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이름으로-02

그 해 겨울을 그 곳에서 보낸 것으로 기억한다. 겨울이었는 지 확실치는 않다. 뱀과 구렁이, 능금나무가 마녀의 손가락처럼 자라는 과수원과 교교한 달빛이 비치는 언덕 위에서 나를 쳐다보던 여우의 모습과 아무도 살지 않던 당집을 기억한다. 이런 것들은 겨울로 포괄하기에는 너무 넓었다.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할머니와 나 사이에 벌어진 일들, 어린아이가 추상해 내기 어려운 할머니와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오매실에 나를 다시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나도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시골의 불편함 보다, 정 붙일 수 없는 할머니의 쌀쌀함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제사 상에 메를 올릴 수 있는 손주만 할머니에게는 중요했다. 그 외에 떨거지는 싫어하신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고집에 사고뭉치인 녀석을 누가 좋아하겠냐고 어머니는 말했다.

친척들은 나를 ‘별난 애’라고 했다. 별난 애라는 나에 대한 어르신들의 명칭은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들어와서 까지도 하나의 꼬리표로 ‘야가 그 별난 애가? 어찌 이리 다 커 갖고 회사까지 갔실꼬?’ 하곤 했다. 외할아버지마저 내가 간다면 비상이 걸리곤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어이 보냄으로써 집 안의 우환거리를 잠시 덜어내곤 했다.

적선동에서 이사한 통의동에서부터 나의 기억은 갈라지지 않고 계기적 질서를 갖는다. 인왕산과 백송나무와 동네의 모습이 아주 투명하게, 때론 누구의 집의 담벼락에 미쟁이 질의 질감까지 기억할 수 있다.

월남 평안도 사람들이 많이 살던 동네는 낡은 적산가옥에, 좁은 골목으로 어둡고, 죽은 사람들과 귀신들의 이야기며, 노름과 술주정들로 꽉 차 있었지만, 오후면 사글세 방에서, 단독주택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의 소음으로 활기찼다.

우리 집은 다다미를 온돌로 개조한 적산가옥이었다. 방이 네 개였음에도 대학을 다니거나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삼촌, 큰 형님, 외삼촌, 아저씨들이 오고 가고 하여 늘상 북적거렸다. 특히 친가와 외가의 삼촌, 아저씨, 심지어 사촌 형님마저 한두살 차이에, 같은 중 고등학교 출신이라 사돈이 아니라, 서로 야 임마 할 정도로 떠들썩한 사이였다.

어머니는 누님, 형수님하며 집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저 장골들을 어떻게 먹이면 좋을까 하고 늘 고민이었다. 모자란 양식에 할 수 없이 수제비를 먹는다는 것은 싫었지만, 함께 자리를 펴고 삼촌이나 아저씨 옆에 누워 이야기를 듣거나, 사주는 과자를 얻어 먹는 일은 즐거웠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그들의 관대함이었다. 내가 사고를 치고 돌아와도, ‘형수님! 애들이 다 그렇지요. 지금 안 싸우고, 사고 안치면, 커서 더 큰 사고 쳐요.’하고 나를 편들곤 했고, ‘누님! 지금 저 놈이 반에서 바닥을 겨도 나중엔 효도할 겁니다.’ 라곤 했다.

그러던 중 할머니가 서울로 올라왔다. 유복자였기에 유독 귀히 여겼던 삼촌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기 때문에 함께 살기 위하여 방을 보러 올라오셨다.

할머니가 올라오자, 외가 쪽에서는 얼씬도 않았고, 친가 쪽도 할머니만 뵌 후 더 머물지 못하고 황황히 떠나갔다. 분주하던 집은 갑자기 냉기가 감돌았다. 나는 우울해진 집 안 분위기가 싫었다.

어느 저녁인가 밥상이 차려졌고, 유난히 식탐이 많았던 나는, 밥 너 기다린 지 오래다 하면서 무릎으로 슬라이딩을 하면서 밥상에 부딪혀 갔다.

밥상이 무릎에 부딪혀 흔들렸다.

