를 이용하였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콘스탄틴 대제와 그의 관대함을 통해서 거룩히 기념되던 복되신 실베스터 로마 주교의 시절에 하나님의 거룩한 로마 카톨릭 사도교회(th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Roman Church of God)가 높임을 받고, 존중을 받으며, 이들 서방지역에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동일하게 당신과 우리에게 있어서 지극히 행복한 이 시대에도 복된 성 베드로 위에 세워진 하나님 거룩한 교회가 약동하고 전진하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아드리안 1세가 샤를마뉴에게](Pope Adrian I,Letter to Charlemagne of the year 778).

중세 동안 내내 이 문서의 존재는 거의 의심없이 세속의 양쪽 모두 서방황제 및 동방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권에 대한 근거 문서로 사용되었고 역대 교황들은 물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등 성직자들이 자신들과 교회의 이익을 위해 황제권과 충돌할 때마다 이 문서를 내세웠다.

이 위조 문서는 1054년 교황 레오 9세에 의해 당시의 정치권력에 대한 교황의 지위를 주장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우르반 2세도 1091년 코르시카 섬에 대한 그의 권한을 주장하기 위해 이 위조 문서를 사용하였다. 교황 이노센트 3세, 그레고리 9세, 이노센트 4세 역시 세속 정권에 대한 교황의 권위를 증명키 위해 이 위조문서를 진본으로 사용하였다.

르네상스 이후 인문적인 지식의 확대와 더불어 1440년에 이탈리아의 로렌츠 빌라가 문서에 표기된 라틴어가 콘스탄틴 대제 시절의 황제가 사용한 것이 아니며 기증서에 인용된 문서와 문서 자체의 연도가 불일치한 점들을 증명했다. 이에 교황청은 빌라의 논증을 부정하고 빌라의 책을 16세기까지 금서목록에 포함시켰다.

그 후 학자들의 계속적인 연구 결과, 오늘날에는 어느 누구도 이 “기증서”가 콘스탄틴 대제의 위조 문서라는 것과 또 그 문서에 의해 많은 특권과 많은 부가 로마 교황과 로마 교회에 주어졌음을 모르는 이 없다”고 한다.(Catholic encyclopedia V, “Donation of Constantine”, page 118)

중세의 역사에 나오는 카노사의 굴욕과 아비뇽의 유수 등의 사건들은 결국 교황이 이 문서를 바탕으로 세속의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노력과 지상 권력의 충돌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단테는 신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콘스탄티누스여, 진정으로 큰 악은
그대의 개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가장 부유한 사제가 그대에게서 받은
그 선물에게서 나왔도다!

〈지옥편〉xix. 115~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