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이름으로-09

내가 직장을 다닐 즈음해서 할머니는 검은 머리가 다시 나기 시작했다.

할머니에게 조금 있으면 시집가도 되겠다고 농담을 했지만, 할머니는 몰래 몰래 검은 머리를 뽑고 계셨다.

“흐이구! 이년이 얼마나 더 살려고 검은 머리가 다시 난디야.”

참빗질을 한 휴지통 안에는 흰머리보다 검은 머리가 더 많았다.

할머니는 정말로 죽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검은 머리는 할머니에게 남은 생애가 생각보다 길고 지루할 것이라고 속삭였던 것이다. 검은 머리를 뽑고 계신 할머니에게 살아있는 것이 죽음보다 더 좋다고 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리는 소녀처럼 몸을 깨끗이하고, 참빗질을 한 머리는 한올도 흐트러짐이 없이 늘 단정했다. 흐트러진 몸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차마 싫었으리라. 당신의 모든 모습과 행동거지가 죽음을 향하여 가지런했다.그러나 죽음을 바란다면 왜 스스로 죽기를 택하지 않았냐고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나에게 죽음은 그렇게 멀고 아득한 것이었다.

나는 취직을 했다.

박사까지 한 번 해보라고 아버지는 권했지만, 공부에 더 이상 흥미가 없었다. 머리도 안 되었고, 집에 더 이상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적 성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공부는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자식 중 한 사람이라도 선생을 만들고 싶어하셨는 데, 그것을 들어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했다.

첫 월급을 받고 할머니에게 잡비를 드렸다. 할머니는 아무 말씀도 않고 받으셨다. 매달 할머니에게 돈을 드렸다. 그 돈을 쓰지도 않으면서, 돈을 또 달라기도 했다. 나에게는 돈이 그다지 필요치 않았고. 돈을 모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달라는 대로 드렸다.

돈을 받으면, 할머니는 마실을 간다시며 친정 쪽 식구들을 찾아보시곤 했다.

합정동에서 우리는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사한 지 얼마 안되어 할머니는 천식을 앓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천식이 아니라 노인들 중 간혹 나타나는 심인성 질환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돌팔이라고 했다.

“할머니! 그렇게 돌아가시고 싶어요? 가짜 천식을 하시게요.”
“기침을 해 감서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깐? 죽으려면 잠자는 것 매키로 가야제. 쿨럭!”

이사한 후 얼마 안되어 할머니는 개종을 했다. 제사를 큰 집에 주었다고 역정을 내셨던 할머니가 개종을 했다. 그리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때로 나에게 성경에 대하여 묻곤 했다.

“할머니! 왜 기독교예요?”
“불교는 화장을 허지 않냐? 나는 당최 그게 싫다.”
“기독교는 제사도 안 지내는 데요? 할머니는 형이 차려주는 밥을 드시고 싶어하지 않았나요?”
“이제 제삿 밥 얻어먹을 시상은 아닌 것 같다.”

할머니의 천식은 계속 되었다.

병이 심인성이란 것 때문에 집 안에 갇혀 지내시는 것보다 하동 고모댁이나 장수의 친정에 다녀 오시면 좀 나아지지 않겠냐고 했고, 할머니는 떠났다.

나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집을 떠나 살게 되었다.

아내와 나는 한 삼년을 밖에서 지내다가 집을 사게 되었다. 돈이 모자라 입주를 못하고 전세를 주고 우리는 두돌된 아들과 함께 본가로 들어갔다.

아내는 처음 한 시집살이를 힘들어 했다. 시부모가 까다로와서가 아니었다. 집이 너무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이 함께 식사를 해도 조용했다. 단지 두살배기 손자를 어루거나 티브이 소리 만 전부인 집이 아내에게는 이상했다.

어머니는 성경책을 읽거나, 책을 보거나, 외출을 해도, 아내에게 무엇을 하라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아내는 그런 시어머니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까지 생각했다.

불평을 하는 아내에게 나는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시어머니가 너를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마음이다.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집은 방임이라는 것에 길들여져 있다고 했다.

아내는 서서히 집의 분위기에 길들여져 갔다. 그리고 집안에 깃든 질서와 조화, 그리고 자유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혹 집에 들리는 누나와도 정이 들기 시작했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종린 08.12.24. 10:35
    조회수 0 에서 1로 전환시키는 순간을 기념하고자 또 꼬리를 밟힙니다.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 旅인 08.12.24. 11:27
    허접한 가족사를 재미있게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유리알 유희 08.12.24. 17:31
    장가를 드셨군요. 갑자기 허전합네다. ㅋㅋㅋㅋ,
    ┗ 旅인 08.12.24. 18:00
    마누라는 시집와서 양자간에 고생입니다.

    샤론 09.01.08. 14:22
    연애하고 결혼하셨나요?
    ┗ 旅인 09.01.08. 22:54
    예 그렇습니다. 짧게 연애하고 오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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