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이름으로-08

아버지에게 고향이란 무엇이었을까? 그 곳은 추억이 없는 곳, 떠나 온 곳의 의미로, 단지 당신의 어머니가 계신 곳 이외의 또 다른 의미가 있을까? 당신의 고향에는 친구도, 동창도, 같이 뛰놀던 뒷동산이 없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이 곳 저 곳을 떠돌던 나 또한 그렇다. 그래서 누구의 고향도 아닌 오매실을 고향이라고 했다.

나는 간신히 대학을 들어갔다. 누나는 시집을 갔고, 형은 군대를 갔다. 처음으로 내 방을 갖게 된 나는 할머니와의 한방살이를 접었다.

그때 어머니의 친구분께서 인형을 든 열다섯인가 된 여자아이를 거둬 달라고 데리고 왔다.

친구분의 말을 빌리면, 어렸을 때 아이는 홀로 사는 나이든 여자의 집으로 보내졌다. 아이의 부모는 공부도 시켜주고 월급도 보내 주겠다는 말에 아이를 보냈다. 나이 든 여자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아이를 집 안에 가둬두고, 아이가 영원히 자라지 못하도록 했다. 마치 애완동물을 키우듯 아이를 길렀다. 그래서 아이는 우리 집에 왔을 때 가슴과 방댕이는 처녀였지만, 머리는 여섯 살 쯤된 어린아이였다. 아이의 몸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자욱이 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아이는 밥도 하지 못했고, 설거지도 못했다. 방 청소를 시키고 조금만 있으면 딴 짓거리를 했다. 아이는 무서워서 집 밖을 나가질 못했다. 그러면서도 “오빠! 집에 올 때 과자 꼭 사와.” 했다.

아이를 내보내자는 나에게 어머니는 글을 가르치라고 했다. 학교나 야학이라도 보내야 할 것 아니냐며 글을 가르치라고 했다. 아이는 저항을 했다. 과자를 갖고 을러보고 때려준다고 해도 아이의 진도는 답보상태였다.

그 와중에 아이의 부모가 왔다. 그들은 저희 아이를 이렇게 거둬주시고 어쩌고 저쩌고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난 후 어머니가 주는 돈 봉투를 받아 들고 그들은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못된 것들이라며, 며칠 안되면 다시 와서 아이를 데리고 갈 것이라고 했다.

사흘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또 왔다. 아이가 지낼 곳을 찾았다며 왔다. 어디냐고 물었다. 공장이라고 했다. 아이가 글도 못 읽는 것을 공장에서 아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공장에서 얼마나 준다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가 부모인 데, 당신들이 무슨 상관이냐며 아이를 데리고 갔다.

오빠! 오빠!하며 알지도 못하는 부모에게 이끌려 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아이에게 다가올 앞 날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이가 떠난지 얼마 후, 할머니는 글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할머니가 글을 모른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여든이 다 된 할머니가 왜 글을 배우기로 했는지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문맹의 오랜 세월을 보냈음에도, 할머니는 순식간에 한글을 깨우치셨다. 허무할 정도로 빨리 깨우치셨기에, 왜 일찌감치 아버지나 삼촌에게 글을 배우지 않으셨나 할 정도였다.

할머니는 글을 배운 후 나지막히 소리를 내어가며 책을 읽었다. 할머니는 봉투를 붙이거나 책을 읽었다. 재미난 책도 읽고, 때론 할머니가 이해하지 못 할 어려운 책도 읽었다.

할머니의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면 아늑했다. 거실을 거닐 때 마루바닥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마당의 개가 참새를 향하여 짖어대는 소리와 집 앞 공터의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할머니의 목소리에 스며들었다. 가끔 할머니의 방으로 가 책을 읽었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나지막해서 무의미했다. 그 무료한 웅얼거림 속에 책을 읽다가 잠이 들곤 했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truth 08.12.24. 09:30
    ..
    ┗ 旅인 08.12.24. 11:21
    이제 공터의 을씬년스럽던 느낌은 좀 가라앉으셨나요?
    ┗ truth 08.12.24. 11:37
    아주 인간적인 글내용들에 감동중이랍니다..늘 감사드려요..그리고 많이 안정되어져가는군요..고마워요..^^

    유리알 유희 08.12.24. 17:27
    할머니의 변화에 가슴이 뭉클합니다. 그리고 에피소드로 삽입한 여자아이 얘기는 소설의 분위기를 애잔하게 만드는데 적격인듯 합니다. 잘 읽습니다. 여인님!

    샤론 09.01.08. 14:19
    우리엄마도 83세인데 한글을 제대로 모른다고 저에게 가르쳐달라하셨지요…읽는 것은 가능하나 쓰는 것은 절반 틀리시니 그것이 속상하신듯하더라구요..
    ┗ 旅인 09.01.08. 22:53
    글을 배우신 후에 할머니의 마음도 몹시 차분해지신 것 같더군요. 아마 노인분들께서 젊은 시절 배우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애착들이 있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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