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이름으로-07

할머니와 가까워 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저녁이면 자리끼를 마련해서 할머니의 머리맡에 놓아두었고, 할머니는 등교한 내 이불을 개어 놓으셨다. 우리의 관계는 그저 심심했다.

할머니는 봉투붙이기를 시작했다. 나는 방바닥에 드러누워 책을 읽고, 할머니는 봉투를 붙였다. 봉투붙이기는 오래된 할머니의 직업이었다. 삼촌과 함께 살 때도, 청량리 부근에서 혼자 살 때도, 할머니는 봉투를 붙였다. 그리고 허무할 정도로 적은 돈을 받았다.

“힘들지 않아요? 아버지한테 용돈 좀 더 달라시죠?”
“늙은 년이 피우는 담뱃값 정도는 지가 벌어야 할 것 아니냐?”

그러던 중 누나의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 왔고, 할머니께 인사를 드린다고 방문을 연 순간 봉투를 붙이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친구들이 보았다고, 그래서 챙피했다고 누나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래, 그게 그렇게 챙피하냐? 그럼 할머니 한테 용돈이라도 주고서 그딴 이야기 하냐?”
“아버지한테 용돈을 더 달라면 될 것 아니야?”
“너는 그러니까 문제야! 돈이 없어서 봉투를 붙이는 줄 알아? 하루종일 봉투를 붙이면 얼마나 받는 줄 알아? 모르지?”

누나는 말이 없었다.

“봉투라도 붙이지 않으면 할머니가 할 것이 뭐가 있는 데?”

방으로 돌아갔을 때 할머니가 물었다.

“너두 할미가 봉투 붙이는 게 챙피하냐?”
“아뇨, 아무 것도 안하고 아파서 골골거리는 할머니들보단 훨씬 나아요. 친구 집에서도 인형 눈 달고 하는 것 다 해요.”

서로 말은 없었어도 한방살이를 한다고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아주 가끔은 할머니의 옆에서 봉투도 붙였다. 그러면 제대로 못한다고 뭐라 하셨다. 간혹 할머니에게 밥을 차려 달라고 했다. 그러면 부엌에 뭐가 있는 지 잘 모르는 할머니는 부시럭 부시럭 밥을 차렸다. 할머니의 청국장은 어머니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왜 어렸을 때 나를 그렇게 미워했느냐고 물었다.

“언제 너를 미워했깐. 내가 니 형은 중히 혔어도, 너를 미워한 적은 읎다.
근디 얼매나 말을 안 듣고, 별 났는지… 이 숭악한 놈이 복장을 뒤집어 놓으면, 장난이 아니여. 오매실에 얼매나 있었냐? 동네 애들이란 다 뚜들겨 패고… 한번은 염소를 산으로 끌고 간 놈이 터덜터덜 맨 손으로 내려오지 않았냐.니 염소 어찌했냐 했더니, 나 몰라! 하고 딴청 아닌 게비여. 그래서 사람을 놓아 찾았더니 이 오살헐 놈이 목줄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고 떡허니 사라진 거 아니겄어. 염소 눈깔에 흰창으로 뒤집혀 침을 흘리는 게 꼴딱 죽기 일보 전이었다고 하더만.
큰 아버지 집에 그 똥돼지 안 있냐? 그 놈이 죽는다고 꾸역꾸역 혀서, 네 큰 엄마가 나갔더니, 니가 칙깐에서 씩 웃으며 내려 오더란다. 무슨 일 있냐? 하고 늬한테 물었단다. 그렸더니 맨날 밑에서 자기 똥구멍을 쳐다본다고 집채만한 짱돌들을 그 놈한테 던졌다는 것 아니겄어. 그러면서 큰 엄마! 저 놈 두 개나 맞았다. 내일 또 던져줘야지 하고 깡총깡총 뛰는 걸 때려줄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고 안하냐.
서울 올라와서도 너만 보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공부는 엉망이고 맨 날 사고만 치니… 우리 가문에 너 같은 애는 없었다.”

물론 그런 일을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망루와 같이 생긴 똥돼지 변소와 나도 염소새끼 한마리를 달라고 보챘던 일들은 기억이 났다.

