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이름으로-05

할머니가 들어온 후, 집 안에는 골이 깊은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형식적으로 할머니를 대하였고, 어머니는 뭔지 모르지만 힘들어 하셨다. 누나는 때때로 할머니가 뭔지 모르겠다고 칭얼댔고, 할머니에게 메를 올릴 큰 놈이라고 귀해 하던 형도 좋아하지는 않았다. 물론 나는 할머니 근처에도 얼씬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방 한쪽 구석에서 자세 하나 흐트리지 않은 채, 앉아 계셨다. 그럴수록 집 안의 침묵은 깊어갔다.

어느 날인가 할머니가 몸이 안 좋으니 오리 피라도 먹어야겠다며, 싫다는 나를 끌고 영천으로 갔다. 독립문을 지나 판자촌을 뚫고 우리는 공터에 올라섰다. 쓰레기와 닭장들이 얼기설기 쌓여진 공터 위로 죽어간 닭들과 오리들의 털이 차가운 겨울바람에 휘날리거나 웅덩이의 구정물에 빠져 퍼덕거리고 있었다. 인간의 먹을 것이 되기 위하여 죽어간 것들의 냄새는 공터를 더욱 을씬년스럽게 했다.

주인은 오리 한 마리를 장에서 꺼내 와서는

“집 사람이 잠시 장에 가서… 미안하지만 누가 오리를 잡아야 쓰겠는데…”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눈짓을 했다. 눈 앞에서 오리의 머리가 잘리고 피가 흐를 것이 끔찍했다. 할머니에게서 좋은 소리를 기대한 적이 없던 나는, 드실 분이 잡으라고 하고 싶었지만, 주인이 나를 쳐다보는 간절한 표정 때문에, 그만 오리를 잡고야 말았다.

“꽉 잡아! 학생”이라고 말한 뒤, 주인은 오리의 목을 써억 잘랐다. 식칼이 좋았는 지, 주인의 솜씨인 지 단 한번의 칼질로 목이 두부모 잘라지듯 잘렸고, 오리의 몸과 머리가 나뉘었다. 순식간이어서 피도 흐르지 않았다. 처참함과 공터의 정적, 공기들이 노랗게 짓물러가는 그런 것들이 아주 긴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명백하게 죽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 때 왼손 안의 오리의 주둥이가 소리없이 벌어졌다. 그것이 벌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 놈을 꽉 잡기 시작했다.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고, 온몸의 힘이 왼손을 빼고는 다 빠져나갔다.

그때 오리의 몸통이 느슨한 내 오른손을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머리가 잘려나간 놈은 공터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목을 찾기 위하여 피를 뿜어대며 공터를 원을 그리며 달렸다.

그 모습을 보자, 몸에 기력이 다 날아갔다. 결국 오리의 머리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땅에 떨어진 오리의 목은 주둥이를 벌렸다 다물었다 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원망하는 듯한 놈의 눈이 애처로왔다. 그 눈은 점점 혼탁해지더니 꿈뻑거리다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죽음의 잔잔한 흔들림을 보는 순간, 공터를 질주하던 몸뚱이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죽음의 발작에 취했는 지도 모른다. 경련은 내 손 끝에도 전염이 되었다. 파르르 떨며 나는 그 공터에 서 있었다.

겨울 바람이 공터의 휴지와 흙먼지를 몰며 스쳐갔다.

“우짜냐! 저 아까운 것을, 저 아까운 것을…”

“이 미련한 것이.” 하고 할머니는 내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프지 않았다.

“어린 학생에게 잡으라 한 제 잘못이었어요. 다 집사람이 없어 가지고 설랑…” 하며 주인은 허물어져 늘어진 오리를 들고 와, 잘려진 목을 움켜지고 빨래 짜듯 피를 짜서 그릇을 할머니에게 주었다.

“우짜! 이 아까운 것을…” 할머니는 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무엇을 생각하셨는 지 마시던 그릇을 내게로 내밀었다. 입맛을 다시며 내게 그릇을 건네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자, 죽어가면서 나를 쳐다보던 오리의 눈이 생각났다.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두 말 않고 남은 피를 들이키곤 쭈글쭈글한 손으로 입을 닦았다.

나는 아직도 온기가 남은 오리의 몸뚱이를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할머니의 집요한 삶에 대한 욕구와 눈 앞에서 스러져 간 이른바 미물이라고 하는 것들의 가녀린 죽음에 다리가 비틀거렸다.

그 날 오후, 할머니는 몰래 오리로 죽을 만들었고, 뒷방으로 형과 나를 불러 먹으라고 했다.

“맛있어요. 할머니! 다음에 또 해주세요.” 형은 그렇게 죽을 먹었다.