할머니는 나를 노려보면서 “어디 밥 상 앞에서…” 하고는 숟가락으로 국그릇을 경고하듯 두드렸다.

그 정도에 눈 깜짝 할 내가 아니었다. 예전처럼 밥상 위의 가장 맛있는 반찬을 찜 한 뒤, 젓가락을 그 쪽으로 향했다.

툭! 내 젓가락은 할머니의 날렵한 젓가락에 의해 튕겨져 나갔다.

“어디 어른도 손 안된 반찬에 먼저 젓가락이?” 하고 말한 뒤, “애미는 애를 어떻게 가르쳤기에…”

미쳐 돌아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밥에 숟가락을 푹! 수직으로 꽂아놓고 팔짱을 낀 채 할머니를 노려보았다.

불 같은 내 성격을 잘 아시는 어머니는, 밥상을 걷어차지 말라고 내 무릎을 손으로 지긋이 눌렀다. 밥상 맞은 편에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어머니가 그러시지 않아도 밥상은 걷어차지 못했으리라.

할머니는 노려보고 있는 나를 싹 무시한 채, 생선 하나를 잡더니 살점을 세로로 쭉 갈라서 형의 밥 위에 얹어놓고 형의 등을 쓰다듬으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

꼭 약 오르지 하고 놀리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방 바닥에 집어 던졌고, 소리쳤다.

“할머니는 나만 갖고 지랄이야. 밥 안 먹어, 드러워서 안 먹어!”

This Post Has 5 Comments

  1. 귀여운 소년이었네요. 하하.
    순하기만 할 것 같은 지금과는 아주 다르군요.

    1. 여인

      심술통이었죠. 부딪히기만 해도 깨진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2. 흰돌고래

    저희 친척 동생도 장난 아니었는데 지금은 아주 어른스러워졌어요. ( 그렇게 변하는 걸 처음 볼땐 아주 놀라웠어요)

    여인님 입에서 나온 마지막 한 줄이 압권이에요!

    1. 旅인

      그래도 욕은 잘 못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욕하면 어머니께서 험한 말을 한다고 뭐라고 해서…

      당시 지랄은 아마 제 최대의 욕이었을 겁니다.

  3. 旅인

    유리알 유희 08.12.21. 23:45
    아, 장손의 편애, 제고향에서도 무척 심했답니다. 장손이 아닌 나, 그래서 더욱더 과격해질 수 밖에 없는, 재미있군요. 저는 할머니 할어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거든요. 아버지가 늦동인지라 제가 태어나기 전에 모두 돌아가셨다는군요. 그래서 친구들의 할머니를 무척 부러워했거늘, 여기 나, 의 할머니는 어떨까. 지켜 보렵니다.
    ┗ 旅인 08.12.22. 09:52
    계속 보셔도 그 할머니는 그 할머니입니다. 황소고집에 빈틈없는 자세…^^

    아르 08.12.24. 09:40
    웃으면 안되지만 좀 웃을께요 ㅎㅎ 날렵한 할머니의 젓가락에 툭~
    ┗ 旅인 08.12.24. 11:23
    그 할머니에 그 손자라는 생각은 안드시는지요? 저희 어머니께선 어렸을 때 제게 “너의 성질이나, 고집은 네 할머니를 꼭 빼닮았다”고 하시곤 했습니다.

    샤론 09.01.07. 13:47
    성격 나오고 있네요..ㅎㅎㅎㅎㅎ
    ┗ 旅인 09.01.08. 22:36
    좀 그랬습니다.

    엘프 09.06.17. 17:02
    ㅋ 할머니와 한 판 붙지않을 수 없겠네요. 그러나 그 전에 부모님에게 몰매를 좀 맞지않았을까 싶다능^^;
    ┗ 旅인 09.06.18. 13:26
    여태까지 부모님한테 맞은 매의 댓수는 한손으로 꼽을 수 있는데… 밖에서 맞은 매가 너무 많았어요. 초등 때는 항상 오늘은 몇대나 맞을까하는 고민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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