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이름으로-04

할머니가 떠나시고 난 뒤, 아버지는 화가 나신 듯 바깥으로 나가시고 어머니는 난전처럼 휑한 집 안에 넋을 놓은 듯 앉아 계셨다.

그때 갑자기 복통이 찾아왔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신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나의 발작에 어머니는 한번에 수십 알씩 먹어야 되는 약과 미군부대에서 간신히 구한 암포젤엠을 가지고 와서 먹이고 난 후, 통증이 가라앉자 나의 이마에 손을 얹고 말씀했다.

너도 많이 놀랐니?
아니. 그런데 이제 제사 안 지내는 거야?
그래 교회 다니면 제사 안 지내잖아.
그런데 큰아버지 집에선 제사 안 지내?
응! 큰아버지가 지내실 제사를 아버지를 위한다고 네 할머니가 가져오지 않았겠니. 그러니까 이제 제사가 제 자리를 찾아간 거란다.
왜 그렇게 됐는데?
그것은 네 아버지가 할머니의 첫째 아들이기 때문이야.
큰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복형님이지. 할머니께서는 자신의 배로 낳은 자식이 조상의 음덕을 받길 바라신 거야. 그래서 오늘 그렇게 화가 난 거지.
아! 그렇구나.

할머니는 아버지가 음덕을 받는 것만 생각하신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돌아가신 후 친아들인 아버지와 그의 아들과 그 아들이 당신께 메를 올리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날이 지나고 나는 중학교 일학년이 되었다.

삼촌이 결혼을 했다.

결혼을 며칠 앞두고 할머니를 모시지 못하겠다고 삼촌은 집으로 왔다.

“처가 될 사람이 어머니를 모시라고 한다면 함께 살지 못하겠다고…” 삼촌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노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침묵한 끝에 겨우겨우 말씀을 했다.

“네 형수를 봐라! 너를 중학교 일학년 때부터 키웠다. 남편이라고 꼴난 선생 봉급으로 지자식 먹일 것도 먹이지 못하고, 네 놈 옷 사 입히고 먹여가며 키웠다. 그렇게 너를 대학까지 보냈다. 나는 네 형수에게 더 할 말이 없다. 네 놈에게 내가 할 말은 그 여자의 말대로 헤어지라는 것 밖에 없다.”

삼촌은 그렇게 돌아갔고,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몇 번인가 찾아갔으나, 할머니는 한사코 함께 살기를 거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교외선을 타러 가자고 했다.

아버지와의 외출은 늘 즐거운 것이었다. 집에서 그토록 무섭던 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서 무엇인가를 늘 보여주시고 말씀하셨다. 말미잘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보았을 때의 촉감이며, 미술전람회의 유혹과 여행 중 돈 떨어져서 여관집 주인이 만들어 준 주먹밥의 맛과 밤하늘의 별자리를 헤아리는 것을 아버지는 가르쳐 주었다.

그 날 따라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었다. 차창 밖만 내다보셨다.

후일에야 알았지만, 아버지는 할머니가 고향에 있는 아버지의 땅을 장가가는 삼촌을 위하여 한마디 상의도 없이 파셨다는 것에 알았던 것 같다.

할머니는 땅 한뙈기없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삼촌과 함께 살 수도, 그렇다고 아버지와 함께 살기에는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자신의 땅을 팔았다는 것 만으로 그렇게 상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살아온 삶의 역사가 있었다.

아버지는 아홉 살에 할머니와 헤어졌다.

그리고 진도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큰아버지 밑으로 가, 형수라는 큰어머니가 지어주는 밥을 먹으며, 학교를 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난 후, 어른이 되고 선생이 되어 고향마을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고향에서 만난 아들과 어머니는 뜨거운 포옹을 하기에는 너무 커버렸고, 서로의 그리움을 이어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멀었다.

그 헤어짐이 가난 때문이라도, 오랜 이별 속에서 아버지와 할머니의 관계는 늘 서먹했고, 할머니로서는 슬하에서 먹이고 야단쳐가며 키운 삼촌과 같은 피붙이의 정을 느낄 수 없었을 지 모른다.

아버지에게 할머니는 삭막한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다가올 뿐, 뜨거운 모정과 함께 한 세월의 이야기가 없었다. 할머니가 삼촌을 위하여 아버지의 땅을 팔았을 때, 함께 굶어가며 더불어 울고 웃어 온 경험이 없는 삭막한 아들의 이름으로 할머니 또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뼈저리게 알아버렸는 지도 모른다.

결국 할머니는 집으로 들어왔다.

그 후 삼촌은 홀로 와서 무릎을 꿇은 채, 할머니 옆에 있다가 말없이 떠나곤 했다.

“내가 너희들 한테 할 말이 없다.” 하며 떠나는 삼촌의 등을 보면 왠지 숙모라는 여자가 미웠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유리알 유희 08.12.22. 11:30
    평이하지 아니한 가족사, 그래서 소설은 재미가 더해지나 봅니다.
    ┗ 旅인 08.12.22. 12:43
    아마 가장 평이한 가족일 것입니다.

    샤론 09.01.07. 13:58
    다음편을 기대하면 읽어갑니다..항상 마지막 대사가 그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네요..드라마가 끝날 때 그러는 것처럼…
    ┗ 旅인 09.01.08. 22:40
    좀 그런 의도를 갖고 마지막을 마무리하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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