“하모! 내 담에 또 해주마.”

나는 소리를 내가며 맛있게 먹는 형을 보자, 심사가 뒤틀렸다. 오리가 죽어가던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앞에 놓인 죽을 나는 먹을 수 없었다.

할머니! 또 배가 아프기 시작해요. 못 먹겠어요. 하고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오랫동안 닭고기와 날아다니는 것들의 고기를 싫어했던 것도, 그 날 이후였던 것 같다. 어찌되었건 오리 피 사건 이후, 할머니는 나를 그다지 박대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할머니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오리의 죽음에 대한 참혹한 비밀 때문인지도 모른다.

This Post Has 3 Comments

    1. 여인

      이제는 자신의 목을 찾아 공터를 질주하던 오리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만큼 가슴이 메말라버렸는지도 모릅니다.

  1. 旅인

    유리알 유희 08.12.22. 12:55
    아, 강렬한 에피소드, 오리를 살육하여 그 피를 마시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손자에게 시키는, 할머니는 아주 단순한, 자신의 생을 유지하는 것만 아는 탐욕의 전형으로 그려집니다. 즐감입니다. 이런 에피소드들이 자칫 통속으로 떨어지는 소설의 격을 끌어 올리는 힘이 아닐까 해요. ㅎㅎ
    ┗ 旅인 08.12.22. 18:35
    아마 이후의 할머니는 다를지도 모르지요.

    truth 08.12.22. 17:18
    핑..현기증이 ..
    ┗ 旅인 08.12.22. 18:35
    트루쓰님, 정신차리십시요. 스릴과 써스펜스는 이제 끝입니다.^^
    ┗ truth 08.12.23. 09:27
    네 감사히 읽는중입니다. 이번편은 힘들었네요..어린학생의상황 리얼하게 재연중입니다..
    ┗ 旅인 08.12.23. 16:03
    아직도 닭고기와 오리고기를 싫어하니…
    ┗ truth 08.12.23. 18:20
    그러게요…아무생각없이 자신의 필요에만 집중하는 그런 노인은 절대 되지 말아야한단생각이 다시한번더 또렷해집니다. 저는 읽는동시 머릿속엔 영상화되는 편여셔 아주 힘들었던듯해요..지금도..으..
    ┗ 旅인 08.12.24. 11:16
    아마 트루쓰님의 감수성이 다른 사람보다 예민한 탓이겠지요. 하지만 사는 것은 사람을 아주 멀리, 자신이 바라지 않는 곳까지 이끌기도 하지요. 저도 그 공터에서 살면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되고 어떤 삶을 살게 될 지 많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 truth 08.12.24. 11:39
    맞아요..전혀 의지한바없고 상상조차 못한 상황들에 무력하게 놓이기도하지만..그 모든것이 세월을 뭍어내서는 나름의 깊은 의미로 존재함을 배워갑니다..얼마나 고된날들였을까…그리고 그 아이는 또 얼마나..
    ┗ 旅인 08.12.24. 13:30
    이 에피소드는 글의 질서를 깨닫지 못했던 그 기나긴 시간들, 학교의 수업시간동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무료하게 학교가 파하기를 기다리던 그 아이의 상황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truth 08.12.24. 17:06
    아..그렇군요..이사실보다도 더 힘듦은 그날들였군요..그러게요..그런느낌을 받았답니다..딱하고 가엽고..어찌해서라도 도와서 보담아 네편이 여기있다며 말해주고싶을만큼의 ..

    샤론 09.01.07. 14:04
    난 굉장히 겁장이인데 ..이 이야기 읽고 나중에 생각날까 은근히 걱정입니다..중학교때 닭을 사오라고 해서 우연히 닭잡는 것을 보고 닭고기를 일년정도 먹지 않았지요..끔찍해서요…지금도 그 기운이 살짝 남아있지만 고기를 안 먹지는 않는답니다…여인님은 너무 심한 경험을 한것 같아요..
    ┗ 旅인 09.01.08. 22:45
    하지만 그런 경험은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물론 그 후 저도 나는 것들의 고기를 잘먹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엘프 09.06.18. 12:06
    음 저도 어릴때 tv에서 소잡는 광경을 보고 세상에 놀란 기억이 나네요. 세상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육식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가족들마져 이해할 수 없었죠. 그 후 10여년간의 채식생활을 벗어나 지금은 없어서 못먹네요. 할머니의 생에의 의지가 확실해서 부럽네요. 지금은 고기에게도 고기를 잡은분에게도 감사하며 잘 먹습니다^^;
    ┗ 旅인 09.06.18. 13:28
    저는 아직도 나는 것의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걸어다니는 것보다 날개달린 것들의 맛이 떨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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