잠을 자다 보면 간혹 할머니는 잠꼬대를 했다

어~이 어~이 하며 할머니는 손을 허공으로 올리고서 뭔가를 잡으려 하는 듯 허우적거렸다. 할머니의 잠고대는 항상 똑 같은 자세로 가위에 걸린 듯 허우적거리다. 깨어나 주위를 둘러본 뒤 한숨을 쉬고 다시 잠에 들곤 했다.

그 꿈이 궁금하긴 했지만 묻지 않았다. 당신의 삶이 고단했던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잠고대가 안쓰러웠다.

할머니는 장수 황씨로 황희 정승 이전부터 누대를 장수에서 살아왔다. 할머니의 불 같은 성격은 장수, 남원, 장계의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누구도 할머니가 무서워 장가들 생각을 못했다. 결국 할머니는 혼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상처한 할아버지의 후처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첫자식인 아버지를 보았을 때, 스물일곱이셨다.

시집 간 곳은 장계의 전형적인 향반의 집이었다. 고조부께서는 대원군 시절, 가선대부라는 품계를 살 정도의 거만의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시집와서 아버지와 고모들을 낳고 집 안은 무너졌다. 증조부께서 돌아가시자, 할아버지의 막내 동생이 땅을 팔고 일본으로 도주해버렸고, 창졸간에 집도 절도 없는 지경이 되었다.

수십년 후, 막내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할머니 앞에 와 무릎을 꿇었을 때, 할머니는 찬물을 들이키고 “그래 늬들은 잘먹고 잘 살었느냐?” 하며 자신의 가슴을 쳤다.

“너희 할아버지는 무능하셨다.” 아버지는 말씀했다. 내가 보기에는 아버지 또한 무능했다. 아버지의 무능은 아버지가 선생일 수 밖에 없도록 했고, 오히려 선생으로서 올바르고, 보람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버지에겐 늘 사도가 중요했고, 식구는 하찮았다.

그 무능한 핏줄은 나에게도 예외는 아닌 것만 같다.

결국 할머니는 식구와 봇짐을 챙겨 육십령을 넘어 대구로 갔다. 아마 그들은 갈 곳이 없었기에, 대처라는 것과 큰아버지가 대구사범에 다니시기에 그곳으로 갔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 도시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비관하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으며, 결국 수를 누리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그 도시에서 갖은 허드렛일을 해가며 아버지와 고모들을 키우고 삼촌을 낳았다.

굶주림과 피곤에 지친 할머니는 촌이라도 가면 밥술이나 먹을 것 아니냐 하고, 선산이 있는 함양의 오매실로 들어섰다.

그 곳에서 농사를 짖고 밭일을 했다. 지리산에 삼판이라도 벌어지면 몇푼 돈을 벌겠다고 짚신을 신고 산으로 갔다. 입에 풀칠하기가 근근한 데, 아버지를 가르칠 수 없었다.

당신의 첫 아들인 아버지를 큰 아버지가 계신 진도로 보냈다.

할머니의 잠고대를 들으면, 할머니를 지나간 시절들의 아득함이 어어이 어어이 하고 조수처럼 다가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삶의 고달픔은 집요하여 할머니의 꿈 속에 조차 당신을 편히 놓아두질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되돌아간 조상의 땅에서 아버지는 진도로, 다시 전주로, 전주사범을 졸업한 후 광복을 맞이하며 고향의 초등학교 선생으로 얼마동안 근무한 후, 부산으로 부임했다.

다시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나고, 육이오가 일어나고, 빨치산이 그 땅을 훑고 지나가고, 고향에서 공비토벌대와 지리산 빨치산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그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을 했다.

그래서 두 분은 한참 후에나 고향으로 가서 어머니와 시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This Post Has 3 Comments

  1. 흰돌고래

    맨날 밑에서 자기 똥구멍을 쳐다본다고……..-.-

  2. 旅인

    truth 08.12.23. 20:45
    ..
    ┗ 旅인 08.12.24. 08:20
    …^^

    유리알 유희 08.12.23. 23:42
    드디어 할머니를 이해하게 되는군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믿음대로 움직이는 것. 그렇군요. 형을 중히 여겼지. 둘째를 미워 한 건 아니네. ㅎㅎㅎ.
    ┗ 旅인 08.12.24. 08:20
    아마 이런 것이 크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샤론 09.01.08. 14:15
    또 읽었습니다..오늘은 모두 읽을 참입니다..
    ┗ 旅인 09.01.08. 22:51
    고생많으십니다. 샤론님.

흰돌고